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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44화 (44/130)

가란구륜 족장 (1)

044화 가란구륜 족장 (1)

고생고생하며 경흥에 도착했을 때는 십일월 중순께였다.

북풍한설에 노출되었던 일행들은 경흥에 도착해서는 이틀 동안이나 노독을 달래었다.

허인회는 고뿔이 더 심해져 숙소로 삼은 주막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는데 의원이 지어준 탕약을 먹었음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나리. 주막에서 지낼 게 아니라 동헌 객사로 옮기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동헌으로 옮기면 부사가 금방 눈치 챌 게 아닌가.”

“경흥의 민심을 살펴보았사오나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었습니다. 경흥 부사의 입을 단속하여 인근 관아에 소문만 나지 않도록 하소서.”

경흥 도호부사는 종3품직 지방관이다.

사헌부의 장령으로 있다가 승급하여 도호부사로 내려온 문관이었다.

부임한지 일 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동안 치세를 잘했는지 고을 백성들의 원성은 사지 않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나온 관료치고 재물을 모으는 않는 관료를 찾는 게 더 빠르다고 할 정도로 대부분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편이지만, 경흥 부사 전은겸은 사헌부 출신답게 치세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해인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경흥을 제외한 나머지 육진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장백여진의 남하로 시달리고 있는 게 문제였다.

장백여진의 남하는 건주여진이 원인이었다.

여러 부족을 복속한 건주여진의 누루하치가 장백여진을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건주여진에 밀린 장백여진은 남쪽으로 내려왔고,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그들의 노략질을 피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경흥은 장백여진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진 도문강의 하류이자 동해에 붙어 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온순한 동해여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어허! 내가 허약하여 주상 전하의 명을 그르치는구나.”

“너무 허물치 마소서. 겨울임에도 명을 받잡으신 일은 상급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조정신료들 중 유난히 직언을 하던 이가 허인회였다.

그런 귀찮은 존재를 내친 것인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인회는 여전히 주상을 충심으로 대했다.

북풍한설을 맞으며 경흥까지 오는 동안 해인도 힘에 부쳤기에 암행 따위는 솔직히 뒷전이었다.

“우선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입니다. 민심이 악화된 건 건주여진의 힘에 밀린 장백여진의 남하로 인한 것이오니 크게 염려할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몸조리나 하면서 허송세월할 수는 없잖은가.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암행을 나왔으니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일세.”

세종 임금 때 개척한 여섯 개의 진이 도문강 주변에 포진해 있어서 여진족들의 동향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차라리 암행을 할 게 아니라 각지의 만호와 수령들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는 게 민심을 다독이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장백여진의 남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육진의 수령들과 병마절도사가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그리 염려할 게 없습니다. 당장은 경흥에 도착하였으니 마주한 동해여진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옵니다. 그래서 소관이 박 행수와 함께 동해여진 부족으로 상행을 다녀올까 합니다. 도호부사께 동향파악을 위한 밀무역이라고 양해를 구해주십시오.”

실제로는 동향파악보다는 교역이 목적이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허인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동향파악을 가장한 거였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위험하지 않겠는가?”

“휘하의 무관들과 박 행수의 수하들을 데려가면 어지간한 위협 정도는 충분히 넘길 수 있습니다.”

“알았네. 주막에서 계속 머물고 있느니 차라리 객사로 들어가겠네.”

***

해인의 권고에 따라 허인회는 도호부의 객사로 숙소를 옮겼다.

도호부사 전은겸은 허인화와는 한성에서부터 교류가 있던 인물이었다.

병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의탁한 처지가 되었지만, 도호부사는 오히려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어사의 신분을 노출한 게 아니냐며 대접이 무척 융숭했다.

그리고 해인이 여진 부족의 동향을 살피러 간다고 하자 호위 무관들뿐만 아니라 박이규 상단에게도 말을 내주겠다고 하였다.

허인회가 관아 객사에 들어간 후부터 해인과 박이규는 여진 부족으로 상행을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몇 년 째 흉년이라고는 하나 모피와 맞바꿀 곡식을 준비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모피의 값어치가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박이규는 도호부에서 말까지 제공한다고 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들판을 오가는데 말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나리. 말을 타고 움직인다면 별로 걱정할 일도 없소이다.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갖는 것이나 다름없소.”

여진 부족을 직접 방문하는 걸 계속 망설이던 박이규는 도호부에서 암암리에 도움을 주자 신이 나 있었다.

