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3)
070화 반격 (3)
해인이 은밀히 접근하여 왜군의 본진을 살폈다.
본진은 선발대 쪽에서 방포 소리가 들리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고갯마루와는 약 세 식경 거리였다.
왜군들로서도 조선에 상륙한 이후 이런 경우는 처음 겪었을 거였다.
성곽이 있는 고을을 공격할 때 외에는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진군하였을 것이니까.
몇몇 왜군들의 전방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해인은 올라오는 왜군들을 소리 없이 해치웠다.
왜군을 상대로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왜국 간자들에게서 뺏은 단도와 표창이었던 것이다.
길목에서 올라오는 왜군들의 멱을 따던 해인은 후속 부대가 다시 진군하는 걸 보고 고갯마루로 내달았다.
또 한 번의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조금 전의 선발대와는 다른 양상의 전투가 전개될 것 같았다.
전방을 주시하는 눈빛이 앞서왔던 왜군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조총의 심지에 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해인은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선두 부대만 궤멸시키고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몸을 뒤로 뺄 생각이었다.
주변 지형상 일렬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고는 하나 숫자로 밀어붙이면 한정된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이다.
“왜군의 병장기는 모두 챙겼느냐?”
“예. 장군. 모두 사백여 명이나 되오. 조총이 삼백여 자루나 되옵고 왜도도 이십여 자루가 됩니다. 그리고 놈들이 소지하고 있는 화약도 제법 되옵니다. 당분간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대승도 이런 대승이 없었다.
왜군들을 죽인 것보다는 조총과 왜도를 얻은 게 더 큰 성과였다.
지금도 부지런히 조총을 만들고는 있지만 전장에서 노획하는 조총의 숫자에는 못 미쳤던 것이다.
“부상자는 그대로 두었느냐?”
“예. 명하신 대로 좀 더 중하게 상처를 내고 방치해 뒀습니다.”
왜군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한 걸 본 후 부상자를 죽이지 말라고 했었다.
시신도 챙길 정도인데 부상자를 그냥 두고 갈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부상자로 인해 왜군의 진군 속도가 느려진다면 그것으로도 큰 성과였다.
부상자 하나당 두 사람이 달라붙어야 옮길 수 있기에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또 상처를 치료하려면 많은 노고를 쏟아부어야 한다.
쇠 구슬에 꿰인 몸이 쉬이 낫겠는가.
“만석은 뒤로 물러나 병장기와 식량을 챙겨라. 후발대의 선두만 처리하고 후퇴한다.”
뒤로 물러난다니까 만석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알고 눈을 멀뚱거렸다.
“왜군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이 정도만 해도 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더 있다가는 우리도 피해를 입는다.”
“예. 장군. 명을 받드옵니다.”
선두만 치고 후퇴한다고 하자 의병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얼떨결에 전장에 서기는 했으나 왜 두려움이 없겠는가.
피를 철철 흘리는 왜군들의 시신을 보며 구역질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말이다.
이번의 전투로 경험을 쌓게 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이뤘다.
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왜군의 후발대가 고갯마루 근처에 다다르자 또다시 콩 볶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려 퍼졌다.
이번에도 이백여 명의 왜군들이 의병들의 조총에 나가떨어졌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오던 왜군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병장기를 챙긴 해인과 의병들은 미련 없이 고갯마루를 벗어났다.
다들 말을 타고 있었기에 노획한 병장기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귀한 조총을 육백여 정이나 얻었으니 짐이 아니라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번에 노획한 조총으로 인해 가란구륜 부족의 전사들까지 모두 조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족에서 만들고 있는 조총까지 더하면 왜군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두렵지 않다.
조총 부대가 만들어지면 단 한 번의 방포로도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병을 앞세워 전장을 장악하던 종래의 전투는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 * *
경흥 도호부 관아에는 해인과 삼십여 명의 의병들만 들어갔다.
왜군에게 노획한 조총을 들고 갈 수는 없었기에 나머지 병력들은 무기와 함께 녹둔도로 들어가 쉬게 한 것이다.
옷 곳곳에 피를 묻힌 의병들이 말을 타고 경흥 관아 앞에 하마하자 경흥 부사 전은겸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눈이 화등잔만 해진 걸 보니 해인이 다쳤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최 교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영감. 고정하소서. 왜군들의 피입니다.”
“왜군들의 피라고?”
왜군들의 피라니까 이제는 턱수염마저 떨렸다.
단병접전을 했다는 증거니까.
“워낙 많은 왜군들이 몰려오는 터라 몸을 뺄 수밖에 없었소이다.”
“의병들이 왜 이들밖에 안 보이는가? 나머지는···.”
후퇴했다니까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조선의 관리들은 다들 이렇게 왜군을 강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동래에 상륙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한성을 점령하고 얼마 후 평양마저 삼켰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친 이들은 별로 없나이다. 피로가 누적되어 먼저 녹둔도로 보냈습니다. 소관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호부로 온 것이고요.”
“다친 이가 거의 없다니까 참으로 다행한 일이네만 왜군이 곧 이리로 온다면 큰일이 아닌가.”
경흥도 곧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장 피난을 가야 할지 관군을 독려해 마주 나아가 싸워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였다.
“당장 이곳으로 올 형편은 못 됩니다.”
“어째 그런가?”
“왜군의 주력이 이천 가량이었는데 그중 육백 명 이상을 죽이거나 상하게 했으니 섣불리 이곳으로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추측건대 고갯마루에서 농성을 하거나 다시 회령 쪽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고갯마루를 넘기 위해 피를 흘린 왜군들이 물경 칠백 명에 가까웠기에 남은 병사는 일천 이삼백이 전부다.
