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의 힘 (5)
056화 부족의 힘 (5)
해인과 둘째 오라비 간에 오간 얘기를 전해들은 주을은 얼굴빛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조선 무관이 탐을 낸다는 곳은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첫째 오라비의 부락에서 바닷가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선녀가 노닐었다는 곳이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라고 했다.
최 교위가 그곳을 개척하려면 족장인 아버지가 허락해야 가능한데, 필시 자신과의 혼인이 대두될 것이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둘째 오라비도 최 교위에게 자신을 거론했다지 않은가.
주을 자신이 앞장세워야 가능한 일이라고.
마음속에 둔 사내가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된다니까 가슴이 마구 벌렁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미타 호수에서 자신이 곱다는 말을 했던 터라 마음을 살짝 내주어 보았었다.
그랬더니 그도 싫은 내색은 아니었던 것이다.
눈빛만 봐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굴 건 없었다.
조선의 앞날이 걱정되어 이곳을 들락거린다 했으니 조선이 망할 때만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리사타. 오라버니 입에서 우리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했다고?”
“아이참. 아가씨. 몇 번이나 묻고 그래요. 제 귀로 분명히 들었다니까요.”
주을의 몸종인 리사타가 그리 들었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워낙 눈치가 빠르고 귀가 밝은 아이인지라 허투루 들었을 리 만무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음식을 나눠먹었으니 당연한 게 아닌가요? 조선 남녀는 칠세만 넘어도 함께 하지 못한다 했어요. 그런데 조선관리가 버젓이 아가씨와 음식을 나눠먹었으니 큰일인 거지요.”
이 대목에서 좋아 죽는 주을이었다.
유교를 최고로 치는 조선 관리가 조선의 법도를 어길 만큼 자신을 어여뻐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분명 본인 입으로도 곱다하였다.
대족장의 딸에게 감히 입에 담을 말은 아닌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그만큼 자신을 흠모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이제부터는 조신하게 행동해야할 것 같았다.
아니, 아예 접근조차 못하도록 날을 더 세워버리던가.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몸이 달아 족장인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갈 것이니까.
“그곳엔 언제 간다고 하디.”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조선 관리가 무척 고민하는 것 같았어요.”
“당연하지. 우리 땅은 욕심나는데 조선 관리의 신분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니까. 흥! 내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야.”
다 된 밥인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걸 왜일까.
자신이 아니라도 그의 무예가 탐나 아버지가 허락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미리 얘기해야 하나, 아니면 둘째 오라비에게 떼를 쓸까, 여간 고민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아골타의 부락을 떠나 족장의 부락에 온지 이틀째였다.
내일은 경흥으로 떠나야 해서 족장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고하러 갔다.
족장의 숙소에는 주을이 함께 있었다.
해인이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족장은 인상을 찌푸린 체 해인을 맞았다.
“족장님. 소관은 내일 아침에 경흥으로 돌아가고자 하옵니다.”
“벌써 가려고? 자네 덕분에 건주여진의 잔당들을 재빨리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 우리 부족이 자네에게 큰 빚을 졌어.”
“잔당들을 모주 잡았다니 다행이옵니다. 소관도 함께 하고 싶었는데...”
“손님에게 험한 일을 시킬 수는 없지. 초장에 건주여진 전사들을 도륙 낸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해인이 아골타의 부락에 다녀올 동안 부족 전사들을 죽인 잔당들을 모두 찾아내어 척살했다고 한다.
죽은 전사들의 넋을 달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부족사람들은 해인을 볼 때마다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에 가면 또 언제 볼 수 있겠나.”
“당분간은 경흥에 머물 계획이옵니다. 건주여진의 동태가 수상쩍어서 핑계거리를 만들어 봐야지요.”
해인이 경흥에 더 머물 의사를 밝히자 가란구륜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찬가지로 주을도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경흥에 있는 게 얼굴을 붉힐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건주여진 때문인가 아니면 자네가 말하는 무릉도원 때문인가.”
“둘 다입니다. 특히 무릉도원이란 곳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잘 되었군. 안 그래도 주을이 자네를 꽉 잡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거든.”
그러자 주을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 그걸 이 자리에서 말하면 어쩌라고....”
“어차피 알 일이 아니더냐. 너도 함께 가고 싶다고 했잖느냐.”
“아이 참. 정말.”
“공주께서 함께 하신다면 소관으로서는 일생의 광영이올시다.”
주을을 더 곤란하게 해봐야 좋을 것도 없기에 해인이 선수를 쳐버렸다.
