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의 실마리 (3)
065화 반격의 실마리 (3)
아탕게의 식솔들은 누루하치에게 패해 갈 곳이 마땅치 않자 조선으로 귀화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평화를 구가할 것 같던 조선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아탕게. 지금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자. 한 줌도 안 되는 무력이지만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는 된다. 조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자는 말이다.”
“우리만으로 가당키나 한 일이요?”
“기다려 봐라. 곧 조선 곳곳에서 뜻 있는 양반들이나 낙향한 선비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대로 지리멸렬했다가는 정말 조선은 끝이었다.
조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이곳에서라도 보여 줘야 할 때였다.
그래야 왜군들도 생각을 달리할 것이니까.
“알았소. 형님 말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봅시다. 그래도 역부족이라면 소제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길 바라오.”
“고맙다. 네가 뭘 염려하는지 잘 안다. 네 말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으마.”
녹둔도에 도착한 해인의 의병들은 수시로 도문강을 넘어 경흥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의병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각자의 말에 작은 깃발을 꽂고 다녔는데, 의병의 의(義)라고 쓴 깃발을 본 백성들은 하나같이 벅찬 얼굴이었다.
일부 장정들은 의병이 되기 위해 뒤를 따르기도 했다.
“형님. 의병이 되겠다고 따르는 이들을 어찌할까요?”
“의기는 높이 살 만하나 너무 허약하다. 몇 달을 훈련시킨 장정들도 아직 어설프거늘....그리고 저들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할지도 의문이고.”
“그렇기는 하네요. 당장이야 따르겠지만 조선을 떠나야 할 상황이 되면···.”
“아우가 보고 될성부른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라.”
“그러리다.”
그렇게 선별하여 녹둔도에서 땀을 흘리는 의병이 벌써 일백이 넘었다.
그사이에 괄목할만한 소문이 떠돌았다.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일차로 원군이랍시고 국경 수비대를 보내어 평양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는 소문이 도는 등 사방에서 왜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때는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그동안 만들어 낸 조총도 사십 정이나 되어 새로 들어온 장정 일백을 제2군으로 삼아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는 제1군이 된 기존 장정들은 한층 더 믿음직하게 변모해 있었다.
* * *
회령으로 돌진한 왜군이 건주여진의 공세에 낭패를 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힘입은 건주여진의 누루하치가 조선 조정에 원군을 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 거절했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명나라에서 1차로 국경 수비대가 들어왔고 추후에 정군을 보내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령에서 평안도 북부를 넘지 못한 왜군이 경원과 경흥으로 온다는 소문에 다들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형님. 1군과 2군을 합치면 이백이오. 충분히 대적할 만하오.”
“한 달도 안 된 장정들은 내놓기가···.”
“한 달이지만 이젠 조총을 공깃돌 다루듯 하오. 그러니 실전에 투입해도 충분할 것이오. 왜군과 직접 부딪치는 건 1군도 2군도 처음이긴 마찬가지가 아니오.”
사실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더 전장에 있으면 사기가 올라간다.
아주 맹탕은 아니기에 뒤를 받쳐 주는 역할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맞다. 전장을 겪어 봐야 진정한 병사가 되는 법이다.”
“형님. 그럼 제2군도 삼 인 일 개 조로 나누겠소. 나중을 위해서도 진용을 갖추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게 하자. 조총이 조금 부족하나 금방 보급이 될 게다.”
조총은 이제 이틀에 세 정씩 만들어 내고 있었기에 보름이면 너끈히 제2군을 무장시킬 수 있다.
이젠 더 재고 말고 할 때가 아니었다.
조선이 살아 있음을 왜군에게 각인시켜야 할 때였다.
해인 자신으로 인해 들불처럼 의병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왜군의 칼에 죽어 나간 이 땅의 불쌍한 백성들만 안타까울 뿐.
이 땅을 유린한 왜군들은 결코 곱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해인의 결연한 표정을 보던 아탕게가 숨을 헐떡였다.
“형님! 견디기 어렵소.”
“살기를 뿌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
“형님의 기운이 너무 강하오.”
“그걸 느낀단 말이냐?”
“잘 모르겠소. 그냥 가슴이 답답하오.”
아탕게의 태식호흡도 이젠 제법 길어진 것 같았다.
