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1)
068화 반격 (1)
포로인 마사노리에게 여진족에 넘기겠다고 어제 겁을 주었더니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가 먼저 해인을 찾았다.
밤사이에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여진족이 두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이제 얘기할 마음이 생겼는가?”
“조선에 이로울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대는 이미 조선 백성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대들이 조선 백성에게 한 일을 잊었는가? 살고 싶다면 이실직고하라.”
칼을 버렸을 때는 살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터.
잠시 먼 산을 보고 있던 마사노리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알고 싶으냐.”
“가토의 본진이 어디까지 진격했고 또 회령을 넘으려한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는···.”
한성으로 올라오던 가토는 방향을 틀어 함경도를 통해 명나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회령으로 향한 건 다른 주력 부대보다 먼저 명나라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는데 도문강에서 여진족에 막혀 조선으로 퇴각했다는 거였다.
“여진의 위세가 그리도 강하더냐?”
“그대는 여진과 형제라면서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있구나.”
“조선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들의 위세가 강하면 어떻고 약하면 어떤가.”
“흠....비록 강하기는 했으나 대단한 건 아니었다. 산악 지역에서 우리 군사들이 힘을 못 써서 퇴각했을 뿐이다.”
도문강을 넘지 못했다면 그만큼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산악 지역을 핑계 삼고 있었다.
“그대들의 조총을 당해 낼 무기가 없다고 자만했겠구나. 아니면 여진의 기마병을 너무 우습게 봤든가.”
“보급이 뒤따르지 못해 발길을 돌린 것뿐이다.”
눈빛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물러날 리가 있겠는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계획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말이다.
“전란을 일으키면서 그것도 생각 못했다면 그대들의 주군인 도요토미는 생각이 짧은 사람이다.”
“내 주군은 가토 대장군이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도요토미가 자신의 주군이 아니고 가토가 주군이라면 도요토미는 왜군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곧 조선에 온 왜군들은 각자의 대장군이 내리는 명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명령 체계가 일사불란하지 않고 중구난방이라는 뜻이다.
조선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전란이 빨리 끝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진족에 밀렸느냐?”
“아니다. 보급만 받쳐 줬다면 요동 땅도 우리가 점령했을 것이다.”
해인은 건주여진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왜군도 신경 쓰였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불안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는 보급이 문제였다고 항변했다.
그래서 재차 마사노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여진족을 조총으로도 상대할 수 없었느냐?”
“······.”
“알고 보니 왜군도 오합지졸들이었군.”
“칙쇼. 여진족은 조선군보다는 강했다.”
“그런데 그대는 허약한 조선군의 포로가 되었구나. 가토의 우군장이 한낱 조선군의 포로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라.”
“조선군의 포로가 된 건 내 실수였을 뿐이다. 건주여진에 밀린 건 보급이 부족해서였고.”
발끈하는 걸 보니 여진에 무참히 패하고 조선으로 퇴각한 것 같았다.
신무기인 조총을 가지고도 건주여진에 패퇴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건주여진이 얼마나 강하면 왜군들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당장은 얼마나 않은 왜군이 조선으로 건너왔느냐다.
조선 조정은 아직 왜군의 숫자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몇 명인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조선의 끝인 함경도에 있는데 어찌 알겠느냐?”
“알면 놀랄 것이다. 이십만이 바다를 건넜다.”
이십만이라고 말하는 마사노리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언뜻 스쳤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냐는 표정이었다.
이십만이라니, 놀랄 만한 숫자가 아닌가.
기껏해야 오륙만일 거라고 예측했었는데, 이건 도저히 어쩌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조선군을 아무리 끌어모아 봐도 막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휘몰아쳤다.
그렇다고 포로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대의 무게가 조선의 임해군과 같은지 궁금하다.”
왕자들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기에 마사노리와 맞바꿀 생각이었다.
왕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조선군을 압박하면 관군이나 의병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
왕자들의 안위가 아니라 의병들의 활동에 걸림돌이 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찮은 조선 왕자 따위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
“그대를 보내면 왕자들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이냐?”
