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1)
039화 유비무환 (1)
해인은 망설임 끝에 우선 외가 식구들에게 다가올 전란을 대비하라고 말했다.
망설인 이유는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했을 때 보일 반응 때문이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을 기정사실화한다는 건 납득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설득할 증거가 너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정황상으로 그렇다고 설득할 수밖에.
반신반의하던 외가 식구들도 해인이 그동안 겪은 일들을 얘기하자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해인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런 엄청난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외사촌 아우인 찬영을 따로이 불러 자신이 함경도 암행 중에 전란이 난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일단 보개산 심현사로 피신하라 일렀다.
그나마도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기에.
그런 후 한성 판윤으로 있는 김인수 대감을 찾아뵈었다.
생부와 각별한 사이였고 해인에게 외가를 찾게 해 준 은인이기에 미리 대비하라고 해 줘야 도리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 북촌 김 대감 댁 사랑방에는 해인과 김인수가 주안상을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자네는 조만간 왜구가 조선 땅을 밟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게로군.”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리 추측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왜구의 간자들이 조선의 산천을 살피고 있었다면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올해든 내년이든 시기가 문제일 것입니다.”
해인은 당장이라도 왜구가 쳐들어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 후면 서리가 내리고 추워진다고는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음이다.
병법을 아는 자라면 오히려 방심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음이네.”
“이미 짐작하고 준비하고 있는 신료들도 있을 것이옵니다. 대감께서도 미리 대비하셔야합니다. 왜국의 동태를 제대로 살필 생각은 않고 파당의 의견에 따라 전란이 없다고 고집하는 자들의 주장을 무시하소서.”
“무슨 말인지 알았네.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사람을 풀어 왜국의 동태를 살펴보겠네.”
해인이 워낙 확신하자 김인수도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러마고 했다.
“그리고 중겸에게 이르러 날랜 장정들을 미리 뽑아 후일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주변의 시선이 있는데 어찌···.”
김인수가 중겸을 비롯한 날랜 장정 몇을 곁에 두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이런 일을 대비한 것일 터.
“왜구의 간자들과 겨루어 보았을 때 개개인의 무력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성까지 뚫린다면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하의 도리가 있는데 개별적인 행동을 할 수가 있겠는가?”
“대감마님께서 주상전하와 함께 움직이면 가솔들은 누가 챙기겠습니까.”
한성이 위험해지면 왕실은 필시 피난길에 나설 것이다.
그런 상황이면 왕을 따르는 신하들이 자신의 가솔들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가솔들은 별도로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데, 난리 통에 험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있어야 한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미리 준비하여 나쁠 건 없겠어. 그런데 말일세. 자넬 보니까 더 이상 관직에 미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 않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어찌 무관이 꽁무니를 빼겠습니까. 다만 하위 무관이란 점이 아쉽지만 이번에 수상한 무리를 토포한 공이 있으니 약간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란이 일어나면 무관은 종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하위 무관으로 종군으면 병법도 모르는 문관들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관직이 높으면 무모한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고 독자적인 병법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만약 전란이 일어난다면 관직이 높으면 훨씬 편하긴 하지. 나도 조회 때 자네의 공을 거론하겠네. 만약 품계가 오르면 중앙에 머무르게.”
“소관은 변방에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한성은 층층시하다.
눈치만 살피는 것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 변방을 지원하려는 것이다.
“왜 변방인가?”
“기회가 많을 거 같아 그렇습니다.”
“별도의 세력을 키우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래.”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김인수가 그리 말하자 불현듯 자신만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수하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감히 그런 생각은 없나이다. 너른 벌을 종횡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내가 그 정도는 힘을 써 줄 수 있네만.”
“때가 되면 대감마님께 청을 올리겠나이다.”
* * *
한성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무과 시험 동기인 김민혁이었다.
김민혁은 용양위로 자리를 옮겼는데 전보다 신수가 더 좋아 보였다.
“역시 자네는 용양위에 있는 게 더 신관이 편한 모양이네.”
“그런 말 말게. 요즘 술에 절어 살고 있네.”
김민혁은 퇴청 후에는 매일 색주가에서 산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굳이 명월옥으로 불러낼 건 뭔가.”
“안사람의 눈치가 보여서 그러네.”
김민혁은 이미 장가를 들어 세 살된 여식을 두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가는 터라 부인의 성화가 이만저만 아닌 모양이었다.
본가의 도움이 있으니까 흥청망정이지 종8품 녹봉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도대체 무슨 속 상하는 일이 있기에 매일 색주가 출입을 하는가?”
“시절이 어수선하여 마음 둘 곳이 없어서 그러네.”
당장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에도 급급한 실정인데, 왜구가 쳐들어오네 마네 하며 소모적인 정쟁을 일삼고 있었으니 무관들의 속은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떠나 버렸고, 양반과 노비를 빼고 나면 군역을 치를 자도 별로 없는 실정이었다.
여진이나 왜구를 한낱 무뢰배에 불과하다고 무시하고 있었으니 뜻 있는 무관들은 술자리를 빌어 답답함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백날 울분을 토하면 무엇 하겠나. 그럴 틈이 있으면 왜구의 동향이라도 알아봐야지.”
“우리도 모이면 왜구의 침략이 언제일지가 논쟁거리였네.”
아예 모르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금강산 산채에서 토포한 무리들에 대한 얘기는 없었나?”
“참의 영감과 자네의 무용담이 회자되고 있네만.”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아는가?”
