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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54화 (54/130)

부족의 힘 (3)

054화 부족의 힘 (3)

산 능선에서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바다가 알고 보니 호수라잖은가.

얼마나 거대하면 바다처럼 보일까.

바다가 아니어서 내심 실망했지만 둘째의 부락만큼 안전한 곳도 드물지 싶었다.

이곳과 맏이인 와르타의 부락이 있는 만을 지켜낸다면 가란구륜 부족은 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와르타는 타국과 교역으로 재물을 늘리고 아골타 부락에서 식량을 책임진다면 말이다.

해인은 이제껏 무예만 수련했지 상리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박이규를 만나고부터 눈이 뜨였다.

상단만 잘 꾸려나가면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재물을 이용하여 세를 불릴 수 있음을.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면 타국과의 교역을 하면 된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타국과의 교역을 허락지 않으니 가란구륜 부족의 바다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그런 궁리를 하는데 아골타가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궁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와르타 형님의 해안은 한겨울에 바다가 얼어붙는 경우가 있어서 썩 불편하네. 그래서 우리 부족이 조선의 바다를 탐내는 것이지.”

여진이 조선을 넘보는 것이야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나 타국과 교역하기 위해 얼지 않는 바다를 탐한다니까 놀랄 일이었다.

때가 되면 함경도를 복속하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봄부터 가을까지만 사용할 수 있으면 되오. 포도아 사람들도 겨울 바다는 피할 게 아니오.”

“포도아 사람들과 교역을 하려는 겐가?”

“재물을 모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소.”

“포도아와 교역할 생각인 걸 보니 나라라도 세울 참인가보네.”

왜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조선이 불안하여 힘을 기를 생각뿐 결코 다른 욕심은 없었다.

재물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그 재물로 힘을 기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골타의 말을 무시하고 이문이 많이 남는지를 먼저 물었다.

“포도아와 거래하면 그렇게나 이문이 많이 남소?”

“이문도 이문이지만 그들의 앞선 문물을 들여올 수 있잖은가. 그게 곧 부족의 힘이 아니겠나.”

포도아가 조선이나 명보다 문물이 앞선 모양이다.

그걸 떠나서 타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생각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어느 여진부족이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이들의 목적이 더 큰데 있나 싶어 물어보았다.

“힘을 얻으면 이곳에 여진 왕국이라도 세울 생각이시오?”

“남에게 굴복하지 않으려면 독자적인 왕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우도 그런 생각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게 아닌가?”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소.”

해인이 강하게 부인하자 빙긋이 웃더니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치는 게 낫다고 보네만. 만약 아우가 우리와 함께한다면 그 시간이 앞당겨지겠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텐가?”

“형님. 소제는 그저 산천이나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오.”

“그럼 왜 벼슬 길에 올랐나. 그리 편히 살지.”

한성으로만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리 살았을 거였다.

외조부를 만난 이후부터 자신의 인생이 꼬였는지 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실부모하고 절에서 자라다가 뒤늦게 외조부를 만났는데 어찌 뿌리칠 수 있었겠소. 어쩌다가 과거시험을 본 게 덜커덕 급제가 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 것뿐이오.”

“조실부모한 이유가 뭔가?”

해인은 어쩔 수 없이 지난 얘기를 해줘야했다.

해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아골타는 노골적으로 부족에 남으라며 종용했다.

“아우는 조선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을 것 같네. 그런 처지였으면서도 조선 왕에게 충성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지금이라도 우리 부족으로 오게나.”

“왜구들이 곧 쳐들어올 것인데 어찌 소제만 빠져나올 수 있겠소.”

“챙길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면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나,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여진족과 섞여 살지 않을 것 같았다.

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라 여진족과 함께 하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택할 거였다.

“형님.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조선을 떠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오.”

“하긴 조선은 늘 우리를 오랑캐라고 얕잡아보고 있었지. 그런 사람들이 여진족에 일신을 의탁하기가 그리 쉽겠는가. 하지만 조선을 개국한 왕이 우리와 같은 오랑캐라는 걸 알면 과연 어찌 생각할까 궁금하네.”

