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의 초여름 (5)
061화 녹둔도의 초여름 (5)
포천 고개를 막 넘어섰을 때 남부여대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갓을 쓴 양반 차림도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시오?”
“한성에서 오는 길이외다.”
바짝 여위었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한성을 떠나올 정도라면 어떡하든 살겠다는 의지일 터.
삼십 세는 족히 넘어 보였는데 태어나서 이렇게 먼 곳까지 움직인 것도 처음이리라.
그를 보니 허인회가 생각났다.
“왜군들이 벌써 한성에 다다른 것이오?”
“한성은 이미 왜군들의 손에 넘어갔소. 금상이 도성을 버렸는데 누가 지키고 있겠소.”
경황없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던 것이다.
한성 판윤인 김인수 대감도 주상을 따라갔을 거였다.
김 대감의 인품으로 볼 때 도성을 지키려 했겠지만 왕이 몽진을 결정했다면 달리 방법이 없었을 터.
“주상 전하께서 한성을 그리 쉽게 포기하실 리가···.”
“그대는 누구이기에···.”
한성을 버린 왕을 아직도 예우하는 작자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양반이 되물었다.
“무반이오. 공무로 함경도에 갔다가 전란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가는 길이오.”
“그럼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구려?”
“그래서 한성으로 급히 가는 것이오.”
“지금 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오. 새로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한성을 지킨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소. 세자마저 피난길에 올랐기에 나도 한성을 떠난 것이외다. 동래에 상륙한 지 이십 일 만에 한성까지 뚫리다니 이게 말이 되오? 아하! 이제 조선은 어찌 될지···.”
깡마른 선비는 말을 잊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혔다.
이십 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었다면 철원 도호부나 안변 쪽에 왜군이 지천으로 깔린 게 납득이 되었다.
왜국 입장에서는 왕만 잡으면 전쟁에서 승리하기에 도주할 만한 곳으로 급히 군사들을 전개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왜군의 진로에 놓여 있는 곳만 유린되었을 뿐 대부분은 멀쩡하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조선군이 지리멸렬해도 한 달 만에 조선 전부가 왜군의 손에 떨어질 리는 없다.
“주상 전하가 평양으로 몽진한 게 확실하오?”
“돈의문으로 빠져나가는 걸 내 눈으로 봤소이다. 금상의 몽진을 막으려고 뜻이 맞는 선비들과 지키고 섰었소. 백성들 중에는 돌팔매질도 서슴지 않았다오.”
돈의문은 도성의 서쪽 대문인데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래도 정신이 똑바로 박힌 선비들이 있었던 모양인지 거기를 지키고 섰다는 게 아닌가.
한성을 버리는 걸 만류하려고.
그런 와중에 한성의 백성들도 들고일어나 돌팔매질을 했다니까 정신이 아득했다.
이미 왕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이다.
구심점이 되어야 할 왕이 먼저 한성을 버리는데 어느 누가 조선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겠는가.
문제는 왕이 평양으로 몽진했다는 데 있었다.
평양도 위태로우면 의주로 옮길 것이고 여차하면 명나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 살길만 생각하는 왕에게 더 기대할 것도 없지만 세자마저 피난을 떠났다면 왜군과 싸울 의지가 꺾일까 걱정이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갈 궁리나 하는 왕이 과연 앞으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당장 해인도 속으로 육두문자를 뱉고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 * *
더 기대할 것도 없어서 말을 북쪽으로 돌렸다.
왜군의 선발대가 파죽지세로 들이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격 진로에 있는 관아에만 해당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추측하는 건 아직까지도 봉수대의 봉화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왜군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얘기였다.
각지에서 저지하고 방해한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군들도 진이 빠질 것이다.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에만 전념하면 언젠가는 이 전란도 종식되지 않겠는가.
말을 달리면서도 줄곧 왜군을 저지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 이러다가 걸어가게 생겼소. 잠시 쉬었다 가오.”
말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입 주변에 거품이 배어 나왔고 잔등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말 못 하는 짐승을 이리 혹사시켰으니 나중에 극락왕생하기는 글렀구나.”