이제는 도호부사를 뒷배로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는 하겠구려. 그런데 수하들도 모두 말을 잘 타오?”

무관들 중에도 말을 몰아본 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 상민인 상단사람들이 말을 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변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내가 말을 못 탄다면 대장부라고 할 수 없지요. 어릴 때부터 귀화한 여진족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다반사라서 다들 능숙하게 부릴 수 있소이다.”

“그렇겠구려. 우리 무관들 중에도 압록 출신들이 둘 있는데 어릴 적부터 여진 아이들과 어울렸기에 말을 곧잘 탄다고는 하더이다만.”

어 부위와 김 부위가 압록 출신이었다.

“그럼 여진 말을 조금 하겠소이다.”

“그리 잘하지는 못한다하오. 혹시 상단에 여진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소이까?”

“귀화한 여진족이 있소이다. 언제 저들과 거래할지 몰라 미리  들였지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도 여진족과 상대하려면 통역이 필요한지라 잘되었다 싶었다.

어 부위와 김 부위는 이곳에 오래 있을 처지가 아니기에 통역이 꼭 있어야 한다.

기회가 있으면 해인도 여진 말을 배울 생각이었다.

여진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부딪칠 건데 그들의 말을 모르고서야 어찌 교류를 하겠는가.

이번에 찾아가는 부족은 경흥에서 도문강을 건너면 만날 수 있는 동해 여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부족이란다.

말을 달려 이틀거리에 가란구륜 족장이 이끄는 부족이 있는데, 부족원이 이천여 명이나 되는 큰 규모라고 했다.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지만, 예전에는 무척 용맹하고 호전적인 부족이었단다.

도문강 너머에는 가란구륜 부족 외에도 작은 여진 부락들이 있으나 그들은 사냥보다는 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 비교적 온순하다고 했다.

가란구륜 족장을 만나러 간다면 해코지를 못한다는 거였다.

“박 행수. 가란구륜 족장의 나이가 어떻게 되오?”

“오십을 넘겼다고 들었소.”

“그 나이라면 그리 힘을 못 쓰겠군요.”

조선의 남자들은 불혹만 넘기면 늙은이 행세하려 들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육식 위주의 유목민들은 사오십을 넘기면 힘을 잘 못쓴다고 들었다.

거기에 더해 부족장 정도 되는 위치이면 온갖 산해진미와 술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게 아닌가.

당연히 쉬이 노쇠해질 것이고 덩달아 호전적인 성격도 많이 없어졌을 거였다.

몸이 쇠하면 마음도 같이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나리. 여진 사내들을 나이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오. 호전적인 성품이 나이가 들었다고 쉬이 사라질 것 같으오? 걸을 힘만 있어도 화살을 날리는 족속들이 여진족이오.”

“아무나에게 무조건 활을 쏘고 칼과 휘두르지는 않을 게 아니오.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으려니 거칠어졌겠지요. 아니면 조선에 반감이 있던가.”

태종 임금 때부터 시작한 여진족 토벌은 4군 6진을 설치한 후 극에 달했다.

고구려나 발해 때는 함께 어울려 살았지만 조선이 개국하고부터는 오랑캐 취급을 하고 쫓아냈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지역은 여진부족의 고향인 셈인데 강제로 쫓겨났으니 그들도 틈만 나면 도발하는 거였다.

“정주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여진족과 농사를 짓는 조선 사람이 함께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여진인들은 농사는 아예 안 하오?”

“밭작물을 심기는 하지만 척박한 곳에서 수확해봐야 얼마나 되겠소이까. 주로 수렵을 주로 하는데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대단하다오. 늙었다고 만만히 봤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오.”

박이규는 혹시 해인이 자신의 무예를 믿고 가란구륜 족장을 가벼이 보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

하늘이 맑고 바람이 잦은 날 아침에 해인 일행과 박이규 상단 등 25명의 인마가 도문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동안의 추위로 강이 얼어붙어 말이 건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십리 정도 나아가던 중 무너진 토성이 눈에 띄었다.

“저기는 왜 방치해둔 것이오?”

“녹둔도라는 곳이오. 몇 년 전까지는 우리 군사들이 주둔했으나 야인여진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지요. 그 당시 경흥 부사와 조산 만호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소.”

“당시의 조산 만호는 누구였소.”

“이순신이라는 무관이외다. 소인이 알기로는 지금은 전라좌수사로 승차했다고 들었소.”

