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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40화 (40/130)

유비무환 (2)

040화 유비무환 (2)

이번의 산채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허인회는 정3품에서 종2품으로 한 품계를 올려 가의대부를 제수받았고, 해인과 두 명의 무관들도 또 한 품계를 더 올려 각각 정6품 진용교위와 정7품 적순부위를 제수받게 되었다.

불과 두 달 전에 두 품계가 올랐고 또 품계가 오르니까 나중에 깎아내리지 않을까 염려될 판이었다.

물론 그럴 만한 공을 세웠으니까 당연한 결과겠지만, 남들이 인정해 줄지 의문이었다.

회양 만호도 종4품에서 종3품 건공장군으로 제수받고 넉넉한 상급이 내려진 건 불문가지였다.

다만 금강산 일대에 또 다른 무리가 있을까 봐 당분간 회양 만호직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한다.

“소관 또한 불과 석 달 만에 종7품에서 정6품으로 세 단계나 건너뛰었으니 남들이 엉터리 품계라고 흉볼까 저어됩니다.”

“최 교위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자네의 공에 비해 모자란 것 같아 미안할 지경이네. 내 욕심을 차리자고 호위무관으로 데리고 있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고.”

허인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지 몰라도 내용을 잘 모르는 자들은 분명히 입방아를 찧어 댈 거였다.

남 잘되는 걸 시샘하기 바쁜 자들은 한성과 조정에 넘치고 흘렀다.

동인 서인으로 편을 갈라 서로를 헐뜯기 바빠서 올곧은 의견을 낸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지경이었다.

비근한 예로 최근에 서인들이 득세하자 주상은 좌의정으로 있는 유성룡 대감에게 이조참판을 겸직하게 했는데,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동래성을 개축해야 한다고 주상에게 직언한 것을 두고 민심을 불안케 한 망발이라며 연일 흔들어 대고 있었다.

청렴하고 강직하기 그지없는 좌의정을 동인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어제 술자리에서 김민혁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한성에 며칠 있었더니 귀만 더럽혀진 것 같습니다.”

“어허!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다니 웬일인가.”

정6품에 불과한 자가 종2품 영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격의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주었기에 해인을 은인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속 깊고 진중한 해인에게 많이 기대고 있는 편이라 수위를 벗어난 얘기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함부로 말씀드려 송구하옵니다.”

“아닐세. 나도 이번에 잠시 한성에 머물면서 느낀 바가 많네. 그동안 내 시야가 좁았다는 걸 통감하고 있었네.”

한성으로 압송한 죄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왜구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대의로 나섰다고 했음에도 도적 떼로 몰며 애써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가 문제였는데, 왜구의 간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니까 왜국의 상황을 알아보자고 허인회가 건의하자 서인에 속하는 신료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파당의 입장과 영달만을 생각하는, 도적 무리나 다를 바 없었다.

“조정 신료들의 안일한 대처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과연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해지옵니다.”

“자네는 전란이 일어날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군. 그래.”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 봐야 몇천 명 정도로는 조선을 쉽게 유린할 수 없을 걸세. 바다를 건너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허인회도 바다라는 천연의 방벽을 믿고 있는 듯했다.

“간자들이 몇 년 동안 조선 산하를 헤집고 다녔다면 몇천 명만 보내겠습니까? 조선과 왜국 사이의 바다가 멀다면 모를까 날씨가 좋을 때는 대마도가 희미하게 보일 만큼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조건이면 몇만 명을 보내는 것도 부담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이 일을 어찌할꼬. 지금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닌가.”

탄식이 나올 만한 일이 아닌가.

무관인 해인이 단정적으로 말하자 허인회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리. 만일 전란이 일어나서 한성까지 위험해지면 사가의 가솔들이 피할 곳은 있습니까?”

“한성이 위험해지면 주상께서 몽진을 가실 텐데 신하 된 도리로 어찌 피한단 말인가.”

“몽진 때 조정 신료들의 가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조선의 그 누구도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전란이 일어나도 명나라가 도와줄 것으로 믿고 있는 터라 몽진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불충이다.

“설사 그런 상황이라도 그렇지. 백성들을 사지에 내놓고 가솔들의 안전만 도모할 수는 없네.”

“난리 통에 정사에 전념하시려면 가솔들이 안돈되어야 운신의 폭도 넓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식구들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과연 올바르게 정사를 돌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닥쳐서는 이미 늦습니다. 왜국의 전력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순식간에 한성까지 들이닥칠 것 같아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보개산에서 조우한 간자들의 무예는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왜국의 모든 병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몇십 년간 내전을 치른 병사들의 실전 감각도 그에 못지않으리라.

그런 자들이 조선 땅을 밟는다면 한성도 순식간일 것이다.

“어허! 너무 겁주지 말게. 오금이 다 저려 오네그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미리 대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네. 함경도 암행을 마치고 와서 대비를 해 놓겠네.”

“나리와 소관이 한성을 비운 틈에 쳐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병법을 아는 자라면 결코 겨울에 병사를 움직이지 않네.”

병법을 아니까 겨울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틈을 비집으면 더 빨리 점령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리. 이번에 일행이 늘어 갑득이 할 일이 그리 없습니다. 갑득이를 사가로 돌려보내어 미리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왜구들이 이번 겨울이 아니라면 내년 봄에라도 올 수 있습니다.”

갑득은 첫 암행 때부터 달고 다니던 허인회의 노비였던 것이다.

