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의 초여름 (1)
057화 녹둔도의 초여름 (1)
여진족이 회령과 부령 근처에서 노략질을 재개한 걸 기회로 삼아 해인은 경흥에 남았다.
그리고는 한 달간의 준비 끝에 도문강 너머의 녹둔도에 은밀히 주둔지를 만들었다.
연전에 야인들이 침입하여 쑥대밭을 만든 이후 그냥 방치되고 있어서 제집처럼 사용하는 거였다.
녹둔도는 조금만 손봤음에도 제법 그럴듯한 토성으로 변모해 있었다.
동해여진의 수장인 가란구륜 족장에게 양해를 받았기에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도문강 너머의 자잘한 부족들은 이미 해인의 존재를 대충 알고 있어서 녹둔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회령 일대에 출몰했던 여진족은 근 한 달간 일대를 휩쓸고 나서 조용해졌는데,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한성에 있는 허인회에게 좀 더 머물러야겠다며 서신을 보냈었다.
허인회도 조만간 지원 병력을 이끌고 경흥으로 오겠다고 했기에 해인으로서는 어딜 가든 거침이 없었다.
경흥 부사도 해인이 주상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녹둔도는 둘레가 이십 리가량 되는 비옥한 곳이다.
조선군이 주둔할 당시에도 농사를 지었던 터라 보리를 파종했더니 벌써 종아리 어림까지 자라 있었다.
사월 날씨답지 않게 유난히 더워 윗도리를 활짝 벗은 해인은 보리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녹둔도에 주둔하는 장정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리였다.
일백여 기의 말이 달리는 소리는 마치 북을 치는 것처럼 들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훈련 책임자인 아탕게가 날듯이 말에서 내려 해인에게 부복했다.
“나리. 언제 오시었소?”
“그저께 도문을 건넜다. 훈련을 나간 지 엿새나 되었다고?”
“예. 더 있으려다가 식량이 바닥나서 돌아오는 길이오이다.”
녹둔도에 일백여 명의 장정이 머문 지도 벌써 석 달 가까이 되었다.
이제는 제법 말을 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말 위에서 중심도 잡지 못했었다.
활은 하품 날 수준이었지만 창술은 제법 바람 소리가 날 정도였다.
활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려 시위를 당기고 놓는 정도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어서 기대하는 바가 컸다.
가장 기대하고 있는 무기는 조총이었다.
가란구륜 족장에게 부탁하여 10정을 확보했는데, 이게 볼수록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얻은 조총은 포도아 상인이 주고간 것으로 왜국의 조총보다 성능이 더 좋다고 했다.
“조총 연습은 잘되고 있느냐?”
“예. 나리. 그런데 명중률이 시원찮아 그게 조금......또 몸을 숨길 수 없다는 점이 영 마음에 걸리오이다.”
“그래도 활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며칠만 익히면 아무나 만질 수 있는 무기가 어디 있으려고.”
“나리. 조총을 더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까 조총. 와르타 나리가 왜국과 교역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입수할 방도가 있지 않겠소이까.”
“요즘 같은 때에 왜국이 조총을 쉽게 내주겠느냐?”
가란구륜 부족은 그동안 왜국과도 은밀히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배를 띄워 대마도나 본토까지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교역을 하지만 예전에는 왜국으로 노략질을 다녔다는 얘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국의 해안을 휩쓸고 다녔을 정도라면 동해여진의 항해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얘기이다.
하기야 족장의 맏이인 와르타 부락의 포구에 떠 있던 배를 볼라치면 전혀 근거 없지도 않았다.
최근에는 경상 좌수영의 수군이 눈에 불을 켜고 순시를 하는 바람에 교역이 뜸해졌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한 줌도 안 되는 부족이 왜국으로 노략질을 다녔고 이제는 교역을 다닐 정도로 진취적인데 반해.
조선은 오로지 명나라에만 목을 매고 당리당략에 얽매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리. 왜국이 조선을 정벌할 준비를 마쳤다는 게 사실이오이까?”
“교역에 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침략이 임박했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최근에 대마도와의 교역이 단절되었다고 했다.
조선 수군의 순시도 있지만 왜국에서도 교역을 꺼리고 있음이다.
자신들의 전력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하려고 더 이상 오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곧 본토에 있는 배들이 대마도로 모인다는 뜻이고 침략이 임박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해인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왜군이 대마도를 전진 기지로 삼을 것이란 생각은 동래까지 반나절이면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기에 해인도 더 이상 경흥 부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어서 녹둔도를 제집처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군이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가 일선이 되겠구먼요.”
“그건 나중 일일 게다. 우선은 가까운 남쪽부터 공략하겠지.”
왜국이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이곳까지 힘이 미치지 못할 거였다.
그러려면 정말 수십만의 대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골몰하고 있는데 아탕게의 입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 나왔다.
“나리. 이번에 데려온 대장장이가 조총을 보더니 흉내를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이다.”
“무엇이? 대장장이가 조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놀랄 것도 없소이다. 소인의 눈에도 조총의 구조가 복잡할 게 별로 없어 보입디다.”
조총만 만들 수 있다면, 숙달하는 데 하세월이 걸리는 활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며칠만 익히면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게 조총이기 때문이다.
“그 대장장이를 이리 데려와 봐라.”
“잠시만 계시오. 소인이 휭하니 다녀오겠습니다.”
* * *
잠시 후 중년의 남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해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장쇠라는 대장장이는 눈빛이 사뭇 곧았다.
딱 봐도 고집스럽게 생긴 눈빛이었다.
“그대가 조총을 흉내 낼 수 있다고 맣했느냐?”
“예. 나리. 쇠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사옵니다.”
생소한 기구를 만드는 것임에도 이런 자신감이라니.
