소설리스트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38화 (38/130)

호송길 (3)

038화 호송길 (3)

해인은 심 만호에게 자신의 내력을 알리는 게 과연 잘하는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생부가 역모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호의적인 관계가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복권되었다고는 하나 한 때 주상의 눈 밖에 난 집안이 아닌가.

반골이었으니 역모로 몰렸을 것이고 자식 또한 그 기질을 물려받았을 터.

권력을 지향하는 자라면 자신의 전정에 방해될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만호는 사병을 키우는 집단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또 외직 중에 한직에 해당하는 회양 만호로 있으면서도 한성에 줄을 대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장으로서의 자세 또한 남달라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과거를 알린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싶어 말문을 열었다.

“20년 전에 생부가 역모의 누명을 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생모께서는.....”

해인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만호는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렇게 밤이 이슥토록 심종현과의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지난밤을 계기로 부쩍 가까워진 만호 심종현은 철원으로 향하는 내내 해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해인의 기구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무척 살갑게 대했다.

“최 교위. 회양 일대의 산천도 기억나는가?”

“예. 나리. 제가 철원에서 평강으로 쉽게 넘나든 건 다 왜구의 지도 덕분이었습니다.”

“그럼. 기억나는 대로 그려줄 수 있겠는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지도는 늘 품고 다니는 터라 언제든지 복제가 가능했다.

곧 왜구가 쳐들어온다면 지도가 요긴하게 사용될 수도 있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만호가 지도를 활용하여 병력을 잘 전개시킨다면 강원도로 올라오는 왜구의 숨통을 조금을 죌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본 것인데 어찌.......”

“절간이라는 곳이 염불 외는 것 외에는 할 게 별로 없거든요. 한동안 지도를 노리개 삼아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기에 대부분 기억하고 있습니다. 원본과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비슷하게나마 그려낼 수 있을 겁니다.”

그 복잡한 지도를 어찌 기억만으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만, 심 만호는 의심조차 않고 받아들였다.

“오호! 그렇다면 천만 다행한 일일세. 내가 틈나는대로 회양근처를 돌아다니기는 했으나 주변을 모두 꿰뚫지는 못했네.”

비단 심종현만의 문제일까.

열심히 근무한들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고, 조금 뛰어나다 싶으면 주변의 시기로 변방으로 떠도는 게 무관들의 현실이다.

만약 관할지역을 파악한다고 돌아다니면 지방수령들이 그걸 곱게 볼 것인가.

아마 역모를 획책한다고 장계를 올릴 것이다.

진을 책임지는 장수가 지리에 익숙지 않으면 무슨 수로 병력을 전개시키겠는가.

거기에 변변한 무기도 없는데.

***

철원에 도착하자 심 만호와 군졸들은 지체 없이 회양으로 돌아갔다.

공을 세우고도 자랑삼지 않고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심 만호가 달리 보였다.

웬만한 장수라면 한성까지 동행하여 주상 얼굴이라도 보고가려고 할 것인데 말이다.

철원서부터는 도호부의 나졸들이 호송을 맡았다.

그때까지도 평강 등의 수령들을 추포한다는 얘기가 없었다.

당장 체포할 증좌도 없을뿐더러 그들이 속한 파당에서 견제를 하고 있기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문에는 자리를 비웠던 평강 현감이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정사를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허인회가 분통을 터뜨렸으나 주상과 조정에서 내린 결정을 어쩌겠는가.

“어허! 이를 어찌할꼬. 한성에서 우리를 똥 친 막대기 취급하는구나.”

“무슨 말씀이옵니까?”

“아직도 의금부에서 움직이지 않은 게 그 증거가 아닌가.”

“........”

“그것뿐이라면 내가 이런 말을 안 하겠지만 죄인을 호송하라며 붙여준 나졸들을 보게. 겨우 삼십 명이잖은가. 역모를 꾸미는 자들을 토포했음에도 이런 반응인 걸 보면 우리가 괜한 일을 한 셈이네. 주상 전하와 조정신료들이 이번 일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음이야. 우리는 주상의 교지도 없이 함부로 토벌에 나선 셈이고 말일세.”

조금 과한 해석이긴 하나, 이번 일을 그리 중요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은 감지할 수 있었다.

철원도호부사의 시큰둥한 반응도 그렇고 호송 병력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도 그렇고.

“조정에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미적거리나 보옵니다.”

“어사가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받은 것만으로도 조정이 들썩거릴 일이거늘. 하물며 수상한 무리들의 산채를 토벌했음에도 이런다는 게 말이 되는가?”

“.........”

허인회의 분통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해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해인이 보기에는 어사로 암행하다가 불귀의 객이 된 사례가 종종 있었기에 허인회도 그저 운이 나쁜 경우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찬가지로 명종 대왕 때부터 도처에서 도적들이 들끓고 있었기에 이번에 금강산에서 토포한 무리도 산적 떼로 보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리. 예전에도 변복한 어사 일행을 지나가는 길손으로 알고 습격한 사례가 있었으니 운이 나빴다고 보는 게 아닌지요.”

“암습자들이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다 했잖은가. 그래서 장계에도 엄중한 사안이라고 했거늘. 그런데 이게 어찌 단순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를 습격한 무리와 연관 있는 산채를 토벌하여 이백여 죄인들을 압송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소홀할 수는 없음이네.”

“소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만. 다만 저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증좌가 없으니 이번 사건을 그리 중하게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최 교위는 저들이 무지막지한 도적 떼로 보이는가?”

“그렇게 보지는 않사옵니다.”

허인회는 일련의 사건들을 오로지 역모로만 보고 있어서 왜국이 곧 조선을 침략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성에 올린 장계에도 산채의 무리들이 역모를 꾸민다고 했지 저들의 주장대로 왜국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걸 공론화하면 주상이나 조정신료들이 과연 믿어줄지도 의문이었고, 평화로운 때에 민심만 나빠진다고 할 것이다.

