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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63화 (63/130)

반격의 실마리 (1)

063화 반격의 실마리 (1)

아탕게가 땀을 줄줄 흘리며 숙소로 들어왔다.

조선 장정들의 훈련을 봐주고 오는 길인 것이다.

해인의 숙소는 족장의 집과 붙어 있는 별채였다.

별채라고 그리 대단한 건물도 아니었다.

벽은 통나무로 대충 얽었고 지붕은 널을 켜서 이어 놓은 형태였다.

해인이 묵고 있는 객사나 다름없는 별채도 거기서 거기였다.

비를 피하고 추위만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내부 구조도 조선과는 사뭇 달라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형님. 더운데 골방에서 뭘 하시오.”

“함경도 각 군현의 관군들 숫자를 기록하는 중이다.”

이번에 조선을 갔다오면서 아직 왜군이 들이닥치지 않은 목부군현의 관군들을 면밀히 살폈었다.

왜군들과 싸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이기 때문이다.

“금방 무너질 관군을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지방 수령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형님. 너무 기대하지 마시오. 소제가 볼 때에는 있어 봐야 별 도움도 못 될 것 같더이다.”

피죽도 제대로 먹지 못한 몰골인 채 관아 담벼락에 초점 없는 눈빛으로 기대앉아 있던 관군들을 해인인들 못 봤겠는가.

그나마도 군역을 치르고 있던 정병들이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죽기를 각오한 눈빛은 아니지만 창을 들었다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왕이라는 자는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넘어가지 못해 안달인데 말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관군들이 호응해 주면 놈들의 보급로라도 끊을 수 있을 게다.”

“왜군들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식량을 털고 있는 걸 못 봤소? 놈들이 조선에서 식량을 구할 생각으로 온 것 같은데요.”

“몇천 명이면 현지 조달이 가능하겠으나 몇만 명이라면 본국의 보급이 없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관군들이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소. 조총 앞에 허접한 관군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아탕게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조선 백성 전부가 일어서면 왜군 몇 십만도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왜군들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고 피로가 누적되었을 것이니까.

해인이 대답을 않고 또 골똘해 있자 아탕게가 화제를 바꾸었다.

“형님. 올여름은 유난하오. 왜놈들도 이 더위에 무척 고생할 것인데 말이오.”

“그놈들은 우리 조선보다 더 남쪽에서 살다가 온 놈들이야. 이 정도 더위에는 꿈쩍도 안 할 게다.”

“그럼 잘되었네요. 겨울까지 기다리면 저놈들이 한 발짝도 못 뗄 게 아니오. 이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의 겨울도 어지간하잖소.”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겨울까지만 버티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힘이 났다.

보급로를 차단하고 추위가 닥쳐오면 왜군들도 지리멸렬할 것이므로.

물론 그때까지 과연 조선이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지금처럼 왜군들이 저렇게 주춤거려 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장쇠와 억삼이를 좀 봐야겠다.”

“이리로 데려올까요?”

“아니다.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대장간으로 가자.”

지금은 당장 조총을 많이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하루에 한 정을 만드는 것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빨리 더 많이 생산해야만 조총 부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삼백 정만 있어도 왜군들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을 것이기에.

* * *

조총을 만드는 곳은 족장의 맏이인 와르타의 부락이었다.

마침 철광산이 바다 쪽 산맥에 접해 있었고 외적이 쳐들어와도 바다로 피신할 수 있는 장소였기에 그리로 정했다.

바다와 면해 있고 배가 있어서 그만큼 운신의 폭이 넓었다.

주을도 큰 오라버니가 유황을 구하러 섬에 갔기에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족장의 자식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에 주을이 부락을 머물고 있는 거였다.

자유분방한 여진족들을 통제하려면 구심점이 될 자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한 줌도 안 되는 부족도 이러한데 조선의 왕은 백성과 도성을 지킬 생각은커녕 명나라로 피신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해인과 아탕게가 와르타의 부락 근처에 나타나자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주을이 말을 달려 나왔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이들의 경계는 참으로 대단했다.

부락과 한나절 거리라면 어김없이 경계를 서는 전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틀 사흘거리까지도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간 별고 없으셨소?”

“무사히 다녀와서 기뻐요.”

주을의 말에 해인은 잠시 감동했다.

기쁘다는 표현을 하다니,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내놓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의 염려 덕분이오. 그런데 와르타 형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소?”

“유황을 채취하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나 봐요.”

“별고 없겠지요?”

“그럼요. 어서 부락으로 가요. 자랑할 게 많답니다.”

살짝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 작은 볼우물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원래 볼우물이 있었는데 이제껏 안 보여 줬었나? 저게 감춘다고 감춰질 수 있는 건가?’

주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세상에,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니.

수줍어하는 모습까지도 어쩌면 이리 예쁠까.

주을의 밝은 얼굴을 보고 나니 그동안의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선은 풍전등화인데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해도 되나 싶었다.

* * *

길주 관아에 있던 식솔들을 데려다준 후로 장쇠의 얼굴은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자칫 위험한 상황에 노출 되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을 데려다주었으니 그러하리라.