거기에 기식이 엄엄한 부상자만 해도 삼백 명이 넘어 진군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넘는다고 해도 조선군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발을 떼기 어려울 것이다.
“왜군을 육백여 명이나 해치웠단 말인가?”
“고갯마루에 숨어서 있다가 들이쳤기에 왜군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나이다.”
“참으로 장한 일을 했네. 가토의 간담이 서늘해졌겠네.”
“그건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회령 쪽에서 오는 왜군이 일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소관이 맞이한 왜군은 겨우 이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가토 주력군의 행방이 묘연하오이다.”
방금까지도 화색이 돌던 얼굴이 굳어졌다.
주력군은 다른 곳으로 샜다면 산 쪽을 버리고 해안 쪽으로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찌하면 되겠나?”
“주력군이 다른 곳으로 향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길주 쪽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다면 가토의 주력군이 퇴로가 막힐까 염려되어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네만. 당장은 재를 넘어올 왜군들을 상대할 방책을 세우는 게 우선이네.”
부사의 표정으로 봐서는 당장이라도 꽁무니를 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왜군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해인을 믿고 있기에 그러는 것일 터.
“영감. 척후를 보내 놈들의 동향을 알아보소서. 소관은 의병들을 추스른 후 곧 합세하겠습니다.”
“자네만 믿고 있겠네.”
“그런데 가토의 우군장은 어찌 처리하기로 했습니까?”
“바로 장계를 올렸지만 아직 의주에서 소식이 없네.”
의주까지 오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며칠 후에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주상과 신료들 간에 여전히 의견 대립을 하고 있거나.
“그렇다면 소관이 우군장과 얘기를 좀 나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사노리를 쥐어짜서라도 가토의 주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가토의 주력이 일만이라는 게 거짓인 것 같은가?”
“몇 번의 전투를 치러 본 결과 왜군들이 생각보다 무기력했습니다. 그동안의 전투로 인해 가토의 전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가토의 군이 조선 땅에 상륙한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기에 전력의 상당 부분은 날아갔다고 봐야 한다.
특히 건주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말이다.
거기에 더해 부실한 보급과 전장의 피로가 누적되었으리라.
“고신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게. 그동안 포로의 신분임에도 편히 있었으니 조선의 쓴맛을 좀 보여 주게.”
부사가 마사노리를 직접 신문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놈의 눈빛이 워낙 사나워서 전은겸이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했을 거였다.
“길주나 함흥 등지에서는 소식이 없었습니까?”
“의병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누가 나섰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네.”
“사람을 풀어 한번 알아보시지요. 가토의 주력이 어디로 갔는지도 확인해 보셔야 속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해인이 눈앞에 있으니 억지로 힘을 내고는 있지만 내심 무척 불안한 상태일 거였다.
전란 통에 문관이 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그저 후방에서 보급품이나 챙겨 주는 게 전부인데.
“흠···!”
“그리고 회령에서 오는 왜군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영감께서 소관에게 식량과 쇠붙이를 지원했기에 왜군들을 막을 수 있었다 소문내십시오. 그래야 다른 지방관들도 뒤를 따를 것입니다.”
“본관을 공이나 탐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 생각인가? 죽기를 각오하고 앞에 나선 자네를 욕보이는 짓은 할 수 없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해인의 말에 얼굴을 살짝 실룩이는 걸 보니 과히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영감께서 결단을 내리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나서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네. 우선은 왜군을 물리쳤다는 장계를 주상 전하께 올리는 게 급선무네. 조선 백성들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한다면 명나라도 원군을 더 빨리 보낼 게 아닌가. 전란을 빨리 끝내려면 명군이 와야 하네.”
경흥 부사도 다른 관리들처럼 여전히 명나라 원군이 오면 왜군이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명나라로 인해 왜군이 물러난다면 조선은 영영 명나라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영감. 그들이 오면 빈손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비록 도우러 왔다지만 명나라 병사들 또한 왜군과 마찬가지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온갖 작폐를 할 것입니다.”
“공맹의 나라 사람들이 설마 그러겠는가.”
“병사들은 선비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 전장에 끌려온 병사들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앞설 따름입니다. 그러느니 여진족을 끌어들이는 게 낫지요.”
명나라 병사들이 벌일 작폐가 걱정되어 여진족을 거론했지만, 여진족 또한 타국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왜군보다 더 경계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가토의 본진이 건주여진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발길을 다시 조선으로 돌렸겠는가.
“동해여진이라면 모를까 다른 부족은 믿을 수가 없네.”
“오죽 답답하면 여진족을 거론했겠습니까. 나중에 조선이 명나라에 어떤 대가를 치를지 걱정되어 그러는 게지요.”
명나라는 상국의 체면 때문에라도 원군을 더 보낼 것이다.
문제는 원군을 보낼 시기가 언제냐이다.
1차로 보냈다는 원군도 알고 보면 국경 수비대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평양성에서 왜군에게 혼쭐만 나고 뒤로 빠졌다.
추가로 보낼 정병이 왜군의 힘이 다 빠질 때쯤 들어와서 생색만 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군을 보냈다는이유로 온갖 걸 요구할 것이고, 나중에 여진족이 설치면 조선도 참여하라고 할 것인데.
의주에 있는 왕과 신료들은 과연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답답한 마음에 해인은 속으로 한숨만 쉬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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