“형님. 방금 그 말씀은 무슨 소리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 여진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일세.”

이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태조 대왕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게 사실이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함흥 태생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잖은가. 그 선조들 또한 오래도록 함흥에서 살았고.”

“그렇다고 여진족이라는 주장은 무리인 것 같소만.”

“그 후손들이 왜 여진족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줄 아나? 선대왕이 여진족과 관련 있다는 걸 명나라가 알면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걸 부정하기 위해 철천지원수처럼 대하는 걸세. 일종의 자격지심이겠지.”

정통성을 의심받을까봐, 자격지심 때문에 그렇게 기를 썼던가?

“형님의 주장대로 보면 함경도에 살던 조선 사람들은 죄다 여진족의 후손이란 말이잖소.”

“후손이라기보다는 피가 섞여 있다는 얘기일세. 전혀 남이 아닌데 왜 그리 이성계의 후손들이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네.”

태조 대왕을 이웃집 아이 말하듯 입에 올렸다.

그렇다고 여진족인 그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할 수도 없었다.

한때는 일족이었으면서도 그의 후손들은 여진족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라잖은가.

“명과 동조하기 위해 여진족을 핍박하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아닐 것이오.”

“믿지 않겠다면 더 얘기 않겠네. 아우도 조선 왕실에 원한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도 없는 충성을 왜 하는가. 얽매이는 걸 싫어한다니 오히려 잘 되었지 않나?”

“.........”

“봐서 알겠지만 광활한 대자연을 달리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네. 누구의 눈치도 살필 필요도 없이....”

그렇게 말한 아골타는 빙긋 웃으며 분지로 내려갔다.

잠시 정신을 수습한 해인은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분지로 내려가자 추위가 한결 덜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이 북풍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장방형 형태의 분지에는 얼어붙은 작은 호수도 있었는데, 그 위에서는 여진 아이들이 말이 끄는 썰매를 타며 웃고 있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아이들 틈에 주을의 얼굴도 보였는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에 해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웃음은 들녘에 핀 야생화처럼 싱그러웠기 때문이다.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해인 곁으로 아탕게가 다가왔다.

“나리. 이곳을 어찌 보시는지요?”

“어찌 보다니?”

“부러워서 그러하오. 이런 곳에 터전을 잡는다면 아무 걱정 없이 밖으로 나돌아다닐 수 있지 않겠소이까.”

해인의 눈에도 그리 보였으니 아탕게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누루하치에게 부족을 빼앗긴 선친을 따라 조선에 귀화했기에 안전한 피난처가 새삼 부러웠던 모양이다.

부족의 안위만 담보된다면 전사들은 마음 놓고 활개를 칠 것이기 때문이다.

***

다음날 해인과 아골타 등은 미타 호로 말을 달렸다.

금방 닿을 것 같은 거리였으나 의외로 멀어서 반나절을 달려서야 도착했는데, 너무나 압도적인 크기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해인이 언제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를 본 적이 있었던가.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수십 기의 말이 거침없이 달리는 광경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아골타의 설명에 의하면 호수의 둘레는 사흘 동안이나 말을 달려야할 만큼 거대하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얼지 않았을 때 바람이 불면 바다에서 볼법한 파도가 몰아친다는 거였다.

얼마나 거대한 호수인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형님. 이런 곳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소이다.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무릉도원이 혹시 이곳이 아니오?”

“조선 사람들이 무릉도원이라고 말하는 곳은 바닷가 쪽이 분명하네. 이곳에서는 산맥이 막혀 있어서 갈 수 없네. 와르타 형님의 부락에서 계속 위로 올라가면 그런 곳이 있다고 들었네.”

그곳은 그곳대로 무릉도원이겠으나 해인의 눈에는 미타호가 바로 무릉도원으로 보였다.

“미타호를 다른 여진부족은 모르오?”

“그건 잘 모르겠네만. 발해 때에는 저 건너편에 터를 잡은 소규모 부족들이 있었다고 들었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었다지 아마.”

겨울이 길고 춥다면 사람이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진족들은 목축보다는 농사를 겸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당장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아무튼 건주여진이나 해서나 야인여진 등도 이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나중은 어찌될지언정 일단은 안전한 곳이라는 뜻이다.

