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4)
071화 반격 (4)
경흥 부사에게 양해를 얻은 해인은 마사노리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마사노리. 가토의 본진은 겨우 이천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느냐? 설마 건주여진에게 모두 죽임을 당한 건 아니겠지.”
“칙쇼! 대장군의 병력은 일만 명이다.”
“그러면 지금은 구천 명이겠구나. 우리에게 천여 명이나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
숫자를 부풀려 일천 명이나 죽였다고 하자 마사노리의 눈자위가 바르르 떨렸다.
해인이 무위를 직접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본진이 있는 곳까지 가 보았다. 더 많은 병력이 머문 흔적을 보긴 했으나 재를 넘기 위해 산을 오른 병사는 겨우 이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느냐?”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그대에게 잡힐 때까지만 해도 칠천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
흥분한 나머지 본진의 병력이 몇 명이 남았는지를 저도 모르게 토설한 셈이었다.
그동안 가토의 일만 병력 중 삼천의 병력이 조선 땅에서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오천 명의 병력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고, 이천만 경원 쪽으로 올려보냈다는 뜻이다.
주력을 이끌고 다시 여진족을 치러 갔을 리는 없으니 함경도 어딘가에서 가토를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음이다.
그게 의병이든 아니면 왜군 내부의 문제이든.
“네 주군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
가토의 평소 성품을 알아야 주력을 뒤로 뺀 이유를 추정할 수 있기에 묻는 거였다.
비겁하고 소심한 자인지 아니면 명성을 탐하는 자인지를 안다면 앞으로의 싸움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마사노리는 굳게 입을 닫았다.
“이 단도가 누구의 것인지 아느냐? 왜국의 간자가 지니고 있던 단도다. 입을 닫고 있겠다면 이 칼로 네 몸을 난자할 것이다.”
심현사 뒷산에서 간자들에게 뺏은 단도를 꺼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왜장으로 예우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대의 입에 달려 있다. 거짓 정보로 나를 기만한 것을 잊었느냐? 죽기를 원한다면 입을 열지 말거라.”
해인의 말에 마사노리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해인의 눈빛으로 볼 때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주군은 신중한 분이시다. 주력을 돌렸다면 그럴 만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우군장인 그대가 실종되었음에도 찾지 않을 만큼?”
“주군을 나를 버리지 않는다.”
마사노리는 가토가 자신을 찾지도 않고 병력을 돌린 것이 충격이었던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 배신감으로 속으로 치를 떨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두려웠던 게야. 선봉대와 우군장의 호위 부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궤멸되었으니 주력 부대마저 잘못될까 두려워 오합지졸들만 남기고 철수한 것이겠지. 안 그런가?”
“칙쇼. 나를 욕보이지 말고 그만 죽여라.”
“조금만 기다려라. 그대와 왕자들을 맞바꿀 것이다. 그때 가토에게 왜 그대를 버렸는지 물어보아라.”
마사노리에게 아무것도 얻은 건 없었지만 추정할 단서는 몇 가지 챙겼다.
경원으로 가기 위해 재를 넘으려는 때에 선발대와 자신의 우군장이 당한 것은 가토로서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운 좋게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여진족에 당하고 또다시 조선군에 당했다면,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리라는 것쯤은 예상했을 터.
더 이상 무리하다가는 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주력군을 남쪽으로 돌렸을 것이다.
* * *
경흥을 벗어난 해인은 경흥 부사와 약조한 대로 바로 출진하지 않고 족장의 부락에 머물고 있었다.
족장이 건주여진의 동향이 수상쩍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건주여진의 전사들이 요동 북쪽에서 산맥을 넘어 해안 지대까지 출몰했다는 것이다.
조선이 흔들리고 있을 때를 기회로 나머지 여진족을 통합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건주여진의 동향을 해인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군에게서 노획한 조총으로 조총 부대로 새로 편성하고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장쇠와 억삼 부자가 만든 조총도 삼십여 정이나 되었고, 2차 접전으로 노획한 조총도 육백 자루가 넘었기에 제법 그럴듯한 조총 부대가 탄생했다.
