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58화 (58/130)

녹둔도의 초여름 (2)

058화 녹둔도의 초여름 (2)

장쇠의 처자식들은 해인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해인 자신이 생각해도 설득력이 부족하긴 했다.

조선에서 양반이 상민을 위해 나서는 경우는 해인도 듣지 못했으니까.

어찌 데려갈까 고민하다 보니 저녁이 되었다.

내일 다시 만나 설득해 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잖은가.

어쩔 수 없이 관아 근처의 주막에 들어가서 국밥에 탁주를 주문하고 어두워지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때 길주 남쪽 성진 방면의 봉수대에서 봉화 불빛이 반짝거리는 게 아닌가.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섯 개의 불빛이 반짝였다

반 식경쯤 있다가 또 다섯 개의 불빛이 반짝였다.

봉수대의 불빛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무관인 해인은 다섯 개의 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하나의 불빛은 봉수대 간 신호전달이고, 두 개와 세 개는 외적이 출현했거나 국경에 접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네 개의 불빛은 국경을 넘어섰다는 신호이고 다섯 개의 불빛은 교전 중이라는 신호인 것이다.

남쪽에서 올라온 신호라면 여진족일 리는 없고 당연히 왜국일 것인데, 이미 부산진이나 동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반 식경이 지나서 또 불빛이 보였다면 부산진이 뚫렸다는 말이나 같았다.

그렇다면 왜국의 병사들이 어제나 그제 부산진에 도착하여 이미 한성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다.

봉화는 조선 각지에서 한성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남쪽에서 한성을 거쳐 길주까지 오려면 약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봉수대는 십 오리 간격인 곳도 있고 이삼십 리 간격인 곳도 있어 한성에서 함경도까지만 해도 대략 반나절은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봉수대의 봉화 불빛은 해인만 본 게 아니었다.

숙직을 하던 길주목의 육방 관속 중의 하나인 병방도 봉화 불빛을 보았던지 관아의 태평루 누문 위에 있는 큰북이 둥둥 울렸다.

위급할 때 사용하는 북소리가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주막을 나와 관아로 발걸음을 옮긴 해인은 활짝 열린 누문 사이로 동헌의 동태를 살폈다.

내아에서 관기의 치마꼬리를 잡고 있었던지 미처 의관도 갖추지 못한 목사가 허둥대며 동헌 누마루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동헌 마당엔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당장 이곳으로 외적이 침입해 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틈에 해인도 누문을 통과해 관아 끄트머리에 있는 대장간으로 내달았다.

“억삼이 있느냐?”

“뉘시오?”

“낮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어서 나와 보거라.”

관아 전체가 시끄러운데도 밖을 내다보지 않고 있는 걸 보니 오늘 해인의 등장으로 어찌할까를 고민 중이었던 모양이다.

“나리. 이곳이 어딘데 여기까지 들어오시었소. 그러다가 치도곤을 당할 것이옵니다.”

“어미와 동생 걱정부터 먼저 해야겠구나. 전란이 일어났는데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있는 걸 보니 참으로 한심한 놈이로구나.”

“전란이라고요?”

“저 북소리가 안 들리느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리다.”

“헉···!”

협박 반 설득 반 끝에 밤이 이슥해서야 길주를 떠날 수 있었다.

야반도주이기는 하나 그리 급하게 갈 필요는 없었다.

길주 관아는 봉화로 인해 경황이 없는 와중이기에 뒤를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바쁜 사람은 해인이었다.

왜국이 침략했다면 두어 달 안에 한성까지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지의 진이나 관아의 군졸들이 왜군을 막겠지만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인 조선군이 과연 얼마나 버텨 내겠는가.

거기에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등장한 터라 필시 지리멸렬할 것이었다.

장쇠의 처자식들에게 경흥의 박이규 상단을 찾아오라 이르고 해인은 급하게 경흥으로 말을 몰았다.

* * *

경흥에 도착한 해인은 도호부 관아부터 들렀다.

경흥도 이미 봉화로 전란이 벌어졌음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 부사도 경황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길주 목사보다는 침착한 모습이었다.

“최 교위는 어디서 이 소식을 들었는가?”

“회령 일대의 여진족 동향을 파악하다가 듣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왜구가 들이닥쳤기에 연일 봉화가 치솟는지···.”

왜구가 아니라 왜군일 것이다.

왜구기 해안가에 노략질 하러왔다고 함경도까지 봉화를 올리겠는가.