“물고기도 많겠군요.”

“그래서 우리도 이곳에 배를 만들어 띄울 생각이네.”

어선을 만들 정도면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있다는 것일까.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곳의 얼음이 녹았을 때 한 번 더 와보고 싶었다.

“형님. 소제가 여름에 와 봐도 되겠소?”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이곳은 이젠 아우의 부락이나 마찬가지이네. 아무 때나 오갈 수 있다는 말일세.”

아골타는 무척 섭섭하다는 얼굴로 힐난했다.

“형님과 소제 둘만의 약속이지 부족 전체와 맺은 것이 아니잖소. 소제가 함부로 나댄다면 구설에 오를까 그러하오.”

“나 아골타와 맺은 형제 연은 부족 전체와 맺은 것이나 다를 바 없네. 비록 와르타 형님이 계시다고는 하나 나 또한 후계자 중의 하나일세. 내가 한 약속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네.”

“소제가 불민하여 그런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앞으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으리다.”

둘의 하는 양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주을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인정 못해.”

“걱정마라. 네게 인정받을 생각은 없단다.”

아골타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자 주을이 금세 얼굴이 빨개지더니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오라버니!”

“여기 네 오라버니는 없다. 다른데서 찾아 보거라.”

그러자 주을이 화가 난 듯 채찍을 휘두르더니 앞으로 내달았다.

저러다 혹시 얼음이 꺼지기라도 하면 위험하지 싶어 해인이 재빨리 뒤를 따랐다.

해인의 등 뒤로 아골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아우. 얼음이 깨질 염려는 없으니 주을과 실컷 놀다가 오게.”

한식경 정도 달렸을까.

앞서가던 주을이 속도를 늦추더니 고개를 돌려 해인을 노려보았다.

“왜 따라오는 거죠?”

“공주가 염려되어 뒤따르는 것이오. 그게 오라비의 마음이 아니겠소?”

“흥! 내 입에서 오라버니 소리가 나올 것 같아요?”

“꼭 오라버니 소리를 듣겠다는 게 아니라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오.”

“흥! 말이나 못하면. 그거 아세요? 그대는 매사에 은근히 내 속을 뒤집어 놓고 있다는 걸?”

주을이 연신 흥흥 거렸지만 그 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꾀꼬리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별 말을 다 듣겠소이다. 마음속에 극락과 지옥이 함께 있다했으니 공주께서 소관의 말을 좋게 받아들인다면 절대로 속이 뒤집어 질 일은 없을 게요.”

“지금도 꼭 오라버니 같이 굴잖아요.”

“맞소. 소관이 보기에는 공주를 꼭 물가에 내놓은 것 같소이다.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는 걸 보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소.”

해인의 대답에 주을은 더 이상 화도 못 내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거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더 놀렸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살살 달래었다.

“공주마마. 소관이 뒤따른 건 얼음이 깨질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오. 아골타 형님도 공주마마의 안위가 걱정되어 소관을 뒤따르게 한 것이고요.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미타 호나 구경하고 돌아갑시다.”

“흥! 사냥도 못하는 전사가 어찌 나를 보호한다고.”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오늘은 사냥하러 나온 게 아니라 미타 호를 구경나왔잖소. 혹시 적들이 주변에 있다면 소관의 검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흥! 건주여진 전사들 쯤은 나도 한칼에 없앨 수 있다고요.”

한줌도 안 되는 실력으로 범강장달 같은 건주여진 전사들을 상대한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살살 부추겼다.

그랬더니 주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감돌았다.

“당연한 말씀이오. 소관도 공주의 무예가 출중하단 걸 잘 알고 있소. 단지 공주께서 힘들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오.”

“좋아요. 그렇게 미타호가 궁금하다니까 알려드리죠. 얼음이 꺼질지 모르니까 내 뒤만 따라와요.”

수십 마리의 말이 달려도 멀쩡한 얼음이 겨우 둘이 움직인다고 깨지겠는가.

아골타도 그런 염려 말고 실컷 놀다오라고 했었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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