“자네 덕에 우리도 조총 부대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네.”
“참으로 든든합니다. 조선 의병들의 조총 부대도 삼백 명으로 늘었고 군량도 넉넉하니까 힘이 절로 나는군요.”
그동안 경흥 부사가 의병으로 보낸 장정들이 이백여 명이나 되어, 그중 몸이 날랜 장정 일백을 추렸다.
나머지 장정들은 보급대로 운용하고 있었다.
이제 해인의 병력은 사백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거기에 경흥 관아에서 보내준 곡식도 많이 확보했고 의원도 둘이나 데려 왔다.
그래 봐야 상처의 고름을 짜내고 탕약을 조제하는 게 전부였지만.
“조총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네. 조총의 단점은 방포한 후 화약 연기가 자욱하다는 것일세. 그것은 곧 위치가 쉽게 노출된다는 말이 아니겠나. 만약 수적으로 많은 건주 기병들이 들이치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맞는 말이긴 하나 조총 소리에 말이 놀라 이리저리 뛰는 걸 봤기에 연기가 피어나는 단점은 크게 걱정할 게 없었다.
연속으로 방포하는 전술도 익혔고.
“소관도 그 점이 신경 쓰이오만. 조총 부대를 잘 운용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주여진이 해안 지역에 욕심을 부리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루하치가 요동도 모자라 해안 지역까지 넘보는 건지 아니면 동해여진의 존재가 거슬려서 그러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린놈이 무슨 욕심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
족장의 기준으로 보면 어리겠으나 해인과 비교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누루하치는 해인보다 열한 살 많은 서른세 살이었기 때문이다.
“누루하치와 원한을 맺은 적이 있습니까?”
“여진 부족끼리 원한 관계가 없을 수가 없네. 그렇게 따진다면 전부 원수일세. 이웃끼리도 약하면 쳐들어가는 게 우리 전통이라네.”
짐승들처럼 약육강식이 철저히 지켜지는 곳이 여진족들인 모양이다.
설마 침략이나 약탈이 전통에 속할까만, 힘이 없으면 큰 부족에 흡수되는 건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비등한 힘을 가졌을 때이다.
어느 한 부족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끝없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부족이 크든 작든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한다.
자리를 잡고 살만하면 사방에서 노리고 쳐들어오니 어쩌겠는가.
그런 현실로 비춰 볼 때 한곳에 정주하려는 가란구륜 부족은 조금 특이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건주여진의 약진을 저지할 묘안이 있으신지요.”
“지금으로서는 막아내는 게 우선이네. 그리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이곳을 떠나야지.”
“닥쳐서 떠난다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왜군이 요동을 노리고 있으니까 조용히 있겠지만 왜군이 물러나면 필시 조선이나 동해여진을 노릴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왜군이 조선에 머물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두 번의 습격으로 인해 왜군들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그리 생각하는 거였다.
문제는 왜군과의 싸움으로 힘이 빠진 조선을 누루하치가 그냥 두겠느냐다.
마찬가지로 동해여진도 위험하다.
건주여진의 입장에선 동해여진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주먹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버리자는 말인가?”
“따끔한 맛은 보여 줘야지요. 그래야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전사들만 남겨 놓고 노인들과 아녀자들은 두 형님들의 부락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곳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네.”
누루하치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옮기는 게 상책이지만 언제까지 쫓겨 다닐 수는 없다.
물론 그런 장소는 이미 있다.
무릉도원이라고 하는 북쪽의 땅이다.
그곳으로 가면 이런저런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도 마땅찮다면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누루하치도 굳이 뒤쫓지 않을 게 아닙니까. 명나라나 조선이 더 군침이 도는 먹이인데 굳이 북쪽까지 올라오겠습니까? 나중에 건주여진이 북쪽으로 올라온다고 해도 그때는 자웅을 겨룰 정도로 힘을 얻은 후가 될 것이고요.”
“이제야 마음을 굳힌 게로군.”