“생목숨을 그리 끊어 놓고도 극락왕생할 생각을 하셨소?”
건주여진 전사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부처님이 다 내려다보시겠지. 놈들은 죽어 마땅한 짓을 했기에 내가 대신한 것이야. 이번에는 왜군들이 그 대상이고.”
“그렇기는 하네요. 무던히 넘어와서 칼부림을 했으니 말이오. 이제 형님이 칼을 빼셨으니 왜구들의 피가 내를 이룰 것이오. 소제도 한팔 거들 것이니 뒤로 빠지라는 말은 마시우.”
“태식호흡이나 부지런히 하여라.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아우가 나서기 싫다 해도 앞장세울 거니까.”
지금 실력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충분히 제압할 수준이긴 했지만, 태식호흡으로 인해 감각이 더 예민해지면 일당백의 전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수련에 매진하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정말 이런 호흡이 도움이 되는 게요? 도무지 진척이 없어서···.”
“의심하면서 수련하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수련이겠느냐? 무조건 해 봐. 내 친우도 한 달 만에 몸이 달라졌다고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김민혁의 근황도 궁금했다.
용양위 소속이라 한성 방어에 투입되었을 건데, 과연 무사한지.
미련한 친구가 아니어서 그리 걱정할 건 없지만 조총 앞에서는 아무리 무예가 출중해도 별무소용이기에 하는 말이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총이 제 기능을 못 하려면 빨리 장마가 와야 하는데 몇 년간 계속된 가뭄이 올해라고 비켜 갈지 모르겠다.
“알았소. 태식호흡을 열심히 수련할 테니 소제를 꼭 일선에 세워 주시오.”
“조총이 두려워서 그런다. 그걸 감당할 방법이 없는데 어찌 나서라고 하겠느냐.”
“형님. 두꺼운 방패만 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소. 소제가 조총으로 시험해 보았소이다.”
“정말이냐? 조총이 방패를 뚫지 못한단 말이냐?”
“그렇소. 두꺼운 방패를 앞세우면 되오. 만약 방패가 약해 뚫린다 해도 쇠 구슬이 힘을 잃어 치명상은 입지는 않을 것이오.”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였지만 엄청난 무게의 방패를 들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무게가 만만찮아 쇠 구슬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쉽게 옮길 수나 있을지.
어떻든 두꺼운 방패만 있으면 쇠 구슬의 위력이 약해진다는 점은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쇠 구슬을 방패로 막을 수 있다니까 다행이다만 언제까지 방패 뒤에 숨어 있을 것이냐. 조총을 쏘기 전에 무력화시킬 방도가 있어야지.”
“그러면 기마전은 아예 꿈도 못 꾼단 말이오?”
“조총 앞에서 말을 몰고 달려드는 건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북변에서 이름을 날리던 신립 장군이 충청도에서 패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필시 자신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충청도로 내려갔을 것이고,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벌판에서 일전을 벌이다 당했을 거였다.
해인 자신도 가란구륜 부족이 갖고 있는 조총을 보지 않았다면 신립 장군과 같은 우를 범했을 것이니까.
“형님. 그럼 왜군을 상대할 방법은 결국 숨어 있다가 들이치는 수밖에는 없겠소.”
“당장에는 그 수밖에 없다. 호쾌하게 싸우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염려 마시오. 형님. 여진 전사가 숨어 있다가 들이친다는 게 창피한 일이나 조총 때문에 그러는 것이니 어쩌겠소.”
“살아남으려면 체면 따위는 잊어버려라. 우리도 조총으로 무장하면 놈들은 결코 바다를 다시 건너지 못할 것이다.”
* * *
산길로만 나아가는 게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녹음이 짙어져서 시야 확보가 안 되어 긴장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왜군들이 요지라고 생각하는 곳에 진을 치고 있을 수 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연전에 보개산에서 조우했던 왜구의 간자들이 산골 마을까지 일일이 조사하는 치밀함을 생각하면 산길이라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인의 기감이 남다르다고는 하나 이백 보까지 날아가는 조총 앞에서는 별무소용이었다.