“어허 참. 왜 이리 조급해졌나. 그래. 쯧쯧···.”

* * *

다음 날 허인회는 못 이기는 척하고 갑득을 한성으로 돌려세웠다.

지난밤을 꼬박 지새우다시피 장고한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허인회는 갑득을 보낸 후 홀가분한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데 포천과 철원을 경계 삼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갯마루에서 다시 발이 묶였다.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던 길손들이 서둘러 근처에 있는 주막집으로 내달았다.

마침 고갯마루에 주막이 세 채나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 암행 때는 연천으로 방향을 잡았기에 이곳은 초행이었다.

주막을 보던 허인회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고갯마루에 웬 주막이 세 채나 있누.”

“포천에 수시로 장시가 열려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나 봅니다.”

이곳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물산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왜구가 그린 지도를 갖고 있는 해인은 어디가 어디인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

만약 이곳만 틀어막으면 험한 산길을 제외하고는 경기도로 가는 길은 막힌다.

이 정도 위치라면 요충지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오가는 길손이 저리 많은가 보구나.”

“이곳에 진을 세우면 군사적으로도 무척 요긴하게 쓰일 것 같습니다.”

“자네 눈에는 그런 것만 보이는가 보이. 나는 시야가 트여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건만.”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포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리. 아무래도 잠시 쉬었다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가을장마 같은데···.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설 수도 없고 참 낭패일세.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서서히 추워질 텐데 그것도 걱정이고. 일찌감치 주막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네.”

한 해에 내릴 비는 그해에 다 내린다고 했다.

올해 내내 가뭄이 들었으니 그동안 구경 못한 비가 본격적으로 내릴 거였다.

갈 길은 먼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해인은 속이 탔다.

이러다가 엄동설한에 함경도를 헤매게 될 것이라 마음만 바빴다.

한성을 떠날 때 함경도의 혹독한 추위에 대비하여 단단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발생하자 마음이 무거웠다.

날씨뿐만 아니라 다른 것이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아닥친다고 하지 않던가.

혹여 저번처럼 또 다른 암습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나리. 오가는 과객들이 많아 행적이 노출될까 저어됩니다. 잠시 쉬었다가 서둘러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또 암습을 가할 것으로 보는가? 한성에는 의심스러운 자가 없다면서.”

“사주한 자가 누군지 모르기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사주한 자를 알아보겠다는 핑계로 한성에서 며칠 지체했지만 실제로는 사적인 볼일을 본 게 다였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최 교위. 혹시 나를 해하려 하는 자들이 왜국의 사주를 받은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를 해하려는 자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네.”

허인회의 말에 해인은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나친 상상이긴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년간 간자들을 보내어 조선을 염탐했다면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될 인물을 미리 제거할 수 있음이다.

허인회는 왜국의 행사에 가장 걸림돌이 될 신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좌의정 유성룡처럼 왜구의 침입을 경고하는 관리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일 터.

다만 한성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리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사옵니다.”

허인회의 성품으로 봤을 때 형조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않았으니 큰 원한을 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어느 파당에도 들지 않았고 청렴 강직하고 일 처리 또한 공평무사한 관료였으니까.

그렇다면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이 사주했다고밖에 볼 수 없음이다.

그게 왜구라고 생각한 허인회의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으흠.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일전에 암습자들의 무예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소관이 실전을 많이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무인은 아니었습니다.”

“놈들이 왜구인 것 같지는 않던가?”

“말투나 구사하는 검술로 보아서는 왜구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구가 조선말을 그렇게 유창하게 구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이 펼치는 검술도 그리 낯설지 않았고.

“어허! 이제는 조선 사람들이 왜구들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구나.”

허인회는 왜구가 사주한 것으로 아예 단정 짓고 있었다.

정황상으로 봐도 제법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쉬어 가자는 것일세. 비로 인해 걸음이 늦어질 것이고 그러면 놈들이 더 쉽게 접근할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 지금 더 움직여봐야 이십 리가 한계입니다.”

해인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비를 뚫고 걸어 봐야 옷만 젖고 고뿔 걸리기에 십상이다.

그리고 기껏 움직여 봐야 이십 리 길이다.

어쩔 수 없이 규모가 가장 작은 주막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다른 주막에는 길손들이 이미 들어차 있어서 중노미 하나 없는 규모가 작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봉놋방과 작은방이 전부인 옹색한 주막이었다.

작은방은 이미 선객이 들어가 있어서 봉놋방이 어사 일행의 차지가 되었다.

봉놋방으로 금세 뜨끈한 국밥과 탁주 동이가 들여졌다.

탁주 사발을 들고 막 마시려던 어 부위를 제지한 해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부위. 소피 보러 가는 척하고 주변의 주막을 살펴보오.”

저번 암행 때 험한 일을 여러 번 겪어 본 어 부위는 금세 긴장된 얼굴이 되었다.

“교위 나리. 무슨 낌새라도 느끼셨소?”

“날씨가 우중충하면 애초에 길을 나서지 않는 게 정상이거늘. 유난히 길손이 많은 게 마음에 걸리오.”

주막에 들어서기 전부터 해인의 경계심을 묘하게 자극하는 게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십여 명이나 이곳에 모인 것도 이상했고 하나같이 젊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작은 방에 든 객들은 어쩌지요?”

“그들은 평범한 행상에 불과한 자들이오.”

“그럼 나머지 두 곳의 주막에 든 자들이 의심스러운 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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