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의 딸 주을 (2)
048화 족장의 딸 주을 (2)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가란구륜 족장이 붙여 준 전사들도 함께했다.
그들은 녹둔도까지 동행했는데 중간에 포진하고 있는 소규모 부족들이 해인 일행에게 해코지를 못 하도록 경고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자칭 부족의 공주인 주을도 사냥을 핑계 삼아 따라붙었음은 불문가지였다.
녹둔도에서 헤어질 때 매몰찬 표정으로 말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인은 왠지 가슴이 허전해 왔다.
그렇게 귀찮게 하던 주을이 눈에 안 보이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아련한 표정으로 주을의 뒷모습을 쫓고 있는 해인을 흘긋거리던 박이규가 입술 끝에 웃음을 달고 다가왔다.
“나리. 어째 시원섭섭한가 보오.”
“시원하다고 해야 맞지 거기에 섭섭하다는 말은 왜 갖다 붙이시오.”
뜻을 함께하기로 한 후부터는 두 사람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런 농을 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공주께서 매일이다시피 나리 주변을 맴도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오.”
“한 번으로 족하오. 두 번 마음에 들었다면 아예 말라 죽었을 것이오. 괴롭히려고 덤비는 것도 아니고···.”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더이다. 나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마음에서 쉬이 지우지 못할 것 같소.”
“그만 놀리시오. 자꾸 그러면 다음 상행에는 소관이 참여하지 않을 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이라도 주을의 뒤를 쫓아 그녀의 부락으로 가고 싶었다.
가란구륜 부족에서의 일상이 잔잔한 마음에 불을 지핀 거였다.
언제 말을 타고 거침없이 달려 보았으며 활을 들고 짐승의 뒤를 쫓아 보았겠는가.
여진인들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일상이겠지만, 조선에 얽매인 몸인 해인으로서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호연지기가 절로 일어났고 머리는 늘 맑고 명료했다.
“족장이 나리에게 호의적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소.”
“······?”
“나리를 공주의 배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소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안 그래도 족장이 조선을 버리고 자신의 부족에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었다.
자신의 기개와 남다른 무예가 탐나 휘하에 두고 싶어 하는가 보다 짐작하고 있었는데, 박이규는 주을의 배필로 점찍은 게 아니냐는 거였다.
“조선의 관리와 여진 부족장의 딸이 맺어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국법에 여진인과 혼인을 금했다면 모를까. 그리고 전란이 일어나면 나리의 벼슬도 무용지물이 될 것인데 거리낄 건 무어 있겠소이까.”
“조선이 망한다는 말이오?”
“조선 천지가 왜구들의 발굽에 치이게 될 거라고 걱정하던 분은 나리외다. 조선이 풍전등화인데 벼슬이 무슨 소용이겠소.”
듣고 보니 그랬다.
벼슬자리도 전란이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전란이 일어나면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무슨 양반입네 벼슬아치네 하며 거들먹거리겠는가.
그래 봐야 알아봐 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백성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할 거였다.
조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죗값을 치르라고 말이다.
이번에 박이규를 따라 상행을 다녀온 것도 알고 보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족장이 자신을 어찌 보든 간에 당장 마음 쓸 곳은 조선 땅인데.
* * *
경흥 부사에게 다녀왔노라 인사한 후 허인회가 묵고 있는 객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객사 근처에 오자 탕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허인회가 여전히 자리보전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방금 도호부사에게 들은 터라 걱정이 앞섰다.
객사 사랑채 앞에선 해인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영감. 최 교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경흥 부사에게 허인회의 신분을 밝힌 터라 이제는 당당하게 영감으로 호칭했다.
“오! 최 교위 왔는가. 어서 들게.”
허인회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잦은 기침으로 목이 많이 상해 있는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허인회는 자리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행을 가기 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병색은 여전했다.
“영감. 몸은 좀 어떠한지요. 탕약은 쭉 드시고 계셨습니까?”
“때마다 먹기는 하네만 차도가 보이지 않네. 북쪽 날씨는 나하고 영 안 맞는 것 같으이.”
“노독까지 쌓여 더 그러할 것입니다. 진지라도 좀 잡수셔야 속히 쾌차하는데···.”
음식이라도 제대로 들면 좋으련만 입 짧은 허인회는 매 끼마다 조금 깨작거리다가 말았을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뿔 따위로 이렇게 몸이 바짝 마를 수는 없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여진 부족과 상행에 분쟁은 없었던 모양일세.”
“마침 필요한 때에 방문한 터라 여진인들도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족장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기에 밝히지 않았다.
“부족의 형세는 어떠하던가.”
“소관이 들었던 내용과는 많이 다릅니다. 부족민의 숫자는 족히 삼천여 명이 넘어 보였고 족장과 아들들이 각각의 부락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의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니까 허인회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건주여진만 주시하고 있었는데 동해여진도 결코 만만찮은 세력임이 밝혀졌으니 북변도 곧 전란에 휩싸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럼. 그 부족을 동해여진의 주축 세력으로 봐도 되는가?”
“그리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혹시 조선을 겨냥하고 세를 불리는 겐가?”
“조선을 침략할 의도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 존재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상행을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족장의 아들들이 있는 곳도 방문해 볼까 합니다.”
해인이 또 여진 부족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허인회는 별말이 없었다.
여진족에 대한 정보를 더 얻겠다는데, 자리보전하고 있는 입장에서 해인이 대신 임무를 수행하는 주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재차 방문하면 오해하지 않겠는가?”
“그들도 원하고 있는 상행입니다.”
