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3)
041화 유비무환 (3)
비를 피하러 주막에 들어갔다면 대부분 요기 삼아 탁주 한 사발 정도를 하게 마련이다.
탁주가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떠들썩해지고 술이 좀 과한 축들끼리는 멱살잡이도 하는 게 흔히 볼 수 있는 주막의 풍경이다.
그런데 다른 주막에 든 장정들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곧 술추렴을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밖에 나가서 동태를 살피고 돌아온 어형권과 김우식은 그리 보고했다.
“교위 나리. 아무리 봐도 수상쩍은 자들인 것 같소. 술추렴을 하는 자는 없었소이다.”
술을 밥 먹는 것처럼 좋아하는 백성들이 주막에 들어가서 맨숭맨숭하게 있을 턱이 없다.
몸이 안 좋아 술을 못 마시거나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일 터.
모두 동시에 몸이 안 좋을 리는 만무하니 수상한 무리로밖에 볼 수 없었다.
“다들 무기를 챙기시게. 김 부위는 나리를 호위하오.”
이미 두 부위들이 바깥 동향을 살필 때부터 긴장하고 있던 세 명의 무관들도 행랑에서 환도를 빼 들었다.
오는 길에 잠시 실력을 가늠해 본 결과 품계는 낮으나 환도를 다루는 건 부위들보다 윗길이었다.
단병접전에는 활보다는 환도가 훨씬 유리하기에 한편으로 든든했다.
“최 교위. 혹시 저들이···.”
이것저것 지시하는 해인에게 바짝 긴장한 허인회가 물었다.
“왜구들은 아닌 것 같사오나 수상쩍은 자들이라 조사해 보려는 겁니다.”
수상한 자들을 곁에 두고 마음 졸이고 있느니 먼저 제압해서 조사하는 게 백번 낫다.
“우리를 해하려는 자들이 아니라면 낭패 아닌가?”
“면면이 수상하여 조사하는 것인데 백성 된 자로서 사소한 불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설사 헛짚었다 해도 대감의 반열에 든 허인회에게 누가 있어 감히 항의하겠는가.
왜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때인지라 백성들에게 다소 불편을 끼친들 그게 무슨 잘못이랴 싶었다.
자신과 어사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지엽적이고 사소한 걱정으로 시기를 놓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 교위. 조심하게.”
“염려 마십시오. 나리.”
* * *
주막에 든 장정들이 수상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선제적으로 제압할 생각을 했었다.
심문 결과 허인회를 해하려는 무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냥 뒀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아무 일 없이 그들과 헤어지더라도 계속 마음을 졸일 것이기 때문이다.
봉놋방을 나온 해인은 건너편 주막으로 바람같이 접근했다.
어형권과 세 명의 무관들은 바로 옆의 주막을 치라고 했던 것이다.
건너편 주막은 봉놋방만 두 개에 작은 방도 세 개나 있는 제법 큰 규모라서 중노미도 둘이나 있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구경하고 있던 중노미 둘은 환도를 들고 나타난 해인에게 놀란 나머지 입만 벙긋거렸다.
백주대낮에 환도를 들고 주막으로 들이닥친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더 놀랐던 건 사람이 바람처럼 빨리 움직이는 장면을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입술에 손가락을 세운 채 눈을 부라렸더니 중노미 둘은 고개만 끄덕였다.
봉놋방 두 개 중 조금 큼직한 방문을 벼락같이 열어젖히자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사내 여섯이 기겁해서 일어났다.
“웬 놈이냐?”
“가진 병장기를 내 앞에 곱게 내놓아라.”
“도대체 누구냐?”
해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행랑을 올려 둔 시렁 줄부터 끊었다.
