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72화 (72/130)

반격 (5)

072화 반격 (5)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나.”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오.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건 지금껏 조선에서 형님이 유일할 것이오. 이런 걸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이 알아줄까 모르겠소.”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앞장섰던 건 아니다.

국록을 먹는 관리이고 무예를 익힌 무관이기에 나선 것이다.

“뭘 바라고 나선 게 아니다. 무인의 한 사람으로서 백성들이 고통받는 걸 보다 못해 일어선 것뿐이다.”

“의심 많은 주상이 그리 생각하겠소?”

“조선을 구하기 위해 나섰는데 왜 의심하겠느냐?”

정상적인 왕이라면 아무리 의심이 많아도 의병들까지 의심하랴.

허나 지금의 주상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형님 같으면 조총 부대를 이끌고 왜군을 격퇴한 관리가 두렵지 않겠소? 언제 한성을 향해 조총을 들이댈지도 모르는데 두 발을 뻗고 주무실 수 있냐는 말씀이오.”

“별걱정을 다하는구나.”

“그럴 만하니까 걱정하는 게요. 그동안 조선의 왕들 대부분이 무장을 대우해 주기는커녕 이징옥처럼 난이라도 일으킬까 봐 견제하기 바빴잖소. 전란이 끝나고 나면 아마 역모를 꾸민다고 몰아붙일 것이오. 특히나 형님처럼 특출하다면 말이오.”

당장 왜군을 몰아내는 데에 집중해야 하는데 주상이 나중에 어찌 나올까를 염려해야 하다니.

“그래서 내가 공을 탐하지 않고 있잖으냐.”

“경흥 부사가 공명심에 들떠 형님을 등에 업은 걸 어찌 모르시오. 전공을 부풀리지는 않겠으나 자신이 명을 내려 왜군을 물리쳤다고 장계를 올렸을 게 아니요. 소제는 그게 걱정이외다. 그 장계를 본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란 말씀이오.”

아탕게의 걱정을 듣고 보니 괜히 앞장섰나 싶었다.

지금이야 장하다고 하겠지만 전란이 끝나고 나면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주목받아도 문제인 것이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왜군을 밀어낸 다음에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칩거하는 게 신관이 편할 것 같았다.

아니면 아예 눈앞에서 사라지든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왜 그리 열을 내느냐. 내가 조심하면 될 일이다.”

“조석으로 변하는 자들의 눈치를 살필 게 무어 있소. 눈치 보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을요.”

“벼슬 따위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다시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게 심란하지.”

“형님. 억지로 인연을 끊을 것도 없소. 형님의 세력이 강해지면 조선에서 오히려 눈치를 살필 것이오. 형님과 관계되는 이들도 기를 펼 것이고요.”

지금의 누루하치처럼 강해지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명나라도 은근히 누루하치의 눈치를 살핀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명나라도 쇠약해졌다는 뜻이다.

“조선 관리들이 얼마나 꼬장꼬장한지 아느냐? 한번 정하고 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신을 버리지 않는 자들이다. 누루하치가 조선을 돕겠다고 나서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걸 보면 알 게 아니냐.”

조선이 풍전등화에 처해 있음에도 누루하치가 원병을 보내겠다는 걸 거절한 관리들이다.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털리고 동쪽으로는 함경도에 왜군이 올라온 상황이라면 이미 조선이 끝장난 것인데 말이다.

물론 명나라가 원병을 보낼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렇겠지만.

“그것이야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지요. 그리고 그동안 여진족을 핍박한 것도 있고요.”

* * *

녹둔도로부터 연락이 왔다.

척후조가 왜군과 전투를 벌였던 고갯마루 주변을 수색해 봤으나 왜군들의 종적이 묘연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함경도 곳곳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왜군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싸우는 족족 피해만 입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도 전해 왔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훈련도 안 된 의병들이 변변찮은 무기로 상대했으니 패하는 건 당연했다.

의지만으로 왜군을 상대할 수는 없음이다.

더 두고 볼 수는 없어서 해인도 의병들을 이끌고 출정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의병들의 무장을 숨기지도 않았다.

녹둔도에서 출발한 해인의 의병들이 부령과 경성의 접경 지역에 당도했을 때는 가토의 주력군이 막 길주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부령은 회령과 붙어 있어 가토의 주력군이 휩쓴 여파로 고을은 불타고 백성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놈들이 더 이상 함경도에 미련이 없는 것 같구나.”

“소제가 봐도 그런 것 같소. 아주 씨를 말려 놓았구려. 논밭에 자라는 곡식까지 태운 걸 보니 말이오.”

곧 수확할 작물마저 모두 태웠던 것이다.

자신들의 식량이 될 수도 있는 걸 태웠다면 함경도를 포기했거나 조선군이 군량으로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터다.

“빨리 뒤를 쫓아 더 이상 논밭을 태우지 못하게 해야겠구나.”

“형님. 이렇게 급히 퇴각하는 걸 보면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무슨 변고가 생긴 게 분명한 것 같으오.”

“사방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난 모양이다. 우리도 속도를 올리자.”

조선 조정은 아직 왜군들의 숫자나 공격로 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한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관리 체계마저 무너져서 관군들은 누구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지조차 몰라 그저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거기에 봉수대마저 그 기능을 상실하여 정보라고는 소문으로 전해 오는 게 전부였다.