“곧 조선 왕도 사로잡을 것인데 왕자를 돌려보낼 것 같은가? 우리는 화근을 남겨 두지 않는다.”
조선을 완전히 초토화시킨다는 말이었다.
왜국의 수족이 될 수도 있는 조선 백성마저도 무참히 죽이는 족속이고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왜국은 점령지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느냐?”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럼 왜 조선 백성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다루었느냐?”
“조선 백성들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조선인들의 성향은 제대로 파악한 것 같았다.
점령을 당했어도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란 걸 말이다.
“가토의 본진은 몇 명이냐?”
“일만 명이다.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살고 싶다면 나를 풀어 줘야 할 것이다.”
마사노리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줌도 안 되는 군사로 어쩌겠냐는 눈빛이었다.
“어차피 조선 백성들을 모두 죽인다는데 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느냐?”
“우리에게 협조하는 조선 백성은 살려 주기로 했다.”
백성들을 이간질을 시키겠다는 의도이리라.
임해군 등을 왜군에게 넘긴 자들도 조선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 * *
“형님. 왜장과 왜군 포로들을 어찌할 생각이시오?”
“포로들을 경흥 도호부에 인계해야지. 우리가 붙잡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잖으냐.”
마사노리를 인질로 잡고 직접 가토와 협상을 벌이려던 생각은 접었다.
그 일은 도호부사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일을 그르치면 그 화를 고스란히 덮어쓰게 되니까.
“경흥 부사만 좋아하겠구려.”
“경흥 부사도 왜장을 바로 의주로 압송할 것이다. 왜장을 처리하는 문제는 이제 주상과 조정 신료들의 몫이다.”
“본진을 치는 건 무리겠지요?”
“조선으로 들어온 왜군들이 이십만 명이고 가토의 군사만 일만 명이라는데 어찌 상대하겠느냐.”
“형님. 저놈 말을 믿는 게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전체가 유린되는 기간이 불과 두 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선군이 오합지졸이라고는 하나 왜군의 숫자가 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으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단기간에 끝나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길게 보고 대비하자.”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통나무로 고개를 막았으니 놈들도 조금 애를 먹을 것이다. 더 미련을 두지 말고 서둘러 경흥으로 철수하자. 경흥으로 돌아가서 도호부사에게 식량이라도 달라고 해야겠다.”
왜군 주력인 가토의 오른팔을 사로잡았으니 조선으로서는 엄청난 전과를 올린 셈이었다.
아마 최초의 전과가 될 거였다.
경흥 부사 입장에서는 별 노력도 없이 왜군 포로를 인계받은 셈이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나 다름없음이다.
해인이 뭘 요구하든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의병 활동을 돕는다는 명분도 있고 말이다.
“혹시 조총에 눈독을 들이거나 우리를 관군에 넣으려 하지 않겠소?”
“별걱정을 다한다. 문관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의병들을 지휘하겠느냐.”
“공명심이 앞서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소. 누구라도 우리를 본다면 탐을 낼 것이오. 왜장을 사로잡을 정도의 무력인데 그냥 보내겠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품계로 누르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해인이 벼슬을 버린다면 모를까.
“그런 염려도 없잖아 있구나. 경흥에 도착하면 너는 바로 도문강을 건너라. 나는 척후조만 이끌고 관아로 가겠다.”
“형님. 조총도 놔두고 가시오. 필시 욕심을 부릴 것이오.”
“그 정도는 괜찮다. 어찌 잡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해진다. 내가 적당히 대처하마.”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한다는 게 한심할 노릇이지만,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욕심을 내는 게 벼슬아치들이니 어쩌겠는가.
경흥 부사의 성품으로 볼 때 그렇지는 않겠지만 욕심을 부릴 수도 있는 터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관아에 곡식인들 남아 있을지 모르겠소.”
“환곡으로 쓸 곡식이 창고에 있는 걸 내 눈으로 봤다. 부사가 그건 아직 건드리지 않았을 게다.”
