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의 초여름 (4)
060화 녹둔도의 초여름 (4)
아탕게는 조선 왕이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았다는 걸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왕을 힐난하는 것 같았으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망조가 들었는데 왕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러다가 조선이 왜국에 쓰러지면 왜국의 왕에게 충성을 할 것이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어도 그랬잖소.”
“내란과 외란은 다르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만약 그리된다면 형님은 어찌하겠소.”
“조선을 떠나야지. 어찌 왜구 밑에서 살겠느냐.”
듣고 싶은 말을 들었는지 더 이상 입은 열지 않았지만 속으로 이상한 궁리를 하는지 혼자 웃었다가 인상을 썼다가 하는 양이 사뭇 묘했다.
그런 아탕게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해인은 아스라이 들리는 함성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이곳까지 왜구가 올라온 것인가?
이곳은 함경도와 강원도 접경인 안변 근처였기 때문이다.
“이 소리가 들리느냐?”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하시오. 소제의 귀에는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데.”
말을 뱉던 아탕게가 해인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봤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해인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건주여진 전사들을 상대할 때의 상황을 아무리 반추해 봐도 사람의 몸놀림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무슨 소리가 들렸소?”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어느 쪽이오. 소제가 확인하고 오겠소.”
“그럴 필요 없다. 같이 가 보자.”
왜구가 조선 천지를 유린하고 있는데 단둘이서 누구를 앞세우고 말고 할 게 있겠는가.
적의 숫자가 적으면 부딪치고 중과부적이라면 피하면 된다.
왜군과 조선군이 맞붙었다면 조총의 방포 소리도 들려야 하는데 이따금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소리가 들리는 근처로 은밀히 접근했다.
고함 소리가 나는 곳은 삼십여 호의 민가가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동태를 살피던 중 아탕게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이상한 복장을 한 놈들이 사람들을 도륙 내고 있소.”
“왜군들이다.”
피 묻은 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는데 조선의 환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도밖에 더 있겠는가.
복색이 다르고 체구가 왜소한 모습은 누가 봐도 왜구였다.
낫이며 도끼를 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왜군들이 도륙 내고 있었다.
조총을 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형님. 숫자가 몇 안 되는데 쓸어버립시다.”
“저놈들만 있는 게 아니다. 후속 부대가 또 있을 수 있다. 거기에는 조총 부대도 따를 것이고.”
흥분하여 잘못 나섰다가는 조총의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보다 왜군들이 벌써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철원 도호부도 이미 놈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아닌가.
머리가 아득해졌다.
“아탕게. 몸을 뒤로 빼자.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없다.”
“형님. 그래도 그렇지 이대로 물러나는 게요?”
“몇 사람을 구한들 이 전란이 끝날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을 어찌 끌고 다닐 것이냐?”
속으로 피가 끓었지만 몇 사람을 구하자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제부터는 감정에 치우쳐 움직일 게 아니라 냉정해져야 한다.
왜군과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니까.
* * *
어제부터는 말을 달릴 수도 없게 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만한 곳은 사방이 왜군들 천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산에서는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 말을 달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속도가 빨랐다.
해인은 당장 말을 버리고 산길을 달리고 싶었지만 아탕게가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아탕게. 내가 아침저녁으로 가부좌를 틀고 하는 수련을 봤을 테지. 네게도 그걸 알려 줄 생각인데 한번 해 볼 테냐?”
“불편한 자세로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을 참는 것도 수련이오?”
“태식호흡이라는 수련이다.”
“그걸 수련하면 정말 형님처럼 무지막지하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오?”
“내가 그렇게 무지막지해 보이더냐?”
“소제의 눈에는 형님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소.”
해인의 몸놀림이 전광석화 같고 기감이 뛰어난 이유는 태식호흡 외에도 문수보살을 자처하는 노스님과의 기운이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콕 꼬집어 이것이다 하고 내세울 것도 없었다.
막연하나마 미증유의 힘이 자신의 몸에 작용하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문수보살을 만난 이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해인을 강하게 만든 건 누가 뭐래도 태식호흡이었다.
“배워 보겠느냐?”
“형님처럼 될 수 있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해 보겠소. 그래야 형님의 뒤를 지켜 줄 게 아니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익히고 나면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눈과 귀가 뚫려 십 리 밖의 움직임도 보고 들을 수 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탕게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조금 보태었다.
그러자 아탕게는 당장이라도 알려 달라고 매달렸다.
“중도에 포기하면 내 아우가 아니니라.”
“걱정 마시우. 소제의 끈질김은 경흥에서도 알아준다오.”
이미 철원도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라 서두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늘은 일찌감치 갈 길을 접고 아탕게에게 태식호흡이나 알려 줄 생각이었다.
가뭄으로 쥐 오줌만큼의 물이 흐르는 개울에 앉은 둘은 이내 태식호흡의 삼매경에 빠졌다.
수십 차례 호흡을 반복하던 아탕게가 몸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이렇게 하는 게 과연 효과가 있는 게요?”
“넌 첫술에 배부른 적이 있느냐? 지금의 나를 보면 알 게 아니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탕게는 태식호흡을 하면 당장 달라지는지 알았던 모양이다.
체계적으로 무예를 익히지 않았던 탓이었다.
여진족의 무예가 체계적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문자가 없어서였겠지만.
말로만 전해지는 구전은 몇 대만 지나면 변형되기 마련이다.
무술이 발전할 수 없는 토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진족이 무서운 존재로 자리매김한 건 말이라는 대체 수단과 잔인무도한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자지 말고 밤새도록 매달려 봐라. 내일 아침에는 뭔가 달라져 있을 게다.”
