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의 초여름 (3)
059화 녹둔도의 초여름 (3)
박이규는 상단의 재물을 쥐어짜서라도 화약을 준비해 보겠노라며 경흥으로 돌아갔다.
해인도 곧바로 가란구륜 족장을 만나기 위해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지금은 한시가 바쁜 때였기에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족장을 만나고 바로 경흥 도호부로 가서 한성의 소식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성에서 육진의 병력을 빼간다면 해인도 뭔가 대비를 해 놓고 있어야 한다.
건주여진의 누루하치가 육진이 비었다는 걸 알면 필시 그 틈을 노릴 것이기에.
왜군은 언젠가 물러나겠지만 여진족과는 영토싸움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았다.
누루하치가 세를 불리면 조선 강토는 물론 동해여진의 땅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복잡한 심경으로 가란구륜 부족을 찾은 해인을 맞이한 건 마침 사냥을 나와 있던 주을이었다.
오늘따라 주을이 왜 이리도 반가운지.
와락 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주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오. 설마 소관을 기다리고 계시었소?”
“사냥 나왔어요. 그런데 왜군 따위가 쳐들어왔다고 그런 초췌한 모습으로 오신 것인지요.”
해인의 마음과는 달리 주을의 눈빛에는 찬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눈만 멀뚱거렸다.
“조선에 비하면 티끌 같은 우리 부족도 조선처럼 그리 쉽게 뚫리지 않을 거예요.”
이미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조선을 동경한 주을로서는 왜군에 유린당할 정도로 허약한 조선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한심한 나라에서 국록을 먹고 있는 해인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을 터.
강해야만 살아남는 여진족 입장에서는 허약한 부족의 사내가 마뜩할 리 있겠는가.
스스로 돌아봐도 이런 말을 듣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그럼에도 질책만 하는 주을이 조금은 섭섭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하지만 왜군을 곧 물리칠 것이니 염려 마시오.”
“그럼 어서 왜군을 물리치고 당당히 찾아오세요. 소녀는 그대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아! 그래서···.”
주을이 왜 화가 났는지 이제야 감을 잡았다.
목매어 기다리던 사내인데 피곤함에 절은 채 말을 달려오는 모습을 봤으니 속에 천불이 났을 거였다.
나라가 풍전등화이니 필시 몸을 의탁하러 왔지 않겠는가.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마음을 연 건 아니었기에 실망이 더 컸던 것이리라.
“소관이 조선의 국록을 먹는 무관이기에 전혀 무관타고는 못하겠소. 하지만 왜군의 침범 따위로 의기소침하지는 않소. 힘이 다하면 어차피 물러날 놈들인데 뭘 그리 조바심을 치겠소. 감히 단언하건대 바다를 건넌 자들은 단 한 명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을 하는 해인에게는 범접 못 할 기세가 넘쳐흘렀다.
“아직은 기개가 살아 있군요. 그런데 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소녀의 가슴을 내려앉게 하시었소?”
그녀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철딱서니 없는 행동만 일삼던 그녀가 갑자기 커 보였다.
이제까지 보인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을의 또 다른 일면을 본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아 부끄러웠다.
“누렁개도 제 동리에서는 기세가 사는 법인데 하물며 제 나라 안에서 싸우는데 무엇이 두렵겠소. 무관의 소임을 다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이런 몰골이 되었소.”
“그렇게 경황없는 때인데 여긴 어인 일이에요?”
주을은 눈을 갸름하게 뜨고 찬찬히 살피더니 입가에 얼핏 미소가 서렸고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녹둔도에서 드디어 조총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렇게 달려온 것이오.”
조총을 만들 수 있다고 하자 주을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을 또한 신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놀랄 만도 할 것이다.
포도아나 왜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줄 알았던 조총을 직접 만들어 낼 줄이야.
그것만 있으면 건주여진이든 누구든 걱정할 게 없어진다.
“어머! 조선 장인들이 조총을 만들었다고요?”
“이미 만들어 놓은 걸 흉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다만 화약과 쇠붙이가 있어야 해서 그걸 구하는 게 관건이오. 그래서 족장님을 뵈러 온 것이오.”