생각이 있는 수령들이라면 전란이 벌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고 있을 거였다.
아직 왜군의 힘이 미치지 않은 지역이라 관아의 곡식을 다른 곳에 옮길 상황도 아니었고.
* * *
경흥 부사는 해인이 왜장과 왜군 포로를 잡아 왔다는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전란이 일어나고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는 중에 왜군들을 포로로 잡아 왔다니까 놀랍기도 하겠다.
“최 교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회령에서 종성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경계하다가 가토군의 선봉대를 만나 전투를 벌였습니다.”
“의병을 양성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녹둔도에서 의병을 양성하는 건 이미 부사도 아는 일이다.
그랬기에 무시로 도문 강을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고개가 뚫리면 경원과 경흥이 위태하여 소관이라도 지켜야겠기에 의병들을 이끌고 나갔나이다. 그러다 우연찮게 왜군들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전투 상황 설명을 하자 경흥 부사는 연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해인의 설명은 한 식경가량 계속되었다.
“참으로 장하네. 왜군을 상대할 생각을 하다니 말일세. 최 교위야말로 진정한 충신이로다.”
“마사노리라는 왜장은 가토 대장군의 오른팔이라 하오. 저자를 인질로 왕자들을 구해 내는 게 어떨까 하여 급히 달려왔소이다.”
“죽이지 않고 데려오길 잘했네.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려 그대의 공과 함께 왜장을 어찌 처리할지를 결정하겠네.”
과연 어떤 결말이 도출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주상이 피신해 있는 의주까지 장계를 보내고 비답을 받으려면 하세월일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해인은 의병의 숫자를 늘려 세력을 더 키울 작정이었다.
이렇게 큰 공을 세웠는데 부사가 해인의 청을 거절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감. 소관은 또 그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토의 본진을 막으려면 한시가 급합니다. 소관이 없을 때 왜군이 들이친다면 그곳을 막는 의병들의 생사가 걱정입니다.”
“오! 당장 길을 떠나게나. 그런데 본관이 도울 일은 없는가?”
당장 왜군이 재를 넘어 올 것 같은지 부사는 더 붙잡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도울 일이 없느냐고 되물었다.
“곡식을 좀 내어 주십시오. 식량이 부족하여 짐승을 사냥해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말인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의병들이 굶어서야 되겠는가. 관아의 곳간을 열어 둘 것이니 수시로 내어가게나.”
아예 관아의 곳간을 열어 준단다.
왜장을 포로로 잡은 것에 부사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조금 가져가겠습니다. 며칠 내로 의병들을 보낼 터이니 더 내어 주십시오. 그리고 병장기가 많이 부족하오니 쇠붙이를 좀 내어 주십시오.”
“대장장이는 있는가?”
“저번에 영감께서 소관에게 붙여 준 장쇠라는 대장장이가 제법 손이 맵짜옵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자신이 붙여 준 대장장이를 잊었겠는가.
지금 조선의 지방관들은 대부분 경흥 부사만큼이나 속이 타들어 가고 머리가 어찔한 상황인 것이다.
“아! 내가 깜빡했네. 대장장이가 있다니까 천만다행이네. 고을을 뒤져서라도 필요한 쇠붙이를 모아 놓을 것이니 아무 때라도 사람을 보내게.”
“감사합니다. 부사 영감의 은공을 잊지 않겠나이다.”
“무슨 말인가. 편히 있는 처지에 그것도 못 해 준다면 국록을 먹을 자격이 없지 않겠나.”
“영감. 청이 더 있습니다.”
“기탄없이 말하게.”
“의기가 있는 장정들이 있으면 좀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할 의원이 필요합니다.”
경흥 부사가 나서면 장정을 모으는 건 일도 아니다.
그리고 의원은 당장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도 필요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도 반드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규모가 큰 가란구륜 부족도 각종 병을 치료하는데 의원을 쓰지 않고 무당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염려 말게. 힘이 좋은 장정들과 아주 용한 의원을 준비해 놓겠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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