도호부 관아로 오는 동안 수시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눈으로 본 터라 해인도 혼란스러웠다.

낮밤없이 계속 반복되는 봉화는 교전 중이 아니라 왜군이 한성으로 밀고 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리. 왜구의 노략질이 아니라 왜국에서 쳐들어온 것 같사옵니다.”

“휴! 전란으로 보이긴 하네. 남쪽에서 잘 막아내야 할 건데.......여진족의 동향은 어떠한가?”

“별다른 조짐은 없었습니다.”

“놈들까지 설치면 진퇴양난이네.”

해인도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한성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북변의 병력을 보내라고 할 것인데, 그것도 낭패인 것이다.

육진의 병사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 건주여진은 필시 그 틈을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주상 전하께서 육진의 군사들을 보내라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판단할 일에 본관이 어찌 나서겠는가? 그리고 병사라고 해 봐야 몇 되지도 않은데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네.”

경흥 부사는 종3품 문관이고 함경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는 더 윗길이다.

관찰사나 병마절도사에게 부사가 병력 이동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함흥에 있는 관찰사께 서신을 보내어서라도 병마절도사가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왜군이야 언젠가 바다 건너 돌아가겠지만 여진족은 쉽게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건주여진의 위세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별 움직임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장백여진이 그들 손에 넣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육진의 병력만으로도 부족한데 여기서 병력을 더 빼면 육진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육진의 군사들을 빼내면 앞뒤로 적을 맞는 형국이 되어 도문강 너머도 안전지대가 아니게 된다.

한성이 무너지더라도 육진의 군사들은 이곳에 있어야 건주여진의 오판을 막고 올라오는 왜군을 압박할 수 있다.

“자네가 그렇게 봤다면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한성만 쳐다보는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과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당장 여진족의 동태가 수상하다고 하는 수밖에요.”

“움직임도 없는데 거짓을 고하라는 건가?”

“육진의 병력이 온전하려면 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나리께서도 사는 길입니다.”

“······.”

고민을 거듭하던 부사가 지필묵을 꺼내 들더니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아마 허인회를 핑계 삼아 해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할 것이었다.

동헌을 나온 해인은 상단에 들러 박이규의 행방을 찾았으나 경원 쪽으로 상행을 떠난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은 박이규의 도움이 가장 절실할 때였기에 가슴만 타들어 갔다.

상단 사람들에게 박이규를 급히 수배하라 이르고 해인은 녹둔도로 말을 몰았다.

한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 * *

녹둔도에도 왜국이 침략했다는 소식은 전해졌는지 토성 곳곳에 눈을 부라린 장정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해인이 토성 근처에 다다르자 아탕게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나리.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관아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그런데 장쇠는 조총을 만들었느냐?”

“들어가서 보시지요. 제법 잘 만들었습니다.”

녹둔도로 오는 동안 해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조총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조총을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왜군이든 건주여진이든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방어할 병력이 터무니없이 적기는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가란구륜 부족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다.

조총을 만들면 우선 장정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가란구륜 부족에게 공급할 생각이었으니까.

장쇠가 만든 조총은 포도아에서 만든 것보다는 투박해 보였지만 명중률은 더 나았다.

총신 끝에 상대방을 가늠을 할 수 있는 돌출된 쇠를 붙인 게 주효한 거였다.

“잘 만들었구나. 어찌 이런 생각을 다 했는가?”

“명중률을 높일 방도를 고심하다가 가늠쇠를 붙이면 아무래도 겨누기 수월타 생각했나이다. 또 다른 방도도 모색 중이오나 점차 나아질 것이옵니다.”

“참으로 장할세. 내가 길주까지 갔다 온 보람이 있구나.”

“······?”

“길주에 다녀왔네. 자네 식솔들을 관아에서 무사히 빼돌렸네. 지금 이리로 오는 중이니 며칠 후에는 자네 처자식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일세.”

처자식을 빼돌렸다니까 장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느 누가 있어 하찮은 대장장이를 위해 이런 수고를 해 줄 수 있겠는가.

그저 윽박질러 소처럼 부리기만 해도 될 것을.

“나리.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갚겠나이다. 참으로 감읍한 일이옵니다.”

“자네의 노고에 비하면 별것 아니네. 내가 괜히 생색을 낸 꼴이 되었구먼.”