병장기를 내놓으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해야 정상인데, 상대방이 누구인지부터 확인하는 건 병장기를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병장기를 내놓지 않을 것 같아서 먼저 시렁 줄을 끊어 병장기를 꺼내지 못하게 한 거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시렁과 행랑들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방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로 봐서 쇠붙이가 들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바로 붙어 있던 봉놋방에서도 옆방의 상황을 알아챘는지 사람들이 허겁지겁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해인도 마당으로 나와 옆방에서 나오는 사내들에게 환도를 겨누었다.
옆방에서 나온 사내들은 넷이었다.
면면을 보아하니 그저 힘을 조금 쓰는 정도에 불과했다.
모두 병장기를 들고 덤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막상 급습하고 나니까 괜한 짓을 했다 싶었다.
기껏해야 도둑 떼일 것인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아닌가.
“몸에 칼자국이 나기 싫으면 곱게 무릎을 꿇어라.”
“도대체 누구기에 환도를 디밀고 겁박하느냐?”
옆방에서 뛰어나온 자는 환도를 겨누었음에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말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퍼런 환도 앞에 오금도 펴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주눅 들지 않고 누구인지 파악하려 든다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뭘 하는 작자들이기에 이렇게 무리 지어 움직이느냐?”
“그러는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밑도 끝도 없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게냐?”
“우리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곳에 있는 자들이 모두 한통속이란 말이구나.”
해인의 반문에 말을 붙였던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신색을 되찾더니 하오체로 바꾸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오. 우리는 포천 장시를 보고 강원도로 넘어가는 장사치들이오.”
“그런데 행랑에 병장기를 감추고 다닌단 말이냐?”
“오해이시오. 곳곳에서 산적 떼들이 덤벼드는 바람에 자구책으로 들고 다닐 뿐이오. 그런데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조사하는 게요?”
자신이 왜 해인에게 변명을 늘어놔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주막을 급습한 하위 무관 하나가 달려와 장정들을 제압했다고 전했다.
“교위 나리. 주막에 있던 자들을 제압하였나이다.”
해인에게 교위라고 하자 우두머리 격인 사내는 오히려 표정이 밝아졌다.
교위가 어떤 직위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직위가 있는 무관이라면 무뢰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므로.
“상한 자는 없는가?”
“조사할 게 있다니까 순순히 응하더이다.”
“몇이나 되던가?”
“다섯입니다.”
“그럼 이곳에 있는 자들까지 합하여 열다섯이군.”
* * *
긴장하고 있던 허인회는 해인의 보고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구의 사주를 받거나 산적 무리가 아니라니까 다행이네만.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던가?”
“뜻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행상을 다닌다고 합니다. 말을 섞어 봤으나 별로 의심할 만한 건 없어 보였습니다.”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장시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중 해인과 말을 섞은 자는 무리의 행수라고 했는데 양반가의 서출이었다.
자식 취급도 못 받고 있기에 장삿길로 나섰다는 거였다.
“어허! 우리가 큰 실수를 했구먼. 무고한 사람들을 핍박했으니 저들과 관계 있는 조정 신료들이 들고일어나면 어쩌겠나.”
해인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왜구의 침략에 매몰되어 있던 터라 모든 게 의심스러워 보이는 게 화근이었다.
권력의 힘을 믿고 너무 나댄 게 아닌가 싶었다.
“왜구의 첩자로 오해했다고 밝혔으니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들도 그리 이해해 주면 좋겠지만···. 행수라는 자가 비록 서얼이긴 하지만 양반가 출신이라는 게 영 마음에 걸리네.”
서얼이라면 첩의 자식이다.
어미가 상민이면 서자라 하고 천민인 어미에게서 태어나면 얼자라고 한다.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도 함경도로 간다 하였습니다.”
“우리를 따라오겠다는 말인가?”
품계가 제법 있는 무관과 함께하면 저들도 편할 것이다.
산적들 정도는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함경도 경흥에 본거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흥으로 간다니까 함께했으면 하더이다.”
“우리 신분이 노출될 염려는 없겠는가?”
