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의 힘 (4)
055화 부족의 힘 (4)
주을의 한껏 기분이 달아올랐다.
자신이 걱정되어 따라온 걸 어찌 모르겠는가.
자존심만 내세우는 앞뒤 막힌 사내인 줄 알았더니만, 일단 저자세로 나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진즉 그랬으면 그렇게 뾰족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느물거리는 게 마뜩찮아 어깃장을 놓았던 것뿐, 속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조선 관리를 처음 봤을 때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던가.
이제껏 부족의 전사들을 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몰아붙인 것처럼 결코 음흉한 눈은 아니었다.
족장의 딸임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으며 자신을 보는 눈빛 또한 맑았다.
무예도 출중해서 건주여진 전사를 십여 명이나 상대하고도 멀쩡하지 않던가.
둘째 오라버니 말마따나 정말 그를 연모하는 게 아닐까 싶어 어제는 잠자리까지 뒤숭숭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단 둘만 있었던 때도 없었으니 가슴이 더욱 콩닥거렸다.
“미타 호수가 궁금하다니까 함께 다니는 거예요. 혹여 딴 마음일랑 품지 마세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이 빨갛게 변한 걸 보니 딴 마음을 품어달라는 것처럼 들렸다.
해인은 대강 짐작은 하면서도 우직하게 대답했다.
“공주께서 손수 나서서 귀찮은 일을 감내하시는데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소이까. 소관은 오늘 하루 공주의 호위무사가 된 것만으로도 황공무지로소이다.”
“흥! 호위무사를 자처하셨으니 제 명을 잘 따르겠네요?”
“당연하오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분부하시지요.”
그렇게 답하자 잠깐 생각에 잠기던 그녀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평소와는 다르게 몸을 꼬았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더럭 겁이 났다.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을 할 것 같아 얼른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수평선 쪽으로 갈게 아니라 저기 보이는 호수 기슭으로 가보는 게 어떤지요. 너무 추워서 화톳불을 좀 피워야 할 것 같소이다.”
뭔가 말하려다가 선수를 뺏긴 주을이 순간적으로 표정이 변했으나 이내 신색을 고쳐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에 익숙한 자신도 지금은 온몸이 달달 떨렸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기슭에 도착한 둘은 서둘러 불을 피우고 언 몸을 녹이고 있었다.
추위가 조금 가시자 해인은 말 잔등에 싣고 다니던 작은 무쇠 솥을 꺼내었다.
주을은 해인이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솥에 눈을 가득 담아 녹인 후 육포와 진 쌀을 넣자 금방 구수한과 냄새가 풍겨 나왔다.
해인이 죽처럼 변한 음식을 나무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주을은 눈이 동그래졌다.
어쩌면 이렇듯 자상할 수 있을까하는 눈빛이었다.
“아마 처음 먹어보는 음식일게요. 보기에는 그렇지만 맛이 제법 있으니까 드셔보시오.”
“......”
말없이 그릇을 받아들고 나무숟가락으로 한입 넣더니 눈이 또 다시 동그래졌다.
이번에는 맛있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입을 달싹거렸다.
“겨우 육포와 찐쌀만 넣었는데 이렇게 맛있다고요?”
“소금이 들어가서 그러하오. 물론 소관의 정성도 들어갔고요.”
그러자 주을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고운지 답삭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렇게 고운 미소가 있음에도 가시를 잔뜩 세우고 감추고 있었으니 어찌 알겠는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그런 고운 모습을 보자 해인은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그렇게 고운 모습을 왜 감추고 다니셨소.”
“?........”
“공주가 얼마나 고운 얼굴을 가졌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소?”
“소녀가 그리 가볍게 보였나요?”
아니나 다를까 금세 엄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던 때와는 다른 말투였다.
이대로 유야무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절대로 그렇지 않소. 소관의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하시오. 부족 사람들은 족장의 딸이라도 편하게 대한다고 들었기 때문이오. 유독 소관에게만 엄격하시니 영문을 모르겠소이다.”
“그래요. 부족끼리는 법도를 따지지 않아요. 글을 모르니 그런 법도를 세울 수도 없지요. 그렇다고 예의범절도 모르는 야만인은 결코 아니에요. 우리도 나름대로 질서는 있어요. 그대가 우리 부족을 너무 우습게 볼까봐 그랬어요.”
