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의 실마리 (5)
067화 반격의 실마리 (5)
왜군들이 삼십 보 정도로 가까워지자 해인이 낮게 명령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일제히 방포하라.”
해인의 말이 끝나고 잠시 후 여섯 명의 척후 조와 해인의 조총에서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짙은 연기가 풀썩 피어올랐다.
바로 코앞에서 쏘는 터라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조총 소리에 말들이 놀라 앞발을 들었다.
오르막길이라 가뜩이나 몸이 뒤로 처졌는데 앞발까지 들자 왜군들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의병들이 재빨리 장전하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조총을 장전하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시간은 들숨 날숨이 열 번 정도 반복되는 정도였다.
그만큼 숙달이 되었다는 뜻이다.
두 번째 방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해인은 환도를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조총에 맞지 않은 왜군은 십일 명이었지만, 놀란 말에서 떨어져 비탈로 구른 일곱을 제외하면 싸울 수 있는 자는 넷밖에 없었다.
환도로 셋은 손쉽게 처리했으나 나머지 한 명은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해인의 일격을 어렵게나마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왜도를 쥔 손에서는 손아귀가 찢어졌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해인의 일격을 막아냈으니 정상일 리가 없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의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한 명만 남은 터라 급할 것도 없었기에 놈의 기량을 볼 요량으로 공격을 잠시 멈췄다.
복색이나 요란한 투구로 보아 상당한 직위에 있는 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예도 궁금했지만 왜군의 정보도 알고 싶었기에 죽이지 않고 제압할 생각이었다.
공격을 멈추고 쳐다보자 왜장은 무시당했다고 판단했는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해인의 실력을 이미 간파했음이다.
“칼을 버려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칙쇼.”
직위가 있는 것 같아 예의상 던진 말인데 상대는 조선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발끈하여 왜어를 지껄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서자 계속 놈을 자극했다.
“나는 조선의 무관이다. 너는 가토의 장수인가?”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조선말을 알아듣는구나. 어떠냐? 나와 자웅을 겨룰 건지 아니면 살길을 택할 건지를 정하라.”
“······.”
대답은 없었으나 놈이 틀림없이 조선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해인과 왜장이 대치하는 와중에 척후조들이 말에서 굴러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왜군과 조총에 맞아 부상당한 자들의 멱을 따고 있었다.
숨통이 끊어지며 내는 기묘한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나와 겨루면 하찮은 포로 신분이 될 것이고 스스로 투항하면 왜장으로 대접하겠다.”
‘털썩’ 소리와 함께 왜도가 땅에 떨어졌다.
왜장으로 대접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눌하지만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조선말을 조금밖에 못 한다.”
“옳은 선택이다. 내 너를 왜장으로 대접하리라. 나는 조선의 무장 벼슬을 하고 있는 최승우라 한다. 그대는 누구인가?”
“가토 기요사마 다이묘 밑에 있는 우군장 마사노리이다.”
왜군의 직제를 잘 모르겠으나 가토를 다이묘라 칭했으니 대장군이란 뜻일 것이고 우군장이라하면 핵심 직속 부대의 장수라는 뜻일 터.
“조선말은 어디서 배웠느냐?”
“조선에서 납치해 온 자에게 배웠다.”
여진족이나 왜구들이 조선인을 납치하는 이유가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서인가 보았다.
“그대 뒤를 따르는 후속 부대는 없느냐?”
“후속 부대는 반나절 거리에 있다. 나는 선봉대의 상황을 살피러 온 것이다. 곧 본진이 이리로 올 것이니 그만 나를 놓아주어라. 그러면 추적하지는 않겠다.”
본진이 금방 당도할 것이라고 했지만 산 아래쪽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만약 대군이 움직이고 있다면 그걸 모를 해인이던가.
그리고 선봉대가 연락이 없으면 대규모의 인원을 대동하고 와야 정상인데,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만 확인하러 왔다면 정예 중의 정예라는 뜻이다.
다들 기병이었고 각자 조총과 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보였다.
조선군을 우습게 알고 반격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만석은 말과 병장기를 수습하라. 돌아간다.”