“이미 대강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소관이 교위임이 밝혀졌는데 장사치가 그 정도의 눈치도 없겠습니까. 입단속을 해 두겠습니다.”
정6품 교위가 수행할 정도라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평복을 하고 장사치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시침을 뚝 떼게나. 아무튼 일행이 더 늘었으니 위험한 일은 줄어들겠군. 그런데 첫 대면에 환도를 들고 설쳤으니 많이 놀랐겠네.”
사주를 받은 자들이 또 암습을 가하려 해도 이렇게 많은 일행이 있으면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였다.
허인회는 조금은 마음이 놓이나 보았다.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암습자에 대한 두려움이 왜 없겠는가.
그나마 해인과 같은 출중한 무관이 곁에 있으니까 용기를 내는 것이다.
“조금 섭섭했던 건 함께 가면서 다독이면 될 일입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 기회에 우리와 연을 맺어 두려는 것 같습니다.”
“상단과 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자네가 잘 살펴보게. 됨됨이만 괜찮다면 내가 뒤를 봐주겠네.”
상단이라면 누구나 변경의 교역을 꿈꾼다.
그래서 중앙의 조정 신료들이나 변경 지방의 수령들과 연을 맺으려고 안달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고관대작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려 하겠는가.
* * *
일행이 늘어나자 함경도로 향하는 길은 오히려 활기찼다.
상단 특유의 활달한 기운에 덩달아 휩싸였던 것이다.
상단 일행은 모두 함경도 경흥이 고향으로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경기, 충청권까지 확대했다고 한다.
이번에 포천에 왔으나 크게 재미를 못 보고 돌아가던 중에 해인 일행과 조우하게 된 거였다.
철원을 지나고부터는 일대의 길을 훤하게 꿰고 있어서 어사 일행이 오히려 얹혀 가는 입장이었다.
행수 박이규는 삼십 중반의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로 해인과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서출이긴 하지만 양반의 피를 받은지라 행동이 당당했고, 장삿길로 나선 지 칠팔 년 정도 되어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막힘이 없었기에 해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말 상대였다.
“교위 나리께서 환도를 겨누었을 때 숨이 딱 막히더이다. 꼭 범을 만난 것 같았소.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으니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소.”
“소관이 보기에는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던데 무슨 엄살이시오.”
“장사치는 당장 죽을 지경이라도 얼굴색이 변하면 안 되지요. 그건 장사치로서 자격 미달이요. 그런데 정말 왜구가 조선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게 사실이오?”
왜구의 간자로 오인했다고 말했기에 뭔가 알아내려는 눈빛이었다.
장사치 입장에서 전란이라도 일어나면 발이 묶이는 건 물론 가진 재물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전란에 대비하여 미리 대비한다면 손해를 덜 보기도 하겠지만, 난리 중에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는 경우도 있음이다.
이제 막 전국권으로 도약하는 단계이기에 기존 상단들을 능가하려면 전란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박 행수께서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 아니오. 새삼스럽게 놀라는 척하지 마시오.”
해인이 불퉁하게 말하자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조선이 좁다고 돌아다니는 상단이 그런 소문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왜구가 해안가를 노략질하는 것이야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간자들까지 설친다는 건 금시초문이오. 이따금 바다가 뒤집혀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왜국 사람들이 간자라면 그렇기는 하오만.”
“왜구의 간자들이 조선에서 암약하고 있는 건 사실이오. 내가 직접 상대해 봤기에 하는 말이오.”
“그들이 조선 땅을 밟는 이유가 그럼···.”
눈치 빠른 장사치라 금방 말뜻을 알아들었다.
“조만간 놈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올 것 같아 걱정이오. 박 행수께서도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게 좋을게요.”
“어허! 이를 어쩐다. 왜국과 밀교역이라도 해 볼 심산이었는데 그것도 물 건너갔군.”
“그게 무슨 말이오.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무관 앞에서 할 말이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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