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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45화 (45/130)

가란구륜 족장 (2)

045화 가란구륜 족장 (2)

간간이 눈에 띄는 여진인들의 목적이 알고 보니 자신들의 의중을 흘리는 것이란다.

길을 막고 왜 왔으며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숨어서 주시하다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심계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자신들이 가란구륜 부족으로 가는 손님을 호위해줬다는 걸 족장에게 전해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꽤나 용의주도한 자들이로구나.”

“약한 부족이 큰 부족의 그늘 아래에 있으려면 다른 족장보다 용력이 강하거나 눈치라도 빨라야합니다.”

“같은 부족끼리도 세력이 작으면 눈치를 봐야한다는 말인가?”

“그러합니다. 야인여진이든 건주여진이든 크고 작은 부족들이 모여 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소인의 아비도 건주여진에서 작은 부족을 이끌고 있다가 누루하치와 반목하다가 부족을 잃고 조선에 귀화하게 된 것입니다.”

아탕게도 한때 건주여진의 작은 부족의 후계자였던 모양이다.

지금 무섭게 세를 불리고 있는 누루하치로 인해 자신들의 부족이 와해되었고.

그렇다면 누루하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인 셈이다.

그런데 건주여진과 대립하고 있는 동해여진족 가란구륜에게 아탕게의 출신을 밝히면 곤란해지지 않을까 살짝 걱정스러웠다.

“아탕게. 너는 가란구륜 족장에게 얼굴을 내밀면 곤란하겠구나.”

“나리.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적의 적은 곧 아군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흠!........”

그런 이치를 아는 걸 보니 아탕게도 글을 익혔거나 아비에게 제대로 훈육을 받은 것 같았다.

“글을 아느냐?”

“조금 익혔습니다.”

“무예는?”

“아비에게 사사 받았습니다.”

역관 역할로 일행에 합류한 아탕게는 첫 대면부터 해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십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탕게는 눈빛이 맑았고 풍기는 기운도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듯했다.

해인이 아탕게에게 관심을 보이자 박이규가 얼른 말을 받았다.

“나리. 아탕게는 일당백의 전사요. 날고 긴다는 여진족 전사들 몇이나 덤벼도 우스울 게요. 이제 열아홉 나이치고는 대단하지 않소이까.”

이십 중반으로 보았는데 겨우 열아홉이란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진중하여 생각이 많은 경우이다.

해인도 스물한 살에 불과한데 다들 이십 후반으로 볼 정도였으니.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게 보이는 게 여러 가지로 편리하긴 했다.

스물한 살에 정6품 교위라면 누가 쉽게 믿어주겠는가.

“겨우 열아홉인데....소관이 아탕게의 실력을 가늠해 봐도 되겠소?”

함경도로 오는 동안 수련할 기회가 없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 여진족의 무예를 구경할 기회가 왔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해인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리자 아탕게의 입가에는 경련이 일었다.

호승심보다는 두려운 표정이었다.

기세싸움에서 이미 꼬리를 내린 것이다.

둘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박이규가 얼른 나섰다.

“어이쿠. 나리. 뭐가 급하다고 당장 팔을 걷어 부치시오. 오늘 중으로 가란구륜 부족에 도착해야 하니까 여기서 지체해서는 곤란하오.”

“하하하....알았소. 소관이 호승심이 일어나서 그만.”

멀리서 일행을 살피는 여진인들도 있는데 여기 멈춰 서면 빌미만 제공하는 꼴이 된다.

호승심이 들끓어 앞뒤 재지 않고 나선 해인은 입맛만 다셔야했다.

그러자 아탕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의 재주로는 나리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네가 내 기운을 읽었더냐?”

“읽었다기보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나이다.”

“그게 그 말이 아니더냐.”

“........”

타인의 기운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자신도 그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방증이다.

열아홉 나이에 그 정도 수준이 되려면, 아탕게도 자신처럼 기연을 얻었거나 원래부터 뛰어난 기재라는 말이다.

이런 수하가 있다면 뒤를 맡겨도 든든할 것 같았기에 아탕게가 슬슬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무관으로 나설 생각은 없느냐?”

“여진인이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나이까.”

해인의 제안이 싫지는 않은지 아탕게는 과연 벼슬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누가 여진인이 벼슬을 못한다고 하더냐. 이미 귀화까지 했거늘.”

“서북출신들도 차별을 받는데 한낱 오랑캐인 소인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서북지역과는 별개니까 걱정마라.”

