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의 딸 주을 (5)
051화 족장의 딸 주을 (5)
족장의 둘째인 아골타가 이끌고 온 전사들과 부족민은 전부 나이가 어려 보였다.
기껏 봐줘야 해인 또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전사들의 평균 나이가 어리다는 건 경험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는 저돌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아골타의 첫 인상은 와르타보다 큰 덩치로 인해 전사처럼 보였지만, 눈매나 턱선 등이 주을과 꼭 닮아서인지 남자치고는 선이 고왔다.
올해 스물넷이라 했으니 아직 연륜이 묻어날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영웅의 풍모일거라는 선입견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치기어린 청년으로만 보였다.
미리 기선을 잡으려는지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을 때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둘째도 주을과 비슷한 성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판에 박은 것처럼 닮았던 것이다.
“조선의 무관으로 있는 최승우라 하오.”
“아골타라 하오.”
아골타는 와르타처럼 장황하게 인사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눈빛에는 궁금함이 가득한데 억지로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조선의 무관이 두 차례나 부족을 방문했으니 한 부락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궁금증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골타는 무게를 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만나 뵙고 싶었소이다. 주을 공주께서 둘째 오라버니에 대해 자주 말씀하더이다.”
“주을을 공주라고 했소?”
아골타는 근엄하던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의 관리가 주을을 공주로 호칭한다는 부족을 나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가.
우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부족의 세력을 보고 알아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좀 더 근엄할 필요가 있다 싶었는지 턱을 내밀고 고개를 치켜세운다.
주을이 해인에게 하는 행동과 똑 같았다.
아골타의 표정이 수시로 변하자 해인은 긴장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장난기가 슬슬 피어올랐다.
“공주를 공주라 하지 달리 부를 말이 있겠소이까.”
“조선 조정에서 그러하라 했소?”
“소관의 판단에 따라 공주로 호칭하는 것이오. 혹시 잘못된 호칭이라면 즉시 고치겠소만.”
그러자 주을이 발끈하고 나섰다.
왜 이제야 나서나 싶었다.
“흥! 둘째 오라버니. 조선 무관이 예를 차리지 않아서 내가 그러라고 했어.”
“공주께서 하란다고 타국의 관리가 법도에도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소이다. 예우할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리 호칭할 밖에요. 주을님께서는 공주로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오.”
“흥! 내가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으면 계속 낭자라고 할 거였잖아요.”
“눈에 보이는 아무 낭자나 붙잡고 공주라 할 수는 없잖소.”
둘의 설전이 시작되자 근엄한 표정을 풀어버린 아골타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자신이 끼어들 틈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주을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해인 또한 주을과 실랑이 하는 게 재밌어서 맞장구치고 있었다.
“내가 시원찮게 보였다는 말이군요.”
“소관은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소이다. 잠시 당황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오.”
“흥! 거친 모피를 두르고 말을 타고 있었으니 여전사쯤으로 보았겠지.”
“그렇지는 않았소. 공주께서는 후광이 비칠 정도로.....”
“잠깐!”
해인이 말을 미처 끝맺지도 않았는데 아골타가 끼어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혹시 이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
“오라버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우리 전사들을 놔두고.......”
“우리 전사들과는 말도 잘 섞지 않는 애가 뭔 소리냐. 우리 전사들은 글도 모르고 예의범절도 없어서 싫다고 했잖아.”
“지금 그게 공주로 부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주을은 큰 오라비와는 달리 둘째 오라비를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큰 오라비와는 10년 차이지만 둘째와는 6년 차이라 대하기가 더 편한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네. 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렇게 흥분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그게 아니라니깐 왜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냐고!”
“아니면 됐지. 왜 이리 흥분하는 거냐.”
이때 와르타가 나서서 아골타를 이끌고 저만치 갔다.
와르타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골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해인을 힐끗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몰라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골타의 묘한 미소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
아골타가 데려온 부족들과 모피 거래가 끝났음에도 바닷가 부락을 떠날 수 없었다.
두 형제가 함께 해인에게 조선 검술을 배우겠다 했기 때문이다.
진검이 아닌 목검을 사용하지만 워낙 힘이 좋은지라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검술이 워낙 단조롭기에 여유 있게 상대하기는 했으나, 이따금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여진족에게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체계적인 검술은 없다.
그럼에도 동물적인 감각과 괴력을 발휘할 때면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진족의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활이라고는 하나 단병접전용으로 도끼나 창, 역근경 같은 박투술도 있었다.
하지만 환도를 사용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공격도 없기에 기를 쓰고 검술을 익히려는 거였다.
며칠간의 검술 대련으로 두 형제와는 묘한 동료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미 족장을 통해 해인이 어떤 심중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상대해 주었으니 그러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막내 동생인 주을이 해인에게 관심이 많다는 점도 일부 작용하고 있었다.
한바탕 땀을 쏟고 난 아골타가 해인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최 교위. 그대는 우리를 어찌 생각하오?”
“예? 무슨 말씀인지......”
“조선의 무관이 이렇듯 우리를 가까이하려는 의도가 무척 궁금해서 그러오. 조선 사람들은 우리를 오랑캐라 칭하고 원수처럼 여기는데 말이오.”
“.......”
이민족을 낮잡아 불러 오랑캐라 하는데 이건 중국이 예전부터 동쪽에 사는 이민족을 그리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이나 여진족을 싸잡아 그리 부른 것인데 이제는 조선이 여진족을 오랑캐로 부르고 있었다.
애써 지은 농사를 약탈해 가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을 죽이거나 끌고 가는데 어찌 원수가 아니겠으며.
그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지역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것도 한 원인이 되어 서로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달리 물었다.