해인도 가란구륜 족장과 그의 자식들을 대하면서 여진족에 대한 편견이 많이 바뀌었다.
결코 무식한 야만인으로 생각지는 않았다.
여진족의 특성상 예의범절을 굳이 따지지 않을 뿐, 이들에게도 지켜야할 어떤 기준은 있을 거였다.
물론 다른 부족들은 그런 것조차 없다.
대부분의 여진족은 글조차 모르고 노략질을 일삼고 부녀자를 납치하는 짐승 같은 족속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관은 결코 여진족을 야만적으로 생각하거나 글을 모른다고 업신여기지 않았소. 그랬다면 공주의 오라버니와 형제의 연도 맺지 않았을 것이요. 공주께서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제 서로 알 만큼 알았기에 편히 말한 것이오.”
“우리 부족을 그리 보셨다니 천만다행이네요. 그동안 소녀가 너무 막무가내로 행동했다는 것도 잘 알아요. 여진족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던 거지요.”
“.......”
“혹시 조선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하여 유모 할머니께 조선말과 글을 배우고 조선의 법도도 열심히 익혔어요. 지금 말씀드리지만 그동안 소녀는 조선을 동경하고 있었어요.”
“아!.....소관이 공주보다 더 옹졸했던 게 아닌가 싶군요. 공주를 진심으로 존중했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소. 소관이 더 가식적으로 행동했소이다.”
속을 털고 나니까 오히려 후련했다.
공주가 이렇듯 속이 깊은 줄 알았으면 조금 달리 대했을 것인데 말이다.
공주를 도발한 게 오히려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해인의 눈빛을 유심히 살피던 주을도 진심을 받아들였는지 살포시 웃었다.
“소관의 사죄를 받아주시겠소?”
“이미 받아들인 것을요.”
“언제 그랬단 말이오.”
“여진 여인이 동족이 아닌 외간남자와 단 둘이 음식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아세요?”
“?.......”
“그것도 족장의 딸이 타국의 관리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말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해인이 음식을 만들 때 말없이 지켜보고 나무식기에 음식을 담아줬을 때 놀랐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한 행동이지만 주을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이었다.
아골타가 이렇게 둘만 방치한 것도, 실컷 놀다가 오라고 한 것도 모두 계산된 것이란 생각이 언뜻 들었다.
“혹시 이렇게 둘이 함께 있으면서 음식을 나눠먹으면 뭐 잘못되기라도 하는 게요?”
“과년한 처자가 외간남자와 함께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백년해로를 약속한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여진족의 풍습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조선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이런 상황자체가 있을 수 없겠지만.
뭔가 단단히 엮이는 기분이 드는 건 뭔지, 갑자기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계산된 일에 멋모르고 나선 꼴이 아닌가.
***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졌을 쯤에 돌아온 둘을 아골타가 반겨 맞았다.
환한 얼굴인 주을에 반해 우거지상을 하고 돌아온 해인을 보며 아골타가 이죽거렸다.
“아우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와서는 왜 그리 인상을 찌푸리나?”
“형님. 혹시 여진의 풍습에 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단둘이 음식을 먹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오?”
“누가 그러던가. 눈이 맞으면 살고 싫어지면 따로 사는 게 우리 풍습일세. 조선에서 본다면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겠지만.”
“주을이 남녀가 함께 음식을 먹는 경우는 백년가약을 맺은 것으로 간주한다하여 여쭙는 게요.”
“하하하......”
아골타는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그의 웃음은 해인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뜻 같았다.
그런데 이어진 말이 머리를 더 지끈거리게 했다.
“그런 풍습은 없지만 주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미 주을의 마음이 아우에게 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녀자가 먼저 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소.”
“여진 여자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네. 척박한 곳에 살면서 언제 이것저것 따지고 있겠나. 심지어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납치도 하네. 앞으로 조심하게나. 주을이 언제 아우를 납치할지 모르니까.”
과부 보쌈을 들어봤어도 총각 보쌈은 금시초문이었다.
조선에서는 안타깝게 요절한 처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그런 경우가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액운을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다면 약탈혼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공주의 신분으로 그런 흉악한 짓을 하겠소.”
“여진인들이 어찌 살았는지를 안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못하지. 하하하....”
아골타는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며 연신 웃었다.