“예. 나리.”
말 25필과 조총, 거기다 잘 벼른 왜도까지 챙긴 일행은 느긋하게 고개를 올랐다.
왜군이 뒤를 쫓아 와도 일전을 겨룰 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봉대에 이어 우군장과 호위대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데 쉽게 진군하지는 않을 터다.
가토가 아끼는 부장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한다면 모를까.
* * *
우군장 마사노리와 말 25필을 끌고 고개에 오르자 기다리던 의병들은 또 한 번 환호작약했다.
겨우 일곱 명이 왜군 스물다섯을 해치우고 왜장까지 붙잡아 왔으니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 당연했다.
이제는 장정들 사이에서 왜군이 오합지졸이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형님. 저자는 누구요?”
“가토 대장군 밑에 있는 왜장이다. 우군장이라 하더구나.”
“잘 벼린 칼처럼 보이오.”
아탕게는 마사노리를 바라보며 호승심이 이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인이 보기에도 아탕게보다는 한 수 위의 수준이었다.
단 한 수만 겨뤘음에도 왜장의 무예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함부로 도발하지 마라. 아우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으니까.”
“형님. 소제가 설마 왜장보다 못하다는 것이오?”
아탕게가 발끈했지만 검으로 승부하면 아탕게가 밀린다.
만약 단둘만 붙었다면 해인도 몇 합을 겨뤄야 승부를 볼 것 같았으니까.
척후조가 조총과 활을 겨누고 있었기에 검을 놓았을 뿐, 둘만 있었다면 건곤일척의 승부가 벌어졌을 것이다.
대장군 바로 밑에 있을 정도면 수없이 많은 실전을 치렀을 터.
“나로서도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왜장으로 예우해라. 저자로부터 알아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알았소. 조심하리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왜장을 바라보는 아탕게의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당장이라도 승부를 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선봉대와 우군장과 호위대가 당했으니 본진의 진군 속도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아니면 이 재를 포기하고 우회하든가.”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도 의미가 없잖소.”
“아니다. 이곳이 뚫리면 경원과 경흥이 위험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은 막아야 한다. 척후조를 보내어 본진의 동태를 살피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기다리자.”
“그러면 식량이 모자랄 것인데 어찌하오.”
“근처에 짐승들이 제법 많더구나. 장정들의 훈련도 겸해서 사냥을 하는 게 어떠냐?”
사냥만 순조롭다면 장정들에게는 그보다 좋은 식량도 없을 거였다.
곡식보다는 육식이 체력을 더 올려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사냥할 때 조총을 쏴도 되오?”
“조총을 숙달시키려고 하는 사냥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동안은 화약이 넉넉하지 않아 함부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때마침 선봉대와 우군장 호위대의 화약을 노획했으니 망정이지.
“아무래도 놈들의 보급 부대라도 털어야 할 것 같소. 부족에서 얻어 쓰는 것도 눈치가 보이오.”
“와르타 형님이 섬에서 유황을 많이 가져왔는데 무슨 걱정이냐.”
“화약도 화약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식량이 가장 큰 문제요. 박 행수도 장사를 나가지 못해 어려운 것 같은데 말이오.”
“곧 추수를 하니까 어찌 될 게다. 우리는 왜군만 생각하자.”
보급이 시원찮으면 왜군들처럼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선봉대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왜군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이 빠진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추수철이 다가오기는 하나 전란 중이라 다들 농사일에 손을 놓았기에 조선군이나 왜군들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다.
긴 전란에는 보급 여부가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왜군들보다는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침략을 당하기는 했지만 조선으로서는 안방에서 치르는 싸움이 아닌가.
* * *
만석의 척후조를 재 아래로 보내고 본진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그리고는 해인도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사냥에 나섰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의병들과 포로들이 하루에 먹어 치우는 양을 생각하면 후방의 보급에만 의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병들 전부를 동원하여 산중의 짐승들을 몰아 제법 많은 짐승을 잡을 수 있었다.
당장 먹을 것만 제외하고는 포를 떠 말리거나 훈제를 했다.