괜한 분란만 일으킨다며 오히려 탄핵을 받을 수도 있음이다.

“흠! 주상 전하께서 작금의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거나 조정신료들의 감언이설에 판단이 흐려진 게야.”

“나리. 고정하시지요. 듣는 귀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허인회는 흥분한 나머지 주상을 능멸하는 발언까지 했다.

해인이 주의를 환기시키자 아차 싶었던지 허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내가 실언을 했나보이.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는 내내 만호와 계속 붙어 있던데 혹시 이상한 얘기를 들은 건 없었나?”

해인과 심종현이 자주 어울리는 걸 여상히 보지는 않은 모양이다.

“심 만호는 암습자를 보낸 자들이 다른 무리가 아닐까 추측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사로잡은 산채 두령들의 증언으로 봤을 때 어사 영감을 해코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하더이다.”

“최 교위의 생각은 어떤가?”

“소관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약간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소관이 쫓던 우두머리 사내와 잠시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해인의 말이 끝나자 허인회는 하늘만 쳐다봤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왜구의 간자들이 조선 땅을 헤집고 다녔다면 형조나 병조의 관리들이 눈 감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나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말일세.”

“지방 수령들이 간자를 붙잡고도 한성에 보고하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괜히 민심만 흐린다는 소리를 들을 것인데....”

“그건 사실이네. 워낙 평화로운 때라 그런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분위기이지. 그래도 혹시 모를 침략에 대비하고 있기는 하네. 유성룡 대감 같은 이가 주창을 하여 동래진과 부산진 등의 성채를 보수하고 있잖은가.”

간자들을 적발한들 과연 중앙에까지 제대로 보고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외직에 있는 지방 수령들은 귀찮은 일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써 사건을 축소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주장대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조정에서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파당끼리 무리지어 서로 헐뜯기 바쁜 조정신료들이 쳐다보기나 하겠는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겠지만, 외부의 일은 가급적 축소하거나 공론화하는 걸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상도 신하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해 있는지 잘 살피지 않고 말이다.

그런 현실임을 허인회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심 만호도 왜구의 침입이 곧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응? 무슨 근거로?”

“부산진에 있는 지인에게 들었답니다. 최근에 왜구의 사신이 당도했는데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했답니다. 이는 곧 조선을 발아래에 놓겠다는 저의가 아니겠습니까.”

“본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네. 그런데 그렇게 확대해석할 사안은 아니라고 보았네만.”

“침략을 위한 명분 쌓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허! 무반들은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하는 모양이군. 한줌도 안 되는 왜구를 그리 높이 보다니. 쯧쯧.....”

허인회도 대다수의 문반들처럼 왜국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소관이 절간에 있었을 때 왜구의 간자들과 조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조선 땅에서 암약하는 지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뭐라? 최 교위도 왜구의 간자들을 만났다고?”

“예. 수상쩍어서 뒤를 쫓다가 겨룬 적이 있었습니다.”

“어허!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래서 어찌되었나.”

“도주하는 바람에 놓치기는 했지만 만만찮은 자들이었습니다.”

“철원 지방에도 나타났다면 사방에 왜구의 간자들이 깔려 있다는 말인데.....”

잠시 생각에 잠기던 허인회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짚고 있었던 것 같네.”

***

호송 병력이 많니 적니 해도 한성까지 오는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개선장군처럼 한성으로 입성한 허인회는 주상에게 상찬을 받기는 했으나 조정에서는 수상한 무리들을 역모 세력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도적떼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허인회는 산채의 무리들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일어선 세력이라는 조사보고서를 올렸지만, 평화로운 때에 괜히 민심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핀잔만 들어야 했다.

허인회의 의견이 묵살된 이유는 서인들과 동인들의 반목이 원인이었다.

허인회가 어느 파당에도 들지 않은 인물이기에 진실이 묻히고 있었던 것이다.

연전에 왜국으로 파견된 통신사 중에 동인 출신들은 열도를 일통한 도요토미가 감히 바다를 건널 위인이 못된다고 했었고, 서인 출신들은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라는 의견을 냈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킬 위인이 아니라는 동인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자 서인들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하!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 아무리 당파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어도 그렇지. 이렇게 안일하게 대처하다니.....”

허인회 또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자 매우 낙심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역모의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정황상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걸 대충 짐작했기에 이리 한탄하는 거였다.

“그럼. 나를 해하려는 자는 또 누구인고?”

“영감께서 형조 참의를 지내셨을 때 힘 있는 가문과 척을 진 적이 없었는지요?”

형조 참의라는 직함은 죄를 묻고 벌하는 곳이라 누군가의 원망을 살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 그렇지만 내게 주어진 사건을 공평무사하게 처결하였기에 원한을 살 일은 없었네. 설사 있다고 해도 그렇지 주상 전하의 명으로 암행하는 관원에게 감히 암습을 가할 정도라면 역모나 마찬가지일세.”

“한성에 머무는 동안 소관이 은밀히 조사해보겠나이다.”

“주상 전하께서 곧 바로 함경도로 움직이라고 하셨지만 칭병을 핑계로 시간을 좀 끌어보겠네.”

“며칠만 말미를 주옵소서.”

사실 허인회를 노리는 자들을 조사해보겠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에 뭘 조사할 것이며, 설사 알아낸다 해도 당장 조치할 수도 없다.

다시 암습자를 보낸다면 해인이 몸으로 막으면 되지만, 한성에 있는 외가와 친인들이 걱정이었다.

왜구의 침략이 바로 눈앞에 왔는데 아무런 조치도 없이 한성을 떠난다는 게 영 찜찜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