“······?”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힘을 기르는 중이라더군.”
“어허! 이제는 도적 떼도 대의를 앞세우는 모양일세. 자네가 직접 그들을 토벌했으니 알아봤을 게 아닌가.”
“내가 볼 때도 그런 뜻으로 무리를 이룬 것 같았네.”
해인의 말에 김민혁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더니 해인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술이 과하여 그러는 게 아닐지 살피는 것 같았다.
“이것 보게. 내 정신은 멀쩡하다네. 대강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방 수령들이 주축이 되어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으이. 내가 어사의 명으로 잠행해 보았기에 그리 짐작하는 것일세.”
“그게 정말인가? 지방 수령들이 임의로 사병을 양성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중앙에 알리지도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인가?”
“그래서 급히 자네를 보자고 한 걸세.”
작금의 조선은 나아갈 방향을 잃은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때 전란이 나면 조성 강토가 유린되는 건 금방이다.
남해에 상륙하여 노략질하는 규모라면 어찌 막아내겠지만 대규모 침략은 현재로서는 막을 길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방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규모의 군사가 바다를 건넌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날 김민혁과 향후 전란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성까지 위험해지면 식솔들을 보개산 심현사로 데려오라는 당부를 하고 헤어졌다.
* * *
한성에 온지 보름 후 한성을 떠나 다시 함경도로 향했다.
혜화문을 지날 무렵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혜화문은 동소문이라고도 불리는데, 동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주로 혜화문을 이용한다.
이 문을 나서면 화계사가 있는 수유현이 있고 그 뒤로 의정부와 양주로 이어진다.
함경도까지 오가는 것만 해도 두 달이 빠듯할 것이기에 아무래도 해를 넘겨야 할 것 같아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그것도 별일 없어야 가능할 것이고, 그사이에 왜구들이 바다를 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교위 나리의 얼굴에 어째 그늘이 많아 보이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자 어 부위가 농담 삼아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나귀를 타고 뒤따르던 허인회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자의 정체를 알아냈기에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한성에서 며칠 미적거린 것도 암습자들의 배후 인물이 누군지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지금껏 얘기가 없기에 아직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최 교위.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나리. 날씨가 마땅찮아 그런 것뿐입니다.”
암행에 나섰으니 허인회의 호칭을 나리로 바꿔 불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너무 속에 담아 두고 있어도 병을 부른다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 걱정할 일도 없었고요.”
복잡한 심사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날씨 탓으로 돌릴 수밖에.
걱정할 일이 없다는 말에 허인회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설사 또 다른 암습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최 교위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므로.
두 번이나 겪었던 일인지라 허인회도 그리 주눅 들지는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 먹은 허인회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오늘 내로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길을 접으세.”
막 화계사 근처를 지나는 중이었는데 마침 제법 규모가 있는 주막도 눈에 띄었던 터라 비를 핑계 삼아 쉬고 싶었던 것이다.
“나리. 이제 중참 때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이미 옷은 젖은 터라 내처 더 걸을 생각이었다.
날씨를 핑계 삼아 길을 접으려고 해도 갈 길이 구만리인 게 부담되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고뿔이라도 들면 걸음이 더 지체되네. 일찌감치 주막에 들어가 옷을 말리는 게 났겠네.”
“예. 나리. 분부 받잡겠나이다.”
허인회가 일찍 들어가 쉬자고 하자 다들 기꺼워했다.
함경도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비를 맞아가며 강행군할 게 뭐 있겠냐는 표정들이었다.
일행이 더 늘어났기에 혼자만 고집부릴 수 없어서 허인회의 분부를 군소리 없이 따랐다.
이번 행차에는 검을 잘 쓰는 정9품 무관인 사용(司勇) 셋이 합세했던 것이다.
어사 일행이 두 번이나 습격받았다고 하자 놀란 주상이 호위 인력을 더 늘려 주었다.
“주모. 여기 뜨끈한 고깃국과 탁주를 좀 내오고 오늘은 손님을 그만 받게. 그리고 봉놋방에 군불도 넉넉히 넣어 주고.”
괄괄한 목소리인 어형권 부위가 주막으로 들어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장사꾼 복장에 비까지 쫄딱 맞은 몰골이지만 허우대가 좋은지라 주모는 나리라고 부르며 반겼다.
“예예. 나리들. 분부대로 합지요.”
중늙은이 하나와 장정 일곱이 들이닥치자 주모는 엉덩이에서 비파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했다.
비가 와서 주막을 찾는 사람이 없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장사꾼들이 들이닥쳤으니 나라님을 맞는 것만큼이나 황송하고 반가운 것이다.
부엌 귀퉁이에 줄을 매달아 젖은 옷을 주렁주렁 걸어 주며 걸쭉한 입담으로 일행들을 웃게 했다.
아직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못한 해인과 허인회만 멋쩍은 듯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비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리. 어 부위와 김 부위는 이번에 하는 일 없이 품계가 올랐다며 무척 황송해하고 있습니다.”
“한 일이 왜 없겠나. 오며 가며 마음 졸인 것만으로도 상급을 받아 마땅하거늘.”
“그래도 직접 토벌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어부지리를 얻은 것 같아 송구하답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됐으이.”
“둘은 이번 암행이 끝나고 고향인 압록 근처의 만호진으로 갔으면 하더이다.”
“내가 그 정도는 힘을 써 줄 수 있지. 자네 덕분에 이번에 나도 품계가 올랐잖은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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