해인이 알기로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대왕도 건주여진의 족장 중 하나인 먼터무와 의형제를 맺고 벼슬을 내린 전례가 있었다.

그 후로도 역대 왕들은 여진인에게 벼슬을 내려 다독였었다.

물론 상징적인 벼슬이긴 하지만.

“네 무예가 아까워 그런다. 나를 따라 한성으로 간다면 자리를 만들어보마.”

그런 전례를 떠나서라도 허인회에게 부탁하면 종9품 무관 자리 정도는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조선에 귀화했기에 걸림돌도 없다.

상단에 몸담고 있는 것보다는 해인 밑에 있는 게 백번 나을 것이기에 이런 제안을 한 거였다.

“나리. 아탕게는 소인의 사람이오. 이곳에서도 잘 살고 있는데 어딜 데려간다고 하시오.”

난데없이 자신의 사람을 데려간다고 하자 박이규로서도 어이가 없는가 보았다.

“재주가 아까워서 그러하오. 아탕게를 위하는 일인데 박 행수께서 양보하시오.”

“소인 또한 아탕게를 중하게 쓸 것이오. 무예가 출중한 자가 상단에 있으면 상단에도 큰 도움이 될 게 아니겠소.”

“아탕게를 내 준다면 앞으로 박 행수의 일에 한 팔을 보태어 드리겠소.”

박이규는 듣고 싶은 말이 나오자 언제 섭섭했느냐는 듯 바로 희색이 만연했다.

아탕게를 넘겨주는 대가로 해인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이문이 많은 거래는 없을 것이니까.

“나리께서 도움을 주신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요. 아탕게를 데려가 중히 써주기만 바라겠소.”

“아탕게. 나를 따르겠느냐?”

“나리께서 보잘 것 없는 소인을 거둬주신다면 그저 감읍할 뿐입지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흔쾌히 대답하는 걸 보니 아탕게도 더 넓은 곳에서 활동하고 싶은가 보았다.

해인은 아탕게를 처음 본 순간부터 눈독을 들였기에 그의 결정이 흡족했다.

곧 왜구가 쳐들어 올 것이기에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었다.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수하가 있다는 건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직 아탕게의 됨됨이를 잘 모르지만, 건주여진과 원한이 있는 것만으로도 우선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다른 걱정은 그 때가서 할 일이다.

“좋다. 경흥으로 돌아가서 네 아비와 상의한 후 함께 한성으로 가자꾸나.”

***

가란구륜 부족에 도착한 때는 어둠이 막 내리기 직전이었다.

한식경 전쯤 경계를 서던 부족원의 안내로 마을로 들어섰는데, 해인 일행에 대해 별달리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자신들의 부족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눈에 보였다.

주변에 밭농사를 지은 흔적이 보였는데, 농토의 넓이가 작은 평야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목책으로 둘러싸인 부락의 규모가 상상외로 커서 내심 놀랐다.

목책 또한 대충 두른 게 아닌 석성에 버금갈 정도로 튼튼해보였다.

목책 위로 경계병이 오가고 있었고, 높이도 두 장 남짓이나 되어 고개를 젖혀 한참 올려다봐야할 정도였다.

이렇게 방비를 튼튼히 할 정도라면 주변에 적이 많거나, 아니면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뜻이리라.

장정 허벅지만한 통나무로 목책을 두르는 일은 풍부한 노동력이 있어야 하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족원의 숫자도 경흥도호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곧 족장의 권력이 대단하다는 증거이고 부족원들의 결집 또한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옥도 대충 지은 게 아닌 통나무로 튼튼하게 지은 것으로 보아 해인이 알고 있는 여진족의 주거 형태는 분명 아니었다.

주거지를 자주 옮기는 다른 여진 부족과는 달리 가란구륜 족장은 이곳을 정착지로 삼고 있었다.

입구에서 무장을 해제당한 후 잠시 기다렸더니 짐승가죽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사내가 나타나서 대표자 둘만 따라오라고 했다.

여진 사내는 유창하진 않지만 조선말을 제법 구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이규와 통역인 아탕게가 나섰는데, 사내는 손을 들어 해인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마치 해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나 있는 것처럼.

흙벽돌과 통나무를 섞어 만든 커다란 건물로 안내된 해인과 박이규를 풍채 좋은 중년인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맞이했다.