그랬더니 주을이 얼른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저놈이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군. 그래.”
“......”
“이번에 주을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고?”
“미타 호수를 구경시켜주었나이다.”
“그것 말고. 단 둘이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자랑하던데?”
정말 함께 음식을 나누면 큰일이긴 한가보았다.
둘이 함께 식사한 것을 두고 유난을 떠는 걸 보면 말이다.
“저.....족장님. 여진에서 젊은 남녀가 음식을 함께 먹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요.”
“무슨 문제는. 아주 좋은 일이지. 서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인데 잘못될 게 무어 있겠나.”
그 말에 숨이 턱 막혔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족장은 그저 흡족한 미소만 흘리고 있었다.
***
경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영 무거웠다.
주을과 단단히 엮여버린 게 해인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이다.
만약 주을과의 연이 끊어진다면 부락을 드나들기는커녕 공적이 되어 이쪽으로는 얼씬도 못할 것이다.
해인과 주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다.
한숨을 푹푹 쉬는 해인을 곁눈질하던 아탕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리. 좋은 일인데 무슨 한숨을 그리 쉬는지요.”
“그게 좋은 일로 보이느냐?”
“좋다마다요. 나리께는 이제 든든한 뒷배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가란구륜 부족의 은인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공주의 배필이신데요.”
“만약 주을과 일이 꼬이면 이쪽으로는 발길을 못할까 걱정이다.”
족장이 주을과 함께 식사를 했냐고 물을 정도면 볼 장을 다 봤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마 부족의 공적이 되어 암살조가 따라 붙을 것이었다.
족장 딸의 앞날을 망친 자를 곱게 두고 볼 여진전사들이 어디 있겠는가.
“공주와 혼인을 하면 나리께서는 날개를 다는 격입니다. 그런 대단한 자리인데 꼬이지 않게 만들어야지요. 나리께서는 이제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쉬이 그러마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조선 관리가 여진 처자와 혼인을 하겠다면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다.
차라리 조선이 망조가 들었다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겠지만.
“주을이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닌데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
“소인이 보기에는 나리에게만 유난한 것 같더이다. 여진 여인처럼 거칠지도 않고 자태로만 따져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분이신데....”
“내게만 유난스럽다고?”
조금 그런 면도 없잖아 있었다.
멀쩡히 잘 웃다가도 해인만 나타나면 새초롬해지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괜히 투정을 부리는 법이옵니다. 쉽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게 여인네들이지요.”
“너는 나이도 어린 것이 어찌 여인네들의 속내까지 알고 있느냐?”
“소인도 올해로 약관입니다. 알 건 다 알지요. 특히 여진 사람이라면 벌써 자식이 주렁주렁할 나입지요.”
여진 사람들도 일찍 혼인하는 편이라 아탕게도 계속 건주여진에 살았다면 자식이 한둘은 있을 나이였다.
그러니 해인보다는 여인에 대해 더 많이 알 거였다.
이미 경험을 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공주처럼 조선말을 그렇게 잘하는 여진 여인을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달리 생각해보시지요.”
주을은 조선말뿐만 아니라 글도 읽고 풍습도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 해인이 불편할 일은 거의 없을 거였다.
복에 겨워 괜한 투정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민해서 될 일도 아닌 것 같으니 물 흐르는 듯이 흘러가게 둬야겠구나.”
“나리. 잘 생각하셨습니다. 소인의 단견으로도 가란구륜 부족만큼 강한 부족도 없는 것 같으오.”
“왜? 건주여진과 한판 붙었으면 좋겠느냐?”
“예. 나리. 나리의 무예면 수백의 전사도 두렵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가란구륜 부족이 합세하면 필승이옵니다.”
***
허인회는 완전히 기력을 되찾은 듯했다.
해인이 돌아오자 당장 한성으로 떠나자며 짐을 꾸렸던 것이다.
막 한성으로 출발하려는데 회령에서 급보가 올라왔다.
여진족들이 넘어와 노략질하고 있다는 거였다.
노략질 당한 백성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나 해인은 경흥에 남을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영감. 소관은 여기에 남아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나도 남아야하지 않겠나.”
“영감께서는 여진족의 동향을 주상께 직접 아뢰고 육진에 군사를 더 보내 달라 하소서. 건주여진의 동향이 매우 수상합니다.”