“정말이오?”
최소한 몇 개월은 지속해야 조금의 진전을 볼 수 있는 게 태식호흡인지라 당분간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걸 본인의 노력 부족으로 밀어붙이려는 의도였다.
혹시 아는가, 죽기로 매달리면 해인보다 성취가 빨라질지.
해인도 그렇게 매달려 본 적이 없었으니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컸다.
아탕게가 수월하게 익히면 해인을 따르는 장정들에게도 알려 줄 생각이었다.
* * *
안변에서 왜구를 만나고 며칠 뒤에 심현사에 다다랐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대웅전과 요사채가 모두 불타 없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절을 태워 뭐 얻을 게 있다고 그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 왜군들이 이 절에 원한이라도 있었던 게요?”
“스승님과 사형들이 왜군들과 부딪친 것 같지는 않은데···.”
왜군이든 사형들이건 사람이 상했으면 혈흔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왜군들이 절에 들이닥치기 전에 빠져나간듯 보였다.
무예가 남다른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라면 그냥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아랫마을로 내려 가보자.”
“절 아래에 마을이 있었소이까?”
“보개마을이란 곳이 있다.”
조심스레 보개마을로 접근했으나 마을 어귀에 가까워졌음에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보개마을도 초토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보개산 자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왜군들이 왜 이리 철저히 불태워 버렸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난장판이면 시신 몇 구 정도는 보여야 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런 결과는 마을 사람들이 떠나고 난 후 왜군이 들이닥쳐서 불을 질렀다는 얘기인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마을을 불태웠을까.
임시 숙소로 사용해도 될 것을.
마을 사람들이 왜군이 닥칠 걸 미리 알고 있을 리는 없고, 보현 스님을 따라 어디론가 피신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 왜구와 일전을 치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군과 맞상대할 사람이 보현 스님과 사형들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다.
“아탕게. 주변을 살펴보아라.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면 흔적이라도 남겼을 게다.”
“예. 형님.”
“왜군이 보이면 상대하지 말고 즉시 되돌아오고.”
짐승을 곧잘 사냥하는 아탕게라면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였다.
아탕게가 말을 타고 마을 인근을 수색할 동안 해인은 집집마다 일일이 확인했다.
혹시 단서를 찾을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아무리 뒤져도 왜군과 부딪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타다 반이나마 남아 있는 집이 눈에 띄어 샅샅이 뒤진 끝에야 내린 결론이었다.
잠시 후 아탕게가 돌아왔는데,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숫자가 일백여 명이 넘는데 한꺼번에 움직였음에도 흔적이 없다는 게 의아했다.
하다못해 찢어진 옷자락이라도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야 정상이다.
혹시 심현사로 갔다가 스님의 인솔로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을까?
보개마을에서 심현사로 올라가는 길은 큰 돌과 자갈들로 인해 풀이 별로 자라지 않아 그길로 갔다면 흔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보개산 중턱에 자신이 수련하던 장소가 언뜻 생각났다.
그곳이라면 충분히 피할 만한 장소였다.
아무나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아탕게. 말에 타라. 짚이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다시 심현사로 말을 몰아 순식간에 보개산 자락에 닿았다.
아탕게에게 말을 맡기고 혼자 산을 올랐다.
산을 타는 건 해인을 따라올 사람도 없거니와 말을 타고 오를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해인은 날듯이 수련 장소로 뛰어올랐다.
한 식경 후 수련 장소에 다다랐으나 거기에도 사람들이 없었다.
도대체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
잠시 후, 해인이 낭패한 표정으로 산을 내려오자 아탕게도 한숨을 푹 쉬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아무 성과도 없었으니 그 또한 맥이 빠졌던 것이다.
“형님. 다들 왜군들에게 끌려간 건 아닐까요?”
“스승님이나 사형들이 호락호락 끌려갈 사람들이 아니다. 이곳까지 왜군들이 들이닥쳤으니 아마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피했을 게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부딪쳤다면 낭패를 봤을 것이므로.
다행인 것은 대웅전 마당이나 어디에도 피를 흘린 흔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 어쩌지요?”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다. 이곳에 온 김에 한성이 어찌 되었는지 그것만 알아보자.”
“한성으로 가시려고요?”
“포천까지만 가 보자. 거길 가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게다.”
충청도에서 신립 장군이 패했다면 이미 한성은 왜군의 손에 들어갔을 거였다.
그만큼 걸출한 장군이 패할 정도인데 왜군을 막을 장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성의 외가는 어쩌고요?”
“외조부 성격에 그냥 있을 분이 아니다. 일단 몸을 피한 후 사병이라도 양성하실 분이다.”
조선의 정규군도 패했다면 믿을 건 재물이 많은 양반들이 관군을 대신하여 사병을 길러 왜군을 상대하는 길밖에는 없다.
집안의 종들이나 흩어진 관군을 모아 왜군을 상대할 자는 낙향한 벼슬자리들이나 양반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외조부의 성품상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형님. 그럼 승려들도 왜군의 무도한 짓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게 아니오. 형님처럼 무예를 익힌 승려들이 있다면 어딘가에 모이지 않겠소?”
“승려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란 중에 중들이 염불만 외우고 있지는 않을 거였다.
해인 자신도 장정들을 모아 대비를 하고 있는 판인데, 중들이라고 생각이 없겠는가.
중들이 많은 곳이라면?
금강산 건봉사가 언뜻 떠올랐다.
보현 스님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했던 곳이 아닌가.
그곳은 수백여 명의 중들이 기거하는 거찰이므로 거기에 갔을 가능성도 있음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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