누가 어디서 의병을 일으켰는지, 얼마나 많은 의병이 왜군과 싸우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형님. 혹시 가토의 주력을 공격하려는 것이오? 잘못하다가는 우리 의병들만 결딴나오.”

“급히 퇴각하는 놈들이 후방 경계인들 제대로 하겠느냐. 뒤에서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당황할 게다. 논밭을 불태우지 못하게 하려면 그게 최선이다.”

뒤처져서 논밭을 불태우고 있는 왜군들이 문제였다.

곧 추수할 곡식마저 사라지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마련할 길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애꿎은 백성들만 왜군에게 죽어 나가고 먹을 게 없어 굶어 죽게 생겼던 것이다.

* * *

왜군의 후미 부대를 만난 건 반나절도 안 되어서였다.

해인의 의병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고 달려 나가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고 있었다.

“더 빨리 달려라. 왜군이 겁먹고 퇴각하고 있다.”

“예. 장군.”

해인의 명령에 의병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채찍을 휘둘렀다.

의병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이번에 출정한 의병들은 경험이 없는 장정들도 끼어 있었는데,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먼저 의병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왜군을 무찌른 경험담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총만 있으면 왜군도 별것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이백 보 가까이 되었으나 해인이 조준 없이 무조건 방포하라 일렀다.

조선의 의병들이 조총을 갖고 있다는 걸 알리는 한편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거였다.

들판에 조총 소리와 화약 연기가 가득하자 왜군들을 저항도 못 하고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삼백 정의 조총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도 남았다.

왜군들로서는 청천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을 터.

일부는 다리가 풀렸는지 도망조차 못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멀쩡한 놈들은 두고 나머지는 멱을 따라. 조총과 화약을 빠짐없이 수거하고.”

“예. 장군.”

“아탕게. 일백 명을 이끌고 도망가는 놈들을 쫓아라.”

“예. 형님.”

적을 뒤쫓으라고 하자 아탕게는 웬 떡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왜군들의 조총 사정거리 내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자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나게 환도를 휘두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활을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 쇠 구슬 맛을 보고 싶다면 만류하지 않으마.”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놈들이 조총을 겨눌 겨를이나 있겠소?”

“적당히 쫓는 시늉만 하고 돌아오라는 말이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도 바쁜 왜군이지만, 마지막 발악으로 달려들 자들도 있을 터.

아탕게도 자신이 지휘하는 의병들이 죽거나 다치는 걸 원치 않을 테니 크게 무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 * *

아탕게가 도망친 왜병들을 뒤쫓아 오십여 명을 척살하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몸을 풀고 난 아탕게는 무척 흡족해하고 있었다.

비록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왜군이지만 원 없이 칼을 휘둘렀다.

오늘 의병들은 왜병 이백여 명을 죽이고 오십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아탕게. 몇 명은 그냥 도망가게 뒀다고 했느냐?”

“예. 형님. 그래야 우리의 존재를 가토에게 알려 줄 게 아니오. 조총을 가진 조선군이 뒤를 쫓고 있다면 가토도 기겁을 하겠지요.”

대규모의 조선군이 추적하고 있다면 퇴각하기도 바쁠 것이어서, 마을과 들판의 곡식을 불태우고 조선 백성들을 죽이는 일은 줄어들 거였다.

조총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잘했다. 나도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형님. 저렇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데 아예 뒤따라가서 본진을 한 번 더 공격하는 건 어떻겠소?”

“됐다. 놈들이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으면 우리도 피해를 입는다.”

마음 같아서는 본진도 흔들고 싶었으나 겨우 삼백 명의 의병으로 수천의 적을 들이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끝날 싸움도 아니고 의병들을 더 확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단 한 명의 의병이라도 아껴야 한다.

짧게나마 실전 경험도 치른 의병을 조선 천지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형님. 왜군들의 꼴이 비루먹은 개보다도 못하던데 방어할 생각이나 하겠소?”

“궁지에 몰리면 죽기를 각오하고 나올 게다. 그러다 보면 우리 의병들도 다친다. 이 정도면 우리 역할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의병들이 뒤를 쫓는다면 퇴각이 더 빨라질 것이다.

“알았소. 아쉽지만 형님 말씀을 따르지요. 포로로 잡은 왜군들은 어찌할 생각이시오?”

“경흥까지 끌고 가면 군량만 축나니까 부령 관아에 맡기자.”

“형님. 저놈들을 관아에 넘길 게 아니라 우리 종으로 부리면 어떠하오?”

“왜군들을 종으로 부리자고?”

“조선 백성을 죽인 놈들인데 곱게 관아로 넘기기가 그렇잖소.”

왜군들을 데려다 짐승처럼 부리겠다는 뜻이다.

포로를 관아에 넘길 생각만 했던 터라 잠시 망설여졌다.

“관아에서 알면 곤란한데···.”

“우리가 잡은 포로들을 처리하는데 관아의 눈치를 왜 보오.”

“내가 무관만 아니라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사사로이 행동했다가는 나중에라도 곤란해진다.”

“지금 조선에서 형님께 뭐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시오. 형님께서 더 높은 벼슬을 바란다면 모를까.”

“내가 벼슬에 욕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구나.”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게 아니오. 사람이 부족하니 왜군 포로들이라도 우리가 부리자는 게요.”

의병이든 가란구륜 부족이든 사람이 부족하긴 했다.

싸움터에 있어야 할 의병이나 전사들이 잡일까지 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자꾸나.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긴 하다. 일단 녹둔도로 데려가자.”

감사합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