건주여진이 동해 여진 영역까지 침범했다는 걸 보고했기에 허인회도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게. 자네는 이곳에 남아 상황을 살펴보다가 잠잠해지면 한성으로 올라오게. 자네라도 남겨놓아야 주상께 면목이 서겠네.”
“건주여진의 동향을 샅샅이 파악해 두겠나이다.”
“자네가 나설 일은 아니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네. 앞장섰다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일세.”
“예. 영감. 염려 놓으십시오.”
허인회와 호위무관들이 한성으로 출발할 채비를 하자 해인은 바로 박이규의 상단으로 찾아갔다.
“아우님. 어서 오시게.”
“별고 없으셨지요?”
“아탕게에게 얘기 들었네. 건주 전사들과 칼부림을 했다고?”
“예. 형님. 아무래도 장백여진이 건주여진 품으로 들어간 것 같소. 그러니까 동해 여진 쪽도 기웃거리고 회령을 넘보는 것이겠지요.”
회령 쪽은 전통적으로 장백여진의 영역이었다.
장백여진은 조선과 교류를 하는 관계로 마구잡이 약탈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조선으로 넘어와 약탈을 했다면 내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했거나 건주여진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장백여진이 건주여진에 흡수되었지 않나 추측하는 거였다.
장백여진은 동해여진보다 현저히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건주여진이 작정만 한다면 순식간이다.
“어허! 그런 조짐은 전혀 없었네. 건주여진의 세력권에 들었다면 그쪽 상단에서 먼저 알아챘을 텐데......”
“겨울에는 상단들이 움직이지 않잖소. 그러니 모를 수도 있지요.”
장백여진의 세력권인 회령이나 종성 부령 온성 등지의 수령이나 만호들은 동해여진이 진을 치고 있는 경흥 경원 쪽과는 달리 항상 여진족의 동향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백여진은 동해 여진보다 더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 만큼 늘 배를 곯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국경을 넘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제껏 장백여진과의 교역을 눈감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누루하치가 감히 우리 조선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다고?”
“통합 후유증을 모두 극복한 모양이겠지요. 아니면 왜국의 움직임 때문에 조선이 함부로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가요.”
“놈들이 그 정도로 정보가 빠른가?”
“형님. 가란구륜 부족을 생각해 보시오. 가란구륜 부족의 움직임을 건주여진인들 모르겠소. 조선만 눈감고 귀막고 있는 게요. 아무래도 왜국의 침략이 임박한 것 같소이다.”
누루하치가 건주여진을 일통할 정도면 주변의 움직임 또한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았다.
가란구륜이 포도아와 교역을 하고 세를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왜군이 들이닥치면 조선이 흔들릴 것이고 그걸 기회로 삼아 세력을 더 넓힐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만 파당 싸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물론 일부 관료들이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들리는 풍문에는 남쪽지방의 수령들이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다지만, 괜히 민심을 흔든다며 곱지 않은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거기에 반발했다가는 영락없이 역모로 몰릴 판이다.
“이보게 아우님.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은 없는가?”
“준비는 해야겠는데 도호부사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까봐 그게 걱정이오.”
“그게 껄끄럽다면 가라구륜 족장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 아닌가. 도문강을 넘으면 간섭할 수 없으니 그쪽 영역을 좀 사용하겠다고 말해보게.”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터라 해인은 눈이 번쩍 뜨였다.
족장이나 아들들이 계속 여진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게 부담스러워 그저 몸을 뺄 궁리만 했던 것이다.
“형님. 기막힌 묘안이외다.”
“그럼. 지금이라도 다녀오시게. 이 우형은 재물을 더 끌어 모아 보겠네.”
“쇠붙이와 식량을 비축하는 게 우선이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대장장이도 끌어들이시오.”
“대장장이를?”
“병장기를 만들어야 싸울 게 아니오. 공공연히 관아의 병장기를 빼돌릴 수는 없으니 직접 만들 수밖에요.”
해인의 걱정은 대장장이보다는 쇠붙이를 확보할 수 있는지였다.
가란구륜 부족도 쇠붙이가 부족하여 광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란구륜 부족에도 없겠는가?”
“그들도 쇠가 부족한 모양입디다. 그러니 우리라도 모아야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이다. 그리고 날랜 장정들도 은밀히 모아주시오.”
“자네가 직접 지휘할 건가?”
“그래야지요. 관군과 합세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러오. 지휘하는 자가 문관이라는 게 문제이오. 문관이 설사 병법을 안다 해도 조총을 앞세운 왜군 앞에서는 바람 앞의 등불이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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