해인이 부족에 합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럴 마음은 없잖아 있었으나 조선을 등진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근본을 버리는 것이나 같은데 말이다.
“조선에서 왜군이 몰아내고 난 후에 거취를 결정하겠습니다.”
“자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네. 허나 세상사에는 때라는 게 있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에 자네 같은 인재만 있다면야 무슨 걱정이겠나. 자네가 합류하지 않으면 나로서도 부락을 옮기는 걸 쉬이 결정할 수 없네. 부족민들도 따르지 않을 것이고.”
“부족의 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소관이 합류하고 아니고는 나중의 일입니다. 그 대신 언제라도 소관이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금도 왜군들을 상대하느라 바쁜데 어찌 힘을 보탠다는 말인가.”
“한 번 더 출정한 후 주을 공주와 함께 북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네.”
“······?”
“주을과 이름부터 짓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자네가 조선에서 살겠다고 해도 눈감아 주겠네.”
족장의 노림수가 이거였나 보다.
혼인을 하면 자식을 볼 것이고, 그 자식이 살고 있는 부족을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족장의 노림수가 그리 언짢지는 않았다.
지금 해인은 조선에서는 잊혀진 사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흥에 남겠다고 한 건, 조선의 앞날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 그를 가란구륜 족장은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만약 족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는커녕 쫓겨 다니기도 바빴을 거였다.
“족장님. 그리하지요. 하나 당장은 왜군과 싸워야 할 처지이오니 말미를 좀 주십시오.”
“그리 알고 있겠네. 사내대장부의 약속은 천금과도 같다고 했네. 이제 주을은 자네의 처나 다름없으니 동침을 한다 해도 뭐라 않겠네.”
동침이라는 말에 해인의 눈이 화등잔처럼 변했다.
아무리 남녀 관계가 자유로운 여진족들이라고는 하나 주을은 대부족의 공주인 신분이 아닌가.
“어찌 그리 서두르시는지요?”
“요즘 자네가 설치는 걸 보니 다칠지도 모르잖는가. 그래서 씨라도 미리 받아 놓으려는 게지. 자네의 씨라면 필시 훌륭한 전사가 될 것이고.”
“주을의 의사는 상관없는지요.”
“자네는 주을을 억지로 취할 수 있다고 보나? 어림없는 소리지. 자네 주위를 맴돌고 자네와 곧잘 어울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제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말도 섞지 않을 아이일세. 그러니 얼른 합방하여 떡두꺼비 같은 놈이나 내 품에 안겨 주게. 내가 허락한 혼인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 * *
족장의 방을 나온 해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하고 허공만 쳐다봤다.
혼인 전에 합방을 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물론 여진의 풍습으로는 크게 흠이 되지 않겠으나, 자신은 조선의 무관이고 양반가의 자손이 아닌가.
마음이 바빠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금지옥엽인 여식과 동침을 강요하다니.
그런 언사를 천연덕스럽게 뱉을 수 있을 정도이면 족장의 배포도 참으로 어지간했다.
“형님. 왜 거기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게요?”
아탕게가 의아한 눈초리로 해인의 아래위를 훑었다.
“별일 아니다. 족장께서 황망한 말씀을 하는지라···.”
“어째 형님 표정이 요상하오? 혹여 공주와 합방이라도 하라고 했소?”
꼭 옆에서 들은 것처럼 말한다.
“소제의 말이 맞나 보군요.”
“어찌 알았느냐?”
“형님을 놀라게 할 일이 그리 흔하오? 족장님이 필시 공주님을 거론했을 것이고, 성품상 당장이라도 합방하라고 했을 게지요. 그렇지 않소?”
“아탕게. 말이 지나치다. 주을이 알면 우리 둘 다 치도곤을 당한다.”
“여진족에겐 그게 상찬이나 마찬가지요. 만약 소제가 족장이었더라도 딸을 내어 주고 붙잡으려 했을게요. 형님만큼 강한 전사가 세상에 어디 있소. 욕심낼 만하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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