“소녀는 그것도 모르고 괜히···. 어서 아버지께 가요. 조총을 만들었다고 하면 기뻐하실 거예요.”
* * *
조총을 만들 수 있다고 하자 족장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얼마나 기쁜지 해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그만큼 조총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철광을 발견했네. 그러니 염려 말게. 그런데 염초는 쉽게 구할 수 있으나 다만 유황을 구하는 게 문제일세. 왜국과 전란이 벌어졌으니 구할 길이 막막하구먼.”
화약이 있어야 조총이 기능을 발휘하는데 전란 중이니 조선이나 왜국 양쪽에서 엄격히 통제할 건 자명한 일이다.
예전에도 구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더 어려워진 것이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무릎을 쳤다.
“가만있자. 아주 못 구할 것도 아니네. 마침 바다가 풀렸으니 유황을 구할 길이 있겠어.”
“어디인데 그리 쉽게 말씀하시는지요.”
“자네가 말하는 무릉도원에서 바로 건너 보이는 섬일세. 와르타의 부락에서 배를 타도 한나절이면 닿을 거리이고. 거기는 왜국과는 상관없는 땅이네. 다른 부족이 몇몇 살고는 있지만 거의 비어 있는 섬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우리 부족도 그곳에 터를 잡으려고 했으나 춥기도 하거니와 겨우 내내 눈이 내려 포기했다네. 그 섬에 화산이 있다하니 유황을 구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런 섬이 있다니까 귀가 솔깃했다.
“섬의 규모는 얼마나 되오이까?”
“남북으로 길게 생긴 섬인데 조선 땅만큼이나 크다네.”
“그곳에 농사도 지을 수 있소이까?”
“한해에 겨울이 반인데 농사가 되려나 모르겠네.”
또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릉도원에서 지척 간이고 남쪽인 와르타 부락에서도 한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했다.
그리고 남북으로 길게 생겼다면 남쪽은 덜 추울 게 아닌가.
거기에 더해 화산이 있다면 유황도 풍부할 것이다.
세력을 키우기에 그만한 곳도 없다 싶었다.
“자네 눈빛을 보아하니 섬도 욕심이 나는가 보이.”
“화약의 재료를 쉬이 구할 수 있다면 추운 게 대수이겠소이까. 더구나 주인도 없는 섬인데 욕심을 낼 만하지요.”
“어째 점점 조선에서 멀어질 궁리만 하는 것 같네그려.”
그러고 보면 무릉도원이나 큰 섬이란 곳이 조선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긴 했다.
주인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그리된 것뿐 딱히 다른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힘을 기르려면 그만한 곳도 없지 싶어 그러하오이다.”
“그렇긴 한데. 고립된 곳에 터를 내리기는 그렇잖은가.”
“세상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는 포도아 사람들을 생각하면 섬이 꼭 고립되었다고 볼 수도 없지요.”
와르타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포도아 사람들이 일년 가까이 배를 타고 가란구륜 부족으로 교역을 하러 왔다고 했다.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배만 있으면 고립된 섬이라도 상관없음이다.
이제껏 다른 세상은 없는 듯 살았던 게 억울할 정도였다.
“자! 이제 조총을 많이 만들 궁리를 해 보세. 이틀이나 사흘에 한 개씩 만들어서는 별무소용일세.”
그 말은 맞다.
녹둔도의 장정들과 부족의 전사들이 사용하려면 당장 수백여 개가 필요한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 내겠는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거였다.
“부족에 쇠를 잘 다루는 이가 있다면 녹둔도로 보내 주시지요. 그러면 좀 더 많이 만들 수 있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가란구륜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 장담할 수는 없소이다.”
“그럼 이곳으로 데려오게. 녹둔도의 장정들과 함께 말일세. 당장은 왜군을 상대해야 하고 앞으로 건주여진까지 막으려면 자네들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네. 어차피 우리 부족의 일이기도 하니 여기에서 힘을 기르세. 나중에 각자의 길을 가더라도.”