외지인을 만나게 되면 기선을 잡는답시고 대부분 잔뜩 기세를 올리는 게 다반사인데, 중년인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일행을 맞이했다.

“경흥에서 상단을 하는 박이규라 합니다.”

“함께 상단을 하는 최승우라 합니다.”

“어서 오시게. 우리와 모피거래를 하러 왔다고? 아 참! 내 소개가 늦었구먼. 부족의 족장일세. 내 이름을 이미 알 것이니 굳이 말하지 않겠네.”

“?.........”

족장 밑의 실무자일 것이라는 예상에서 벗어낫기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그리고 이 정도 규모의 족장이라면 범강장달이 같은 부하들이 시립해 있거나, 아니면 측근 중의 하나가 나서서 소개를 해주어야 권위가 선다.

그런데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소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에 더해 조선말까지 구사하니 어안이 벙벙할 밖에.

“여진 족장이 조선말을 구사하니 놀라운가?”

“그러합니다. 족장.”

박이규를 제치고 해인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했다.

이런 파격을 보여주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박이규가 나서면 오히려 족장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꼴이다.

이미 이쪽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뒤로 빠지면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킬 뿐이다.

“최승우라.....상단주처럼 보이지 않는데?”

해인의 대답에 가란구륜이 빙그레 웃었다.

이미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웃음이 아닌가.

여기서 더 감춘다면 이번 일은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이 정도의 인물이면 조선의 무관이라고 한들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소관은 상단주가 아니라 조선의 무관이오. 동해여진의 동향도 파악할 겸 앞으로 조선과 교역이 지속적으로 가능한지를 알아보고자 온 것이오.”

“오호! 다행이 이실직고하는군. 이곳까지 왔다다는 건 교역만이 목적은 아닐 것이고....대단한 무예를 익혔구먼. 설마 그걸 믿고 온 것은 아닐 테지?”

“소관이 누구인지 아시었소?”

“그렇게 요란하게 도문강을 건넜는데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해봤을 것 같은가? 상단 사람들이 모두 말을 타고 온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걸 모른다면 이 땅의 주인 될 자격이 없지.”

강을 건넌 후부터인지 경흥에 있을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경흥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수상한 무리가 도호부 객사에 들었다가 상단과 함께 강을 건너는 것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행의 무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건 조금 이해가 안 되었다.

“교역을 하러 오는 상단인데 어찌......”

“우리 전사들의 눈이 그리 엉성하다고 보는가? 상단 일행 중에 잘 벼른 칼이 몇이나 있는데 어찌 그걸 모르겠나.”

“오해가 있었다면 사죄드리겠소. 조선 왕이 보낸 사신이 아니기에 신분을 감추었던 것이오.”

“나도 사람을 보내 조선 땅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탓할 생각은 없네. 어차피 상단이 이곳을 다녀가면 소문이 금방 날 것인데.”

얼마나 세력이 강하고 자신이 있으면 이렇게 대범할까 싶었다.

해인의 눈에는 족장이 이곳에 만족하고 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건주여진의 누루하치가 걸출한 영웅이라고 소문났지만, 동해여진의 가란구륜 족장도 그에 못지않아 보였던 것이다.

여진족이란 선입견으로 족장을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말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소이다. 소관은 경주 최가에 이름은 승우라 하옵고 조선의 정6품 교위로 있소이다. 소관이 옆에 있는 박이규 행수를 따라 온 것은 박 행수의 상단을 도와 여진족과의 교역을 지속적으로 해보고자 함이었소.”

“조선의 무관이 교역에 관심이 있다고? 그걸 믿으라는 말인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보게.”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면 족장과의 신뢰가 깨진다.

솔직히 속을 내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가올 전란에 대비하고자 함이오.”

“무슨 전란이 다가온다는 말인가?”

“왜구가 곧 조선 땅을 밟을 것으로 보고 있소. 그때를 대비하자면 재물이 있어야겠기에 나선 것이오.”

“으흠! 전혀 근거 없는 핑계는 아니군.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 무관을 내세워 우리와 교역을 한다는 부분은 이해할 수 없군. 그래.”

“조선의 조정과는 무관하오. 소관이 개인적으로 나선 일이오.”

족장도 왜구의 준동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더니 빙긋이 웃으며 연이어 말했다.

“자네가 솔직히 말해준 것 같으니 일단 넘어가겠네.”

“.........”

“만일 뒷전으로 빠지고 저자만 앞세웠다면 다시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없었을 걸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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