태식호흡 전에도 이미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지만, 방금처럼 미세한 기운을 느낄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식호흡의 영향이다. 숨을 얼마큼 참을 수 있느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데 어찌 셈을 하오? 그냥 무턱대고 참고 있소. 그랬더니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는 시간이 길어진 것 같소.”
무아지경에 빠졌다는 얘기였다.
불과 석 달 남짓에 그걸 느꼈다면 대단한 자질이다.
질투가 날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이런 기재가 자신의 뒤를 받쳐 준다면 뭔들 못할까.
“참으로 대단하다. 너는 타고난 무재인가 보구나.”
해인의 칭찬에 아탕게는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소제가 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아우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구나.”
태식호흡의 입문자라 해야 사형들과 친우인 김민혁이 전부지만 아탕게의 자질은 확실히 그보다는 뛰어났다.
“아직 형님 발끝에도 못 미치는데 무슨 말씀이오.”
“너는 이미 무예를 익힌 몸이니까 그만큼 성취가 빠른 게다. 더 정진해 봐라. 네 목숨을 연장해 주는 길이다.”
태식호흡이 해인만큼 되려면 지난한 수련을 해야겠지만 반만 따라와도 남다른 기감을 얻게 되는 건 물론 신체의 불균형을 바로 잡고 상처도 쉬이 낫게 해 준다.
더구나 뛰어난 기감은 곧 여벌의 목숨을 갖는 것이나 같다.
살기를 남보다 빨리 느낀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탕게가 하루라도 빨리 그런 경지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왜군들이 진군할 길목에 미리 도착한 해인은 제1군을 자신이 맡고 아탕게에게는 제2군을 맡겼다.
이곳은 회령과 종성, 경원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였다.
경원은 녹둔도가 있는 경흥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도호부이다.
회령에서 경원으로 오려면 이곳 종성의 고개를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
왜군들은 회령을 거쳐 장백 쪽으로 진군하다가 여진족의 기세가 워낙 강하자 장백 쪽을 포기하고 도문강변에 위치한 경원과 경흥을 치기 위해 오는 중이었다.
동쪽 해안선을 따라 진군했다면 진즉에 경흥에 도달했을 것이지만 여진족을 조선군처럼 만만하게 보고 덤빈 게 패착이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을 것이어서 사기도 가라앉아 있을 거였다.
“나무를 베어 고개를 차단하라. 가급적 단을 높이 쌓아라. 이곳에서 놈들의 진을 한 번 더 빼면 승산이 있다.”
아탕게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정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나무를 베고 단을 쌓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며칠 전에 당도할 수 있었는데 조총과 화약을 더 받기 위해 꾸물거린 게 화근이었다.
이러다가 왜군의 선발대가 먼저 당도하면 낭패인 것이다.
척후로 날랜 장정 몇을 보내어 왜군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피고는 있지만, 왜군을 발견한 후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 봐야 불과 반나절밖에 안 된다.
“아탕게. 너는 이곳을 지켜라. 나는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왜군들을 흔들어 놓으마.”
“형님. 굳이 나누지 말고 이곳에서 승부를 보는 게 낫지 않겠소? 왜군들이 진이 빠졌다고는 하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라 영 걱정되오.”
“간헐적으로 치고 빠지면 놈들의 진군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것이다. 그동안 이곳의 방책을 더 단단히 하고 기다려라. 내가 밀리는 척 이곳까지 왔을 때 2군을 투입하면 승산이 있다.”
전투가 벌어지면 피차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가급적 사상자를 줄이는 게 관건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대군을 맞이하여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인원이 워낙 적기에 몇십 명만 잃어도 전력은 급감한다.
이곳은 험산준령이라 지형을 잘 활용하면 왜군을 충분히 흔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머리를 굴리는 거였다.
“알았소. 형님이 시간을 끄는 동안 고개를 완전히 봉쇄해 놓겠소.”
“1군의 말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비워 둬라.”
가란구륜 족장이 말을 빌려주어 2군까지도 말을 지급했다.
아직 어설프기는 하지만 기동력만큼은 왜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동력을 이용하여 빠르게 치고 빠진다면 왜군을 충분히 흔들 수 있을 거였다.
“예. 형님. 염려 마시오. 여기서 왜군들을 치고 도문을 넘읍시다. 그리고 정비를 한 후 다시 내려오지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겠다는 말이다.
왜군의 주력 부대와 서전을 벌이는 만큼 추격대가 따를 것이다.