이미 조선은 답이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왜국에도 유린당하는 판인데 더 뭘 바라겠는가.
“자네는 당분간 조선에 있어야 할 처지이니 휘하의 사람들만 보내게. 내가 잘 다독이고 있겠네. 그리고 가는 길에 은도 좀 가져가게나. 필요한 물품을 구하려면 은처럼 요긴한 것도 없을 것이네.”
해인은 족장과 헤어지며 큰절을 하고 나왔다.
자신을 이렇게 극진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한편으로는 주을의 배필로 보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해인이 조선 관리라는 우월적 자세로 대했음에도 크게 책망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고개를 숙이는 것도 무관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관은 당당해야 함이다.
이런저런 걸 떠나서 이젠 족장의 그늘 아래에서 뭔가를 도모해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너부죽이 큰절을 올렸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어 주었다.
그것으로 족장과 해인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주을과의 관계도 정립이 된 셈이었다.
하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 *
녹둔도의 장정들을 부족에게 보내는 등 동분서주한 끝에 경흥 관아에 도착하니 그동안 왜구는 충청도를 지나 한성 코앞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여진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 떨듯 한다던 신립 장군마저 충주에서 대패했다는 말에 맥이 쭉 빠졌다.
왜국은 수백 척의 배로 수만 명이 넘는 병력을 조선 땅으로 보냈을 것이니 일이만도 되지 않는 조선군이 무슨 수로 막아낼 것인가.
수없이 피어오르는 봉화 연기와 불빛을 바라보는 해인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겨우 한 달 만에 한성까지 올라온 왜군을 어찌 상대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주상이 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몽진을 떠난다는 소식까지 겹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한성을 버린다는 건 조정 신료들마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제 몇 되지도 않은 조선의 군사들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거였다.
넋 놓고 있다가는 지인들마저 사지에 놓이게 될 것 같았기에 철원 도호부까지만 가 볼 생각이었다.
단단히 준비를 마친 해인은 아탕게와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아탕게를 두고 가려 했으나 자신을 두고 가면 여진족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무슨 고집을 그리 부리느냐? 네가 있어야 장정들을 훈련시킬 게 아니냐.”
“나리께서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홀로 간다는데 어찌 따라가지 않겠소이까. 소인을 형제나 다름없이 대한다던 말은 다 헛말이었소?”
아탕게를 받아들이며 형제처럼 지내자고 했었다.
출중한 무예도 그렇거니와 한때는 족장의 후계자였던 신분인데 아랫사람처럼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탕게는 유난히 해인을 잘 따랐고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아탕게. 앞으로 너를 아우로 생각할 테다. 그러니 너도 나를 형으로 대해라.”
“전에도 그런 말을 했잖소. 그래서 소인은 항상 나리를 형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소인이니 나리니 하는 말을 말라는 뜻이다.”
“내게는 별 의미도 없는 말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소.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목도 있는데 여진 출신이 어찌 조선의 무관에게 형이라 부를 수 있겠소.”
그래도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젠 왕이 한성까지 버린다 하니 법도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형으로 불러라.”
“알았소. 앞으로는 형님이라 부르지요.”
“어째 형이라고 하면서 말투는 왜 그리 불퉁하냐. 그놈의 울뚝불뚝하는 성격이나 고쳐라.”
“태생이 그런 걸 어쩌오. 형님이 이해하시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대로 전방을 경계하며 속보로 말을 몰았다.
앞서가던 아탕게가 뒤를 돌아보며 화난 듯 입을 열었다.
“형님. 왕이 백성을 사지에 두고 먼저 도망을 갔다면 그게 과연 왕이라 할 수 있소?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은 게 아니오?”
“위급하면 몽진을 갈 수도 있는 게지. 죽을 자리에 고집부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
“소제의 아비도 부족을 떠날 때 부족장의 지위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떠날 수 있었소. 세상 이치가 그러한데 조선 왕은 그 이치조차도 모르고 있잖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형님. 왕이 스스로 물러났으니 이제 누가 칭왕을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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