주둔지를 습격 받아 쑥대밭이 되었음에도 만호로 있던 자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면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거나 대단한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전라좌수사로 승차했다면 대단한 공을 세운 모양이오.”

“대단했지요. 녹둔도를 습격한 부족들을 뒤따라가 쳤는데 그때 야인여진 부족 중 몇 개가 사라졌으니까요. 야인여진의 기세가 약해진 것도 그 양반이 백의종군한 영향이 크지요.”

“백의종군을 하다니요?”

“녹둔도가 습격을 받은 후 도호부사와 만호가 감옥에 갇혀 장형까지 받았었소. 그 후 삭탈관직인 채로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했으니 백의종군이지 뭐겠소.”

경흥에서는 해인도 알지 못한 별일이 다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그 후부터 녹둔도 토성을 방치한 것이오?”

“강 너머에 굳이 군사를 배치하여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위치로 봐서 군사적으로 무척 요긴하게 쓰일 곳인데.....저곳을 여진족들이 차지한다면 되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소만.”

“이동이 잦은 여진족들이 손바닥만 한 곳을 쳐다보기나 하겠소?”

여진족이 녹둔도를 외면한다고 안심할 건 못되었다.

만약 왜구가 이곳을 차지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인의 눈에도 요충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며 십리쯤 더 나아가자 울창한 수림지대가 펼쳐 있었고 해안 쪽으로는 크고 작은 석호가 눈에 들어왔다.

“석호에 있는 물은 아직 염분이 남아 있소?”

“육지 쪽에서 계속 물이 흘러들어오고 있어서 농업용수로는 가능하오.”

“나무도 많고 땅도 비옥해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북변이 황량한 곳이라고 소문을 낸 것이오.”

“동해여진이 자리 잡고 있는 해안지대만 비옥하지 압록 너머의 요동은 황량한 들판만 펼쳐 있다오.”

해인의 눈에는 모든 게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나무는 땔감이나 가옥을 만들 때 이용하고 염분이 없는 석호의 물은 식수나 농수로 이용하면 사람이 살기에 이만한 곳도 없어 보였던 것이다.

“나리.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오. 윗대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곳에서 여드레 정도 더 북쪽에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했소.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맑은 물이 지천으로 흐르는 곳이 있다고 하더이다.”

“그곳에도 여진족들이 살고 있소?”

“겨울이 길고 주변에 노략질 할 곳이 없는데 여진족들이 쳐다보기나 하겠소? 짐승들만 들끓을 뿐 사람은 살지 않는다고 하였소.”

별천지나 다름없는 곳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니까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긴 게 다소 흠이긴 하지만, 여진족도 없고 짐승들 천지라지 않는가.

모피를 직접 마련할 길이 있겠다싶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직접 사냥하여 가죽을 마련하면 이문이 더 많이 남겠소이다.”

“사냥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으나 가죽을 상처 없이 벗기고 손질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일단 가면서 사냥이나 한번 해봅시다.”

그때부터 눈을 부릅뜨고 짐승을 찾아봤으나 헛수고임이 금방 드러났다.

몸을 숨기고 은밀히 기다려도 눈에 띌까말까 한데 이십여 명이 요란하게 움직이는데 다가올 짐승이 어디 있겠는가.

***

첫날에는 보이지 않던 여진인들이 이튼 날 중참 때가 지나고부터는 간간이 눈에 띄었다.

안장도 없음에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걸 보니 말을 다루는 솜씨만큼은 여진인을 따를 자가 없어보였다.

“벌써 가란구륜 부족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오?”

해인이 긴장한 체 묻자 동행한 귀화 여진인인 아탕게가 박이규 대신에 대답했다.

“저들은 가란구륜 부족민은 아닙니다. 근처에 살고 있는 작은 부족들이 우리의 반응을 보려는 것 같습니다. 무시하고 나아가면 가란구륜 부족으로 가는 손님으로 알 것입니다.”

가란구륜 족장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면 다른 부족들이 몸을 사릴까 싶다.

물론 부족수가 얼마 안 되니까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해인 일행이 전부 말을 타고 있다는 점도 저들이 조심하는 이유일 터.

조선군 토벌대가 변복을 하고 돌아다니며 공격을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까지 우리를 따라왔다는 말인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제부터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이제야 몸을 드러내는 걸 겁니다.”

“왜 그러한가.”

“몸을 드러냈다는 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입지요. 자신들 영역에 들어왔는데도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돌아갈 때 알아서 인사를 차리라는 시위인 셈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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