“아버님께 들은 얘기가 있어서 물어보는 것이오.”
“왜국이 곧 조선을 침략할 것 같아 재물을 모으는 중이오.”
구구절절 애기해봐야 변명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판단하면 될 거였다.
“그대는 조선의 앞날을 어찌 보오?”
“소관이 이곳에 있는 게 그 답이 아니겠소이까.”
해인의 말에 한동안 지그시 보더니 입을 열었다.
“조선을 떠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소?”
“국록을 먹는 관리가 어찌 조선을 등지겠소. 다만 답답한 마음에 뭔가 준비를 해보려고 나선 길이오.”
“왜국의 병사가 건너오면 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조선이 그리 약하진 않소.”
“그대 같은 무관이 많다면 그렇겠지만....”
“......”
“내 동생을 어찌 생각하시오.”
“?.......”
“주을이 최 교위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묻는 것이오.”
묘하게 주을과 자신을 엮으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거부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진취적이고 세력이 강한 부락의 금지옥엽과 엮여서 나쁠 게 없으니까.
“공주께서 소관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소이다.”
“그렇게도 눈치가 없소?”
“그런 걸 살필 만큼 소관이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못하오. 오죽하면 벼슬하는 입장에서 상단을 이끌고 밀무역에 나섰겠소.”
“목석이 아니고서야.....주을이 그렇게 본데없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데도 눈치를 못 챘단 말이오?”
처음 봤을 때 잠시 설레긴 했으나 몇 번 마주치다보니 선머슴이 따로 없었기에 가급적 피하는 편이었지.
그런데 틈만 나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다.
“소관을 만만히 보고 괜한 까탈을 부리는 줄로만 알고 있었소이다.”
“쯧쯧쯧.......”
두 형제들은 이미 사태파악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만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선머슴처럼 설치고 다니는 주을이 그런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공주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소관과 같은 하위 무관에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소.”
“한창 때가 아니오. 그리고 우리 형제도 그대와 주을이 인연을 맺는 걸 반대할 생각은 없소.
“........”
아골타는 자신의 동생과 해인의 결합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선의 관리가 여진인 아내를 맞이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 말이다.
“주을이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돌림병이 돌아 생모를 여위었소. 그래서 아버님이나 우리 형제들이 유난히 주을에게 정을 쏟는 편이오. 그러니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오.”
주을이 힘들어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나 같았다.
자신들의 지난 얘기까지 하며 부탁하는데 여기서 머뭇거리기도 애매했다.
앞으로 가란구륜 부족에 자주 들락거려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소이다. 소관으로 인해 공주가 힘들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염려 마시오.”
***
와르타 부락을 떠나 경흥도호부에 도착할 때쯤 또 다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번 상행은 이십일이나 걸렸다.
와르타와 아골타 형제들에게 발목이 잡힌 것에 더해 해인이 차일피일 미룬 면도 있었다.
한성에 늦게 돌아가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경흥 부사에게 귀환 인사를 하고 객사에 머무는 허인회를 찾았다.
그동안 몸이 많이 회복되었는지 허인회는 정좌를 한 채 경서를 읽고 있었다.
“영감.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오! 최 교위. 무탈하게 다녀왔는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니 기력을 많이 회복한 것 같았다.
떠나기 전만 해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는데 말이다.
“예. 별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몸은 좀 어떠한지요.”
“많이 좋아졌네. 며칠 전부터 식사를 제대로 했더니 이제는 경서를 잠시 읽을 정도는 되었네.”
“그래도 아직 움직이기에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설을 지나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 그러나 저러나 객지에서 설을 맞이하게 되었네. 그려.”
내일 모래면 설이었다.
객지에서 설을 맞이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해인은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도호부도 일시적으로 멈추는데, 차례도 지내야 하고 여기저기 세배를 드리러 다녀야하기 때문이다.
설부터 보름까지는 이곳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쉰다고 봐도 된다.
이런 이유로 기력을 회복한 허인회도 대보름이 지나야 한성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해인은 설을 틈타 또 가란구륜 부족에 갔다 올 생각이었다.
오자마자 가려는 이유는 둘째인 아골타가 이끄는 부락을 방문하여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직접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골타와 검술대련을 하고 싶은 마음도 일부 있었다.
아골타의 검술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지만 해인이 조금은 긴장할 정도로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영감. 대보름까지 몸을 추스른 후 한성으로 출발하시는 게 어떠한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명절에 움직이는 것도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지.”
“영감. 그럼 대보름 전까지는 시간이 있사오니 소솬이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를 살피려는 겐가.”
“더 북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동해여진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쳐 있는지 살피고 오겠나이다.”
“위험하지 않겠는가?”
“가란구륜 부족이 우호적이라 염려할 건 없사옵니다. 귀화한 여진인 한 명만 대동하면 금방 다녀올 수 있습니다.”
이미 가는 길을 익혀두었기에 통역인 아탕게만 대동하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귀화한 여진인이라면 저번에 말했던 그 자인가?”
“예. 영감.”
“믿을 수 있는 자라니까 내가 주상께 주청하여 보겠네. 품계가 낮다고 실망하지는 말게.”
일전에 아탕게를 통역 겸 호위무사로 들이겠다고 하자 허인회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동해여진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믿을 수 있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운신을 편히 하고자 벼슬이 필요한 것뿐이옵니다. 크게 마음을 두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래도 한때는 부족의 후계자였던 자인데 하인처럼 부릴 수는 없잖은가.”
“형편이 닿은 데로 따르겠습니다.”
아탕게와 함께 국경을 넘나들려면 미관말직인 감투라도 있는 게 낫다.
여진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변경을 오가는 무관을 막는 이는 없을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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