“엄동설한에 고생하는 자네에게 할 말이 없네.”
“어차피 소관이 나서야 할 일이오니 너무 마음 쓰지 마소서.”
“참으로 염치가 없으이.”
몸이 아파도 자신의 임무를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런 충신임에도 주상을 비롯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자네의 노고를 잊지 않겠네.”
“영감.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소관이 재차 여진족 부락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도 왜구의 간자들이 들락거렸다 하더이다. 부족장도 대비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허! 이를 어쩌나. 왜구들의 욕심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네. 조선 강토 너머까지 욕심낼 정도면 병사들을 많이 양성했다는 말이 아닌가.”
“소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비를 하심이 어떤지요.”
“후유···.”
허인회는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왜구의 침략은 기정사실로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오랑캐의 땅까지 넘본다면 조선을 뒤덮고도 남을 병사들이 있다는 말이다.
왜구가 쳐들어온다고 외쳐 봤자 괜히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안위만 도모한다는 것도 국록을 먹는 관료의 도리가 아니었다.
“이보게. 최 교위. 왜구가 오랑캐의 땅도 넘본다면 그 세력이 만만찮다는 말인데, 어디 있어 본들 그 화를 피할 수 있겠는가. 국록을 먹는 관리가 되어 내 한 몸만 챙긴다는 것도 백성들에게 죄를 짓이 아닌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이. 몸이라도 강건하면 활이라도 잡고 힘을 보태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니 말일세.”
“영감. 우선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입니다. 소관이 목숨으로 영감을 모실 것이오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말이라도 고마우이. 자네가 있어서 그나마 힘을 얻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여려진 모양이다.
전에 없이 약한 소리를 하는 허인회가 안쓰러웠으나 스스로 병마를 이겨내고 일어서기를 기다릴 수밖에.
* * *
여진족과 물물 교환할 곡식과 사기그릇과 놋그릇, 면포 등을 바리바리 준비하고 막 두 번째 상행을 나서려는데 폭설이 쏟아져서 발목이 잡혔다.
지난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다음 날 중참 때가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이미 글렀다고 포기한 해인과 박이규는 상단 건물 사랑채에 들어앉아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그쳐야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행수. 그러다가 방문이 부서지겠소이다. 쉬이 그칠 눈이 아닌 것 같으니까 마음 편히 잡수시오.”
“그러게 말이오. 내일 출발하는 것도 이미 그른 것 같소이다. 오늘은 나리와 함께 술이나 진탕 퍼마셔야겠소.”
박이규는 얼른 도문강을 넘어가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이번 상행에서 가져온 모피를 다른 상단들에게 팔아넘기고 엄청난 이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여진족 부락에 직접 가서 가져온 모피의 질이 무척 좋았기에 부르는 게 값이었다.
모피에 목을 매는 경흥과 경원 등지의 상단들과의 거래로 창고에는 곡식과 면포가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번의 상행으로 몇 년 치의 이문을 남긴 것은 물론 이제 경흥에서는 무시 못 할 상단으로 거듭났으니 두 번째 상행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지요. 여진족의 모피가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니잖소.”
“소인이 잘 아는 기방으로 갈까요?”
“그냥 여기서 탁주나 마시지요. 소관은 아직 기방이 영 어색하오.”
기녀를 끼고 마시는 술은 아직 해인에게는 낯설었다.
기녀 또한 사람일진대 값을 치르고 옆에 앉혀 둔다는 것도 해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민망한 일이었다.
“몇 번 들락거리다 보면 어색한 마음은 금방 없어질 것이외다. 종래에는 나리께서 먼저 가자고 설칠 게요.”
“엄동설한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관료인 소관이 흥청망청한다는 게 내키지 않소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방에 가야 하오. 소인처럼 일확천금을 얻은 자들이 재물을 풀어야 없이 사는 백성들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게 아니겠소.”
일견 맞는 말이긴 하나 기방에 가기 위한 변명처럼 들렸지만, 재물을 곳간에 쌓아 두고 썩히느니 필요한 자에게 빌려주거나 기방 등에 풀어서 재물이 돌도록 하는 게 맞기는 했다.
그런데 과연 조선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싶다.
“기방에 가는데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몰랐소이다. 역시 박 행수의 그릇은 남다르오.”
“나리. 소인을 놀리시는 겝니까?”
“소관과 띠동갑이 넘는 분을 어찌 놀리겠소. 알량한 벼슬을 한답시고 양반인 손윗사람에게 평대하고 있는 것도 송구한데요.”
“서얼에게 양반이라고 말하면 그게 오히려 욕보이는 말이오.”
“하하하···그래요? 그럼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지요.”
박이규를 형으로 부르겠다고 한 건 갑작스럽게 나온 말이 아니었다.
비록 서얼이긴 하나 손윗사람에게 평대를 하는 게 해인인들 속이 편했겠는가.
박이규와는 한배를 탄 입장이기에 고리타분한 법도 따위는 훌훌 벗어던져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허! 다른 양반들이 봤다면 법도를 어겼다고 치도곤을 당할 일이오.”
“손윗사람에게 형님이라고 하는 게 어찌 법도에 어긋난단 말이오. 그런 법도를 만든 자가 누군지 궁금할 지경이오. 만약 그런 법도가 있다면 바꿀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앞으로 박 행수께 형이라고 할 것인즉 그리 아시오. 이건 정6품 벼슬을 하고 있는 이가 새로 만든 법도이오.”
그날 그렇게 박이규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다.
박이규도 그런 해인을 기꺼워했고 둘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대취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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