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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78화 (78/130)

해동의 발돋움 (2)

078화 해동의 발돋움 (2)

산 쪽으로 우회한 해인과 의병들은 앞서가는 왜병들의 뒤를 따르며 요란을 떨었다.

그런데 수많은 말발굽 소리와 함성 소리가 들렸음에도 왜병들은 허둥거리지도 않고 질서정연하게 방포 자세를 취했다.

당연히 도망을 갈 줄 알았던 왜군이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응전 태세를 갖추자 해인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다들 멈추고 뒤로 물러나라.”

앞으로 더 나아가다가는 조총의 사정거리에 들 것이기에 재빨리 말을 멈추고 뒤로 물렀다.

의병들의 두 배인 왜군들과 직접 부딪쳐봐야 피해를 입을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하마하고 방포 대열로 벌려라.”

“장군. 거리가 너무 멉니다.”

“괜찮다. 우리 조총이 왜군들 조총을 능가한다.”

이번에 지급한 조총은 조선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장쇠 등이 심혈을 기울였기에 총열이 왜군 것보다 길고 단단했고, 족장의 맏이인 와르타 부락에서 만든 화약이 폭발력이 강해서 사정거리가 대폭 늘어났다.

질 좋은 유황을 사용하고 화약은 습기에 노출되지 않게 한지로 밀봉한 게 주효했다.

문제는 폭발력이 강한 만큼 간혹 총열이 파열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것만 해결된다면 최강의 신무기가 될 거였다.

오늘은 실전에서 조선과 왜의 조총을 비교할 기회였다.

이백 보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방포 대열을 갖추자 왜군들은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했다.

살상이 가능한 거리인 일백 보를 넘겼으니 방심하고 있는 거였다.

“방포하라!”

요란한 소리가 들렸으나 왜군 진영에서는 엎드리거나 나무 뒤로 숨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숨 한 번 쉴 시간이 지난 후 수십 명의 왜군들이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건 쇠구슬이 왜군의 몸에 박혔다는 뜻이다.

픽픽 쓰러지는 모습이 아닌 걸 보면 거리가 멀어 위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왕좌왕하는 왜군을 향해 한 번 더 조총이 방포되었다.

그러자 왜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조총으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이 동료의 몸에 박히거나 근처에 떨어지는데 어찌 혼비백산하지 않겠는가.

“말을 타고 뒤를 쫓아라! 적당한 거리가 되면 활을 쏴라!”

별동대는 모두 활과 환도를 갖고 있었는데, 화약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활을 잘 쏘지는 못하나 조총보다 사거리가 길어서 충분히 위협은 되었다.

도망가던 왜군의 등에 눈먼 화살이 꽂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일백 기의 말이 일제히 내달리자 왜군들은 앞다투어 달아났다.

의병들보다 배나 되는 숫자라면 대항이라도 하련만 이미 기가 죽은 것이다.

자신들의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조총을 어찌 상대하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게 최선일 터.

해인이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목적을 이뤘기에 왜군들을 더 이상 쫓지는 않았다.

* * *

왜군들과 떨어져 있던 짐꾼들은 의병들이 나타나자 환호했다.

몰골들을 보니 그동안 짐승 취급을 받았던 듯했다.

이러다가 병이 들면 가차 없이 죽였을 것이다.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불쌍한 게 힘없는 민초들이다.

특히 여인들의 고초가 남다르리란 건 불문가지.

쇠돌은 입 주변에 허옇게 버캐가 낀 중늙은이에게 물을 권하며 측은한 눈빛을 했다.

“천천히 마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참으로 고맙네.”

“왜놈들이 물도 안 주오?”

잠시 치를 떨던 중늙은이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반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을 질 때는 절대로 물을 주지 않네. 물을 먹고 힘을 내어 도망을 칠까 봐 그러는 게지.”

“짐 속에 든 게 무엇이기에 놈들이 그리 모질게 대했소?”

“단천 은광에서 캔 은일세.”

둘의 대화를 듣던 해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설마 했는데 은을 운반하던 왜군을 만날 줄이야.

쇠돌이 내처 물었다.

“등짐에 있는 게 모두 은이오?”

“일부만 식량이고 나머지는 모두 은일세.”

오십여 짐꾼들의 지게에 진 짐이 모두 은이라면 참으로 엄청난 양이었다.

이렇게 많은 은을 겨우 이백여 명의 병사들이 호위한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이보게. 왜군들이 이게 전부인가?”

“아이고. 나리.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백골난망이오.”

“인사는 나중에 하게. 어서 말해 보게.”

“예. 나리. 바로 아룁지요. 왜군 본진이 바로 코앞이라 반수 이상이 본진으로 향했소이다.”

다 왔다는 안도감에 호위 인원을 줄인 모양이다.

해인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나마 본진이 코앞이니 놈들이 응전 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도망친 왜군들이 본진에 알리면 조만간 응원군이 들이닥칠 판이었다.

“쇠돌아. 어서 여길 떠야겠다. 등짐을 받아서 말에 나누어 실어라.”

“장군. 저들은 어찌하오리까.”

“저들까지 데려갔다간 낭패를 본다. 각자 살길을 찾아 피신하라 이르라.”

마음 같아서는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고 싶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는 수밖에는 없었다.

본진에서 왜군들이 쏟아져 나오면 의병은 물론 짐꾼들마저 줄초상이 날 판이기 때문이다.

겨우 일백 명으로 무모한 전투를 할 이유도 없었고.

짐꾼들도 해인이 의중을 이해했는지 얼른 짐을 넘기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왜군들에게 잡혀 있던 터라 풀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대부분 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라 어디가 안전한지는 짐꾼들이 잘 알 거였다.