장쇠의 눈빛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며칠이면 만들 수 있겠는가.”
“엿새만 말미를 주시면 비슷하게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손재주가 좋은 목장을 한 명 붙여 주시면 하루 정도 앞당길 수도 있사옵니다. 소인이 쇠를 만지는 건 자신 있는데 나무를 다듬는 재주는 영 젬병이옵니다.”
조총 한 정을 만드는 데 엿새면 충분하다는 말에 해인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숙달만 되면 더 빨리 만들 수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총신을 받칠 나무 손잡이를 만들어 줄 목장만 있다면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단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조총을 흉내 낼 수 있다면 더 나은 것도 만들 수 있겠는가?”
“쇠구슬이 날아가는 원리를 알고 있사오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사옵니다.”
“명중률은 높일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게. 그러면 후하게 상급을 내리겠네.”
상급을 준다는 말에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던 장쇠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달리 할 말이 있는가? 어려워 말고 말해 보게. 어지간한 청은 다 들어주겠네.”
“소인이 듣기로는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데 그리되면 길주에 있는 처와 자식들은 사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경흥에서 데려온 대장장이인데 길주에 처자가 있다는 게 이상해서 되물었다.
“자네의 식솔들이 경흥에 있지 않고 왜 길주에 있는 겐가?”
“소인도 본래 길주 관아에 있었으나 도호부사께서 경흥으로 오시면서 소인을 데려온 것이옵니다. 그래서 식솔들과 떨어지게 되었사옵니다.”
“그럼 함께 경흥으로 올 것이지 어찌하여 홀로 왔는가?”
“소인의 맏이도 대장장이여서 그곳을 떠날 형편이 못 되었나이다. 그래서 어미와 여식도 길주에 남게 되었사옵니다.”
장쇠의 경우도 경흥 도호부 관아에 소속된 대장장이여서 어렵사리 빼돌렸던 건데, 그의 맏이 또한 길주 관아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대장장이, 즉 야장의 신세가 얼마나 고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처자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은 게냐?”
“예. 나리. 송구한 말씀이오나 전란이 나면 이곳보다 길주가 더 위태로울 것 같아서···.”
장쇠도 녹둔도에 있으면서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걸 눈치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병장기를 만드는 이유가 왜국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걸 알고 나자 속이 탔을 것이다.
처자식이 위태로운 지경인데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하다.
“알았네. 처자식을 모두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니 자네는 아무 염려 말고 조총을 만드는 데만 심혈을 쏟도록 하게.”
“관아에 얽매여 있는데 어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말게. 수일 내로 이곳으로 데려올 것인즉.”
장쇠도 부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서야 겨우 빼돌렸는데, 하물며 일면식도 없는 길주 목사에게 그런 부탁을 해 본들 들어줄 리가 없다.
오히려 역모를 획책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일이다.
관아에 예속된 대장장이는 주로 병장기를 고치거나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밀히 빼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박이규가 잘할 것인데 지금 상단을 이끌고 경흥의 서북부에 있는 경원 일대를 돌고 있었다.
관아에 있는 사람을 빼내는 일이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대장장이가 더 있으면 조총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에 더 잴 것도 없었다.
* * *
이틀을 달려 길주목에 도착한 해인은 관아의 동정부터 살폈다.
대장장이가 관아에 예속되어 있기는 하나 쇠를 달굴 때 나는 연기와 쇠를 두드리는 소리 등으로 인해 동헌이나 내아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노복들이 기거하는 관노청이나 내아에 딸린 부속채에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야 어디에 있는지 살필 수 있는데 도통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직을 밝히고 들어갈 입장도 아니었고.
은밀히 빼돌리려면 자신의 신분이 밝혀져서는 곤란해진다.
정문인 태평루 누문을 지켜보던 중 곱상하게 생긴 열서넛쯤 되어 보이는 계집종이 나왔다.
관아 담장을 따라 바삐 걸어가는 계집종에게 말을 붙였다.
“얘야. 뭘 좀 물어보자꾸나.”
갓을 쓴 양반이 말을 붙이자 계집종이 화들짝 놀랐다.
놀라는 표정이 깜찍해서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대장장이 억삼이를 아느냐?”
“뉘신데 제 오라버니를 찾으시는지요.”
이런 우연도 있으려나.
계집종이 마침 장쇠의 딸인 모양이다.
“억삼이가 네 오라비더냐?”
“네. 나리.”
“그럼 네 아비의 함자가 장쇠이겠구나.”
“그걸 어찌 아시어요?”
“네 아비와 함께 있는 사람이니라.”
동그랗게 뜬 눈이 더 커졌다.
그러더니 경계의 눈빛으로 해인의 아래위를 훑었다.
관아에 매여 있는 아비가 낯선 양반과 함께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하여도 대장간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면 제 아비가 어딘가에 강제로 얽매여 있다고 생각할 터.
대장장이를 필요로 하는 일이야 빤하지 않겠는가.
“제 아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요?”
당돌한 물음에 미처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여아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하였다.
“나와 함께 경흥에 있다. 무탈하게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네 아비의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느니라.”
양반이 무엇이 아쉬워 천민인 대장장이의 소식을 전하러 다니겠는가.
필시 자신의 오라비를 데려가려는 것일 게다.
동그란 눈을 또르륵 굴리던 계집아이는 결심이 섰는지 앙다문 입을 열었다.
“아비를 풀어 주지 않으면 관아에 고변할 테요.”
“네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구나. 네 아비는 묶여 있는 신세도 아니고 험한 일을 하지도 않는단다. 내가 이런 수고를 하는 이유는 장쇠가 처자식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청을 들어주려는 것이다.”
“오라버니만 아니라 우리도 데려간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네 오라비를 좀 불러내거라. 자세한 사정은 네 오라비를 불러오면 말해 주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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