아직 왜군의 본진이 당도하지 않았기에 연기를 피우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형님. 왜도가 아주 참 좋소. 소제도 앞으로 왜도를 썼으면 하는데 조선 검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오?”
“안 그래도 조선 검보다는 훨씬 단단해서 바꿀까 생각 중이다. 내 환도는 흠이 생겼는데 왜장의 검은 멀쩡하더구나.”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강할까 싶어 요모조모 살폈지만 대장장이가 아닌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왜군들이 모두 칼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일정한 지위 이상 되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국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본진의 동태를 살피러 간 척후조에게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조총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사용하라고 한 거였다.
검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가 휘둘러도 능히 제 한 몸은 지켜 줄 만큼 날카롭고 강했기 때문이다.
“형님. 왜장이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는데 고신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니오?”
“하루쯤 더 두고 보자. 명색이 가토의 오른팔인데 그리 쉽게 입을 열겠느냐. 그리고 고신으로 얻은 정보가 과연 정확할지도 모르고. 제 마음이 열려야 옳은 정보가 나올 게다.”
“보급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소제가 달려가서 노획해 올 것인데···.”
아탕게는 두 번에 걸친 왜군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역할을 못 했던지라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왜군들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게 입증되었으니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을 거였다.
한가하게 짐승이나 사냥하고 있는 게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선봉대에 이어 우군장마저 소식이 끊겼다면 잔뜩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봉대의 소지품을 뒤져 봐도 먹을 게 별로 없는 걸 보면 보급 부대인들 마찬가지일 게다.”
“그럼. 내려가서 본진을 습격합시다. 이대로는 못 물러나오.”
“조금만 기다려라. 척후가 돌아오면 결정하자.”
척후조가 돌아오면 급습을 할지 뒤로 뺄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본진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면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된다.
이제 겨우 일백여 명의 왜군을 상대했을 뿐인데 수천의 병력이라면 아무리 사기가 바닥이라도 역부족이다.
“그러니까 왜장을 닦달해 보자는 게 아니오. 저놈만 입을 열면 이기는 건 떼놓은 당상이오. 조선말을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법 알아들으니 말로 으름장을 놓아도 되잖소. 척후가 알아낼 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아탕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싶어 해인은 마사노리가 묶여 있는 나무둥치로 다가갔다.
해인이 다가오자 눈을 감고 있던 마사노리가 눈을 뜨고 해인을 노려봤다.
잡아 온 이후 그대로 방치한 것에 대한 분노이리라.
이렇게 방치한 건 사실 의도적이었다.
처음에 몇 마디 물었을 때 성실히 답했으면 무시하지는 않았겠지만, 눈만 감고 있었기에 그냥 놔둔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지칠 것이니까.
“마사노리.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
“저기 보이는 내 아우는 그대가 계속 눈을 감고 있다면 살을 찢고 입을 열게 한다고 벼르고 있다. 저 이는 조선인이 아닌 여진족이다.”
여진족이란 말에 마사노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마 이번에 회령 너머에서 여진족과 조우를 했던 모양이다.
“여진족 사람이 그대의 아우란 말인가? 그대는 조선의 무관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의제일 뿐이다.”
“의제라면? 조선과 여진이 손을 잡았다는 말이냐?”
여진을 거론하며 눈빛이 강해지는 걸 보니 뭔가 악연이 있는 것 같았다.
“여진족은 조선과 조상이 같아 대대로 조선과 화평하게 지낸다. 손을 잡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으흠···.”
신음을 흘리는 걸 보니 미처 예측하지 못한 사실인 것 같았다.
간자들에 의하면 조선과 여진족은 원수처럼 지낸다고 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니까 놀랄 수밖에.
“너희들은 큰 오판을 하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밀리기는 했지만 한번 건너온 바다를 쉽게 건너지는 못할 것이다.”
“······.”
“내일 아침까지 기회를 주겠다. 그대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여진족에게 그대를 넘기는 수밖에 없다.”
여진족에게 넘긴다니까 마사노리의 눈동자가 더 심하게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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