아마 억삼이가 길주에 있었다면 지금쯤 병장기를 만들어 대거나 다른 곳으로 불려가서 고생할 수도 있을 거였다.

물론 이곳도 바쁘고 고생스럽긴 하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고, 거기다가 강제로 하는 일도 아니니만치 비록 몸은 고달프나 마음만은 편안할 것이다.

대장장이는 관노비나 다름없이 취급받는데 반해 이곳에서는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으니 얼굴이 밝을 수밖에.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든 장쇠는 해인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 나와 부복했다.

“나리.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자네도 잘 있었는가? 억삼이도 잘 지내고?”

“잘 있다마다요. 나리의 은혜를 갚는다고 아주 열심입지요.”

“억삼이가 조총을 많이 만들었다기에 단숨에 달려왔네.”

“예. 나리. 지금까지 서른 정 넘게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이틀에 세개는 만들 수 있답니다. 제 자식 놈이지만 참으로 신통한 놈입니다. 조총을 빨리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죠.”

“어떤 방법을 썼기에 그렇게 빨리 만들 수 있는가?”

“일을 나누어 하도록 했습니다. 소인과 나머지 대장장이가 각자 잘하는 것을 만든 후 끼워 맞추니까 월등히 속도가 빨라진 것입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니까 장쇠가 해인을 대장간 안으로 이끌었다.

억삼이 뭔가를 하다가 해인을 보더니 넙죽 엎드려 절한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노비도 아닌데 이럴 필요는 없다.”

“나리의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미처 감사도 못 드렸기에···.”

“됐다. 너와 어미를 데려온 건 내게 이롭자고 한 짓이다.”

“소인의 어미와 누이까지 구해 주신 은혜 머리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드려도 모자라옵니다.”

“그만 되었으니 조총을 어찌 만드는지 보여 다오. 앞으로 더 많이 만들 방법이 있다니까 참으로 흐뭇하구나.”

“예. 나리.”

억삼은 한 사람이 모든 조총의 부품을 만들던 것에서 벗어나 총신과 격발 장치인 방아쇠와 화약 접시 등을 대장장이의 실력에 따라 한 가지만 계속 만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각각의 부품이 더 정교해지고 작업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고 한다.

이런 부품을 모아 최종적으로 끼워 맞추는 건 억삼이 맡았다는 거였다.

조립 과정에서 잘 맞지 않는 부분은 억삼이 직접 수정함으로써 시간도 단축하고 명중률이 높은 조총으로 거듭났다고 했다.

앞으로 숙련도가 올라가면 더 빨리 만들 수 있다며 얼굴을 붉혔다.

“참으로 장하다. 나누어서 만드는데 이렇게 좋은 효과를 낼지 누가 알았더냐. 억삼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아닙니다. 나리. 이렇게 대우받으며 일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대량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으니 당연히 상을 받을 만하다. 이게 조총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서 더욱 그렇구나.”

조선의 장인들이라면 누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각자 잘하는 것만 만들어서 나중에 조립만 하면 되는 방법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조총뿐만 아니라 다른 걸 만들 때도 적용하면 더 빨리 만들어 낼 수 있을 게 아닌가.

“혹시 일하는 데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하여라. 내 아낌없이 지원해 주마.”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다만 손재주 좋은 사람을 더 구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사람이 부족하더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듬기 등은 소인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러합니다.”

해인의 눈에는 전부 다 중요해 보였지만 장인들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을 터다.

“얼마든지 사람을 구해 주마. 명중률이 높은 조총만 많이 만들어 다오. 그래야 조선이 살고 우리가 산다.”

“예. 나리. 염려 마십시오. 소인이 좀 더 노력하여 더 많이 만들도록 하겠나이다.”

“급한 일이 끝나면 글도 익히도록 해라. 내가 글 선생을 붙여 주마.”

이렇게 영민한 아이가 글을 익힌다면 더 좋은 물건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고 나리. 대장장이가 글을 익히다니요. 치도곤을 맞을 일입니다.”

장쇠가 펄쩍 뛰었지만 억삼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글을 익히고 싶었던 모양이다.

“예. 나리.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억삼은 사양치 않고 바로 받아들였다.

머리가 명석한 만큼 배우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고 세상의 이치도 알고 싶었으리라.

세상의 이치를 아는 길이 꼭 글만은 아니겠으나 글 속에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놈아. 바랄 걸 바라야지. 어째···.”

“이보게. 장쇠. 글을 익히면 더 많은 걸 생각하게 되네. 결과적으로는 사람에게 이로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양반들이 알면 치도곤을 맞을 일입니다.”

양민도 글을 익힐 수 있으나 그럴 여유가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관에 예속된 대장장이가 글을 익히려 한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것이다.

“여기에 양반이라고는 나밖에 없네. 내가 그러라 하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그리고 글을 알면 세상의 이치도 깨닫게 되어 더 기발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고 보네. 그게 곧 백성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글을 익히면 인의예지를 알게 되고 매사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이다.

머리가 깨어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망치질만 하지는 않을 게 아닌가.

억삼이 글을 익히고 나면 훨씬 더 나은 물건을 만들 것으로 해인은 확신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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