“형님. 주을의 성격을 안다면 그리 웃고 넘길 게 아니오. 소제는 아직 할 일이 많아서 여진의 풍습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나.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 것을.”
아골타는 남녀의 사이나 혼인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여진 전체의 풍습이 이럴지도 모른다.
조선의 풍습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모양이다.
아골타의 말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살았던 이들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도 싶었고.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런 감지덕지도 없지 않은가.
주을 같은 여자를 어디서 만날 것인가.
“형님은 참 속도 편하오.”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일세. 건주여진을 생각하면 답답한 속을 풀길이 없었는데 말이야.”
“건주여진만 적이고 왜구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오?”
“바다를 건너오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건주여진은 지척일세. 말을 타면 한달음인데 어찌 걱정하지 않겠나.”
한달음이라고는 하지만 보름 이상 떨어진 거리였다.
그리고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쉽게 접근하기도 어렵다.
동해여진이 동쪽 바닷가로 진출한 것도 지리적 이점 때문이지 않은가.
“일전에 형님께서 건주여진은 남쪽으로 진출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정리하는 게 순서일세. 강한 이웃을 두고 있다면 뒤가 근질거리지 않겠는가.”
가란구륜 부족은 스스로도 강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전사들만 사백이 넘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활을 쏠 줄 안다면 대단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건주여진의 위세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가란구륜 전사 사백이 뒤에 버티고 있다면 늘 뒤통수가 간질거릴 것이다.
대부분의 여진 부족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사가 기껏해야 일이백임을 감안하면 지금의 건주여진도 가란구륜 부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다만, 건주여진은 주변에 중소 규모의 부족이 있는 반면에 가란구륜 부족은 주변에 부족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주변 부족을 모두 흡수했을 때 건주여진의 힘을 생각하면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거였다.
“힘을 길러도 소용없다면 어찌하려고 하오.”
“그래서 이런 안전한 곳을 찾아내지 않았겠나.”
주변이 모두 건주여진의 손에 들어간다면 분지 속에서만 갇혀 지내야 하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리되면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야할지도 모른다.
다른 대안도 있어야할 것 같아 한마디 보탰다.
“형님. 산맥 너머의 북쪽 바닷가에 무릉도원이 있다는데 그곳은 왜 놔두는 게요?”
토끼도 도망갈 굴을 여러 개 파놓는다 하는데 이미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다른 곳에도 피난처를 마련하는 게 정상이다.
건주여진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적이라면 말이다.
“등을 보이고 도망갈 궁리부터 하라는 겐가? 여진 전사들은 죽으면 죽었지 그리는 못하네.”
“전사들이야 당연히 싸워야겠지만 아녀자들까지 희생할 필요는 없잖소. 그들이라도 남아야 부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게 아니요.”
해인의 말에 아골타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해인을 지긋이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뭔가 부탁할 것 같은 눈빛이라 애써 눈길을 피하고 있는데, 아골타가 갑자기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우가 그쪽을 개척할 의향은 없는가?”
“소제가 왜?......”
“왜구의 침략을 늘 걱정하기에 하는 말이네만. 조선이 궁지에 몰리면 어찌하겠나. 우리 부족으로 오는 것도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예 아우가 그곳을 개척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일세.”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으나 해인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곳을 개척하면 가란구륜 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조선의 친인척과 지인들도 거부감 없이 올 수 있으니까.
“여진 땅에 조선 관리가 들어오는 걸 과연 용납할까요?”
“별 걱정을 다하네. 주을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여기서 왜 주을이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았다.
“형님. 주을이 왜 거론하시오?”
“아우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당연히 주을이 함께 가야하지 않겠나. 그래야 아버님이나 부족의 전사들이 인정을 할 것이고.”
“소제와 주을 공주가 무슨 그렇고 그런 관계란 말이오. 생사람 잡지 마시오.”
“단 둘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며?”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건가?
여진의 땅을 개발하려면 이들이 인정하는 새로운 신분이 필요하긴 했다.
여진족들이 인정할 만한 신분은 주을과의 혼인처럼 좋은 것도 없음이다.
그래야만 해인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사람이 없을 거였다.
대족장의 사위인데 누가 해인을 부정할 것이며 감히 시비를 하겠는가.
다만 해인이 조선을 떠나 이곳에서 산다면 그게 과연 해인이 바라던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을까.
조선이 망하든 흥하든 결국은 현실을 피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해인은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와도 같이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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