옆에서 지켜보던 아탕게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이런 사람을 모시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나리. 사람만 더 있으면 이틀에 한 정도 가능하다 하오.”

“그래? 아탕게의 말이 사실이냐?”

“소인의 맏이인 억삼이만 있으면 가능할 것이옵니다. 억삼이 놈이 제법 손재주가 좋사옵니다. 소인도 생각지 못하는 신묘한 걸 곧잘 만드는 아이입니다.”

자식 자랑을 함부로 하지 않는데,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걸 보니 대단한 재주를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란이 일어났지만 해인은 또 다른 기대로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왜국의 병사들보다 더 나은 조총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탕게는 곧장 경흥의 상단으로 가거라. 내일쯤이면 장쇠의 처자식들이 당도할 것이다. 그리고 박 행수가 돌아왔거들랑 같이 오도록 해라.”

“예. 나리.”

* * *

그로부터 삼 일 후에 박이규와 장쇠의 식솔들이 녹둔도에 도착했다.

박이규도 경원을 거쳐 회령까지 내려갔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경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형님. 쇠붙이와 화약이 필요한데 가능하겠는지요.”

“장사치들이 구하려고 맘먹으면 못 구할 게 뭐 있겠나. 그런데 화약까지 구하려면 재물이 많이 모자라네. 장정들의 말을 구입하느라 지난겨울의 이문까지 털어 넣어서 가용할 자금이 별로 없네.”

여진족에게서 말 백여 필을 구입하느라 모피 거래로 얻은 이문을 모두 소진했던 것이다.

그만큼 말값이 비쌌다.

그렇게 값을 치르고 산 말이지만 조총 앞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말을 팔아서라도 구해야겠소.”

“아우님. 무슨 일이기에 쇠붙이와 화약을 찾는 건가?”

“형님. 우리도 조총을 만들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조총으로 무장하려는 것이오.”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면 굳이 말을 팔 필요도 없네. 조총을 내다 팔면 되지 않겠나.”

“그건 당장 장정들을 무장시키고 가란구륜 부족에도 공급해야 하오.”

“그게 그 말이 아닌가. 가란구륜 부족에 공급할 거면 당연히 값은 받아야지. 부족에 은광이 있으니 은으로 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부족에 조총을 공급하여 함께 대비할 것만 몰두하고 있었던 터라 대가를 받겠다는 생각은 못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맞다.

대가를 바라는 순간 우호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님. 족장의 둘째 아들이 소제와 형제의 연을 맺었는데 어찌 대가를 바라겠소.”

“이문을 얻자는 게 아니잖은가. 들어가는 재료비가 필요한데 구할 방도가 없다고 하면 무리가 없을 걸세. 조총의 필요성은 우리보다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으니 직접 만들 방도를 마련했다고 하면 오히려 더 좋아할 걸세.”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네요. 일단 족장과 아들들을 만나 봐야겠소. 왜구가 쳐들어온 사실도 알릴 겸.”

“이미 알고 있을 걸세. 그들이라고 눈이 없고 귀가 없겠나.”

족장도 조선에 사람을 풀어놓고 정세를 파악한다고 했었다.

조선 천지가 난리가 난 지금 왜구가 쳐들어온 걸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조선을 도와 달라고 하면 들어줄까 모르겠소.”

“조선의 청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걸세. 그동안 우리 조선이 여진에게 한 짓을 잊었는가? 여진이 약탈하면 몇 배로 갚아 준 것도 모자라 육진을 설치하여 도문강 밖으로 몰아내기까지 했잖은가.”

“가란구륜 족장과는 접점이 별로 없었기에 하는 말이오.”

“그도 여진족임엔 변함이 없네. 조선과 접촉할 생각을 않고 독자생존을 모색하는 것만 봐도 모르겠나. 속이 답답한 건 알겠지만 도를 넘는 부탁은 하지 말게. 자칫 우호적인 관계가 깨질 수도 있네.”

지금의 주상이나 신료들에게 뭐 바랄 게 있다고 조선을 도와 달라 오지랖을 부리겠는가.

다만 한성에는 외가가 있고 지인들이 살고 있기에 그들이 힘들어질까 염려하는 것이지.

“형님의 염려가 뭔지 잘 알았소. 그럼 소제가 가란구륜 부족에 갔다 올 동안 철원 심현사에 사람을 좀 보내 주시오. 전란을 피해 몸을 의탁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경흥 쪽으로 보내 달라고 전해 주면 되오.”

감사합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