안변 근처를 지나다가 대여섯 가옥이 있는 마을을 지나칠 때였다.
십수 명의 왜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고 가옥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지만 당장 눈앞에서 벌어질 참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마침 왜군들의 숫자도 몇 되지 않는 점도 둘의 발걸음을 붙잡은 이유였다.
“형님. 저놈들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해치웁시다.”
“조총이 문제다.”
“겨우 네 명만 조총을 갖고 있소. 소제가 활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소.”
조총을 방포하려면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는 등 절차가 꽤나 복잡하다.
그럴 동안이면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해인이 표창을 꺼내 들었다.
왜구의 간자에게서 뺏었던 물건이었다.
그동안 틈틈이 표창을 던져 보았기에 두 명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먼저 우측의 둘을 활로 처리해라. 나머지 둘은 내가 처리하겠다.”
“형님. 표창을 날릴 거리가 아니요.”
“내 걸음이면 놈들이 조총을 겨누기 전에 다가갈 수 있다.”
마을 가까이 접근한 후 아탕게가 막 시위를 놓은 것과 동시에 해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빠르기가 전광석화 같아서 왜군들이 해인을 발견하고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아탕게의 화살이 왜군의 가슴팍을 파고드는 걸 보며 해인도 표창을 날렸다.
첫 번째 표창은 조총을 들고 있는 왜군의 목을 파고들었다.
끄르륵 소리는 내며 목을 부여잡고 있는 놈을 일별하고 두 번째 표창을 날렸다.
기묘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표창이 또 한 명의 얼굴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막 등을 돌리고 달아나려던 왜군의 등짝에도 화살이 깊숙이 박혔다.
아탕게가 두 번째의 화살을 날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허둥대고 있는 왜군을 향해 환도를 꺼내든 해인이 불쑥 다가서며 위에서 아래로 베어나갔다.
일도양단, 어깨 어림에서 복부까지 베어진 왜군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견갑까지 한꺼번에 잘린 모습은 전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감정 없는 얼굴로 일절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야차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왜군 다섯을 베었을 때 아탕게도 합류하여 칼춤을 추었다.
왜군들은 몸이 얼어붙었는지 이렇다 할 공격조차 못 했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이후 처음 맞이한 변고였던 것이다.
그동안 도망가기 바쁜 조선군만 상대하였으니 제대로 된 전투도 없었을 거였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자는 이들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였는데 제법 날카로운 검술로 응대했으나 해인의 상대는 못되었다.
그자마저 일합에 베어 낸 해인은 조금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이들의 검술을 엿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반 식경도 되지 않아 왜군 열여섯을 도륙 낸 둘의 숨소리는 평상시보다 조금 더 거칠어졌을 뿐이다.
상대가 약하기보다는 기습적으로 들이친 둘이 압도적으로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부림이 끝나자 한쪽에서 오돌오돌 떨던 마을 사람들 중 노인 하나가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장사님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조금만 늦었어도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오.”
“보잘것없는 관직에 있는 사람일세. 북변으로 가는 길에 우연찮게 도운 것뿐일세. 마을 사람들 중 죽은 이는 없는가?”
관직에 있다고 하자 노인의 머리는 더욱 숙어졌다.
아직 벼슬아치에 대한 반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예. 나리.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사옵니다.”
“놈들이 왜 마을을 불태우려 했는가?”
“곡식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다 눈에 차지 않으니까 불을 질렀사옵니다.”
“곡식이 다 떨어졌는가?”
“아니오이다. 왜구가 쳐들어왔다기에 미리 마을 뒷산에 숨겨 놓았나이다.”
“다행일세. 어서 곡식을 챙겨 이곳을 떠나게. 북쪽으로 가면 살길이 있을 걸세.”
“감사하옵니다. 나리. 이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을 데려가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해인 덕분에 당장의 참변을 모면했겠지만 전란 중에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하늘만 알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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