그래서 선두를 친 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도문강을 넘어갈 계획이었다.
여진족 진영으로 들어가면 왜군들도 지레 겁먹고 따라오지 않을 것이니까.
그리되면 경원과 경흥이 쑥대밭이 되겠지만 휘하 장정들의 목숨이 우선이었다.
“그리 알고 내려가겠다. 뒤를 부탁한다.”
“형님. 그저 조심하시오. 소제는 형님이 무시하기를 천지신명께 빌고 있겠소.”
아탕게가 천지신명을 찾는 것을 보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 * *
고갯마루에서 아래쪽으로 내달았다.
팔십여 기의 말이 내닫는 소리가 깊은 산중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놀란 산새가 하늘로 날고 사슴 노루 족제비들이 쫓기듯 숨어들었다.
서너 아름쯤 되는 삼나무와 노송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려 주었기에 풀이 거의 자라지 않아 달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십여 리쯤 내려왔을 때 한 무리의 인마가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왜군의 동태를 살피러 갔던 여섯 명의 척후들이었다.
그중 해인의 또래쯤 되는 상투 머리가 군례를 올렸다.
“나리. 소인은 만석이라 하오. 왜군의 선봉은 십 리 앞에 멈춰서 있소.”
“네가 척후조장이냐?”
“예. 나리.”
씩씩하게 답하는 만석의 눈빛이 제법 살아 있었다.
휘하의 장정들에게 지나친 예법을 지양하라 일렀더니 말이 짧았지만,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 예를 따질 겨를이 있겠는가.
“왜군 선봉이 왜 진군을 멈추었느냐?”
“너른 터가 있어서 그곳에 군막을 세우려는 것 같았소이다.”
“몇 명이더냐?”
“족히 일백은 넘는 병력이었소.”
일백이면 해 볼 만했다.
물론 본대는 그것보다 몇십 배는 되겠지만, 본대가 오기 전에 쓸어버리고 몸을 빼면 된다.
적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조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싸움이면 몰라도 불과 이백여 명으로 어찌 무모하게 맞붙겠는가.
길고 긴 싸움을 하려면 여우처럼 행동해야 한다.
“조총을 갖고 있더냐?”
“대부분 조총을 갖고 있는 것 같았소.”
“기병은 몇이나 되더냐?”
“십 명만 말을 타고 있었소이다.”
왜군의 선봉이 얼마나 정예인지는 몰라도 기병이 열이고 나머지가 보군이면 정면 승부를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기습이 가장 좋다.
“놈들이 석반을 준비할 때 친다. 전방을 잘 살피고 조용히 접근하라.”
“예. 나리.”
해인의 명이 떨어지자 만석과 척후들이 둘씩 짝을 지어 오십 보 간격으로 출발했다.
되짚어가는 길이라 머뭇거림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이곳의 지형을 모두 파악했다는 뜻이다.
아탕게가 그리 가르친 거였다.
여진족들은 사냥을 할 때도 마구잡이로 달려 나가는 게 아니라 주변 지형을 철저히 숙지하면서 쫓는다.
그만큼 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에 가능하고, 주변 지형을 어찌 활용할 것인가를 염두에 둔다는 뜻이다.
오늘 일로 미루어 볼 때 몇 달 사이에 1군이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 * *
약 오 리 정도 나아간 다음 모두 하마하고 왜군 선봉대로 은밀히 접근했다.
왜군들이 머물고 있는 근처까지 접근하는 건 별 무리가 없었다.
늦여름의 녹음이 의병들의 몸을 숨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일백여 왜군들은 별로 경계도 하지 않고 풀숲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진족에게 당했으면 다소 긴장이라도 하련만 이곳은 조선 땅이기에 긴장할 것도 없다는 듯.
그만큼 조선군이 지리멸렬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별다른 전투도 하지 않고 올라왔으니 무시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오랜 행군으로 지친 모습인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꾀죄죄한 건 둘째 치고 피죽도 제대로 먹지 못한 몰골이었다.
보급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였다.
“피골이 상접해 보이는데···. 그렇지 않느냐?”
“소인이 보기에도 그리 보이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쳐도 될 것 같소이다.”
어스름할 때 공격할 생각을 바꿔 바로 공격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여섯 조로 나뉘어 산개하고 오십 보 앞까지 접근한 후 효시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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