“모두 짐을 단단히 묶어라. 단 한 개라도 흘리면 안 된다. 이 은은 조선 백성의 것이다.”

“예. 장군.”

“쇠돌이는 척후조를 이끌고 앞장서라. 자! 이제 녹둔도로 돌아가자. 거기에서 며칠 쉬고 바로 무릉도원으로 간다.”

“와아아아아! 장군님 만세!”

녹둔도로 돌아간다니까 다들 만세를 불렀다.

누가 들었다면 역모로 엮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명나라도 들썩거릴 일이었다.

천세는 조선 임금이 받는 말이지만 만세는 황제만 들을 말이 아닌가.

일단 가토의 병사들을 한 번 더 흔들어 주었고 거기에 덤으로 은까지 탈취했으니 가토로서는 땅을 칠 일이었다.

왜군이 재무장할 재물까지 뺏었으니 조선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해인은 도리를 다한 셈이고.

이젠 무릉도원으로 들어가서 겨울을 지내도 마음의 부담은 덜할 것 같았다.

조선의 의병 중 자신만큼 활약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으니 두고두고 칭송받을 일이었다.

* * *

경흥으로 올라오는 길은 닷새나 걸렸다.

거쳐 가는 각 관아에서 주연을 베풀어 주어 마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인의 의병 활동이 이미 소문이 난 터라 고을 수령들이 앞다투어 안면을 트려고 나섰던 것이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게 함경도 일원에 소문이 자자했기에 의병장인 해인이 나중에 중앙으로 발탁되었을 때를 대비하는 거였다.

해인은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수령들의 대접을 기꺼이 받았다.

회령의 은광을 차지하고 있으려면 존재감이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녹둔도 근처에 당도한 해인은 주둔지 근처에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주 방면으로 갔다 올 동안 이주민들이 대부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출발하지 못했다면 무슨 변고가 발생한 것이다.

마침 주변을 경계하는 의병들이 있어 붙잡고 물어봤더니 의병 가족들은 이미 무릉도원으로 떠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함경도 일대에 퍼진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그동안 일천여 명을 보내고 남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먼저 떠난 의병의 식솔과 친인척들이 일천여 명이고 나머지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인데, 그 숫자가 오백이나 된단다.

이 사람들을 어찌 먹여 살려야 할지 막막했다.

각자 약간의 곡식은 챙겨왔겠지만 긴 겨울을 나려면 턱없이 모자랄 것인데 말이다.

물론 짐승들이 지천이라 사냥을 하면 어찌 버텨 보겠지만 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 청장년층 가족들이었다.

나이 든 이들을 고향에 두고 피난을 가는 모양이다.

세 번째 이주민들이 무릉도원으로 출발하는 걸 보고 별동대는 녹둔도에 일단 머물게 했다.

소문을 듣고 뒤늦게 도문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고을에 서신을 띄웠다.

의병들이 겨울을 날 식량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식량을 확보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후 해인은 가란구륜 족장에게 들러 인사를 차렸다.

왜군에게서 뺏은 은괴 중 일부를 선물했더니 족장은 무척 흡족해했다.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음에도 그걸 알려 준 게 고맙다는 거였다.

“이젠 한배를 탔는데 어찌 숨기겠습니까. 남도 아닌 장인에게 그럴 수는 없지요.”

“오호! 드디어 장인으로 불러 주는군. 내가 사람은 잘 보았어. 견물생심이라 했거늘. 이제 새로운 무리를 이끄는 수장인데 재물이 왜 필요하지 않겠나. 오늘 자네의 그릇을 봤으니 내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을 줄 걸세. 기대해 보게.”

옆에서 둘의 대화를 생글거리며 듣고 있던 주을이 족장에게 바투 다가앉더니 족장의 팔을 잡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 뭘 또 더 주시려고 그러세요.”

“이놈이 뭘 더 뜯어가려고 이리 아양을 부리느냐. 저리 떨어져라.”

“호호호···. 제가 뭘 가져갔다고 그러세요.”

해인이 별동대를 이끌고 길주 방면으로 나가 있을 동안 족장에게 달라붙어 어지간히 뜯어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기겁하는 거겠지.

“왜군에게서 뺏은 조총 몇 정 던져주고 말을 몇 필이나 가져갔는지 기억 못 하느냐?”

“그거야 의병들이 더 늘어났으니까 그렇죠. 앞으로 훈련을 받고 나면 우리 부족의 든든한 우군이 될 건데 뭘 아까워하세요.”

노획한 조총을 주고 부족의 말을 받아 낸 모양이다.

여진족들에게 말이 흔하다고는 하나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

말 젖이나 고기는 훌륭한 식량이기도 하고 가죽은 옷이나 움막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얻어 쓴 말값도 쳐 주지 못했는데 노획한 조총으로 또 말을 받아 냈다니까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장인 어른. 이번에 노획한 은이 상당합니다. 필요하다면 더 내어놓겠습니다.”

“잘 뒀다 필요한 데 사용하게. 우리 부족에도 은광이 세 개나 있는데 더 받아 봐야 소용도 없네.”

“은광을 더 발견했습니까?”

“둘째가 이번에 두 곳이나 찾아냈지 뭔가. 얼마나 매장되었는지는 캐봐야 알겠지만 말만 들어도 배부르네. 아마 자네의 부락 근처에도 은광이 있을 걸세. 아무래도 은맥이 함경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네.”

또 다른 희망이 샘솟았다.

은만 있으면 뭐든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도아 상인들이 모든 거래를 은으로 한다기에 하는 말이다.

조총을 만들어 낸 이들이라면 또 다른 신무기도 있을 거여서 그걸 흉내 낸다면 왜국이든 건주여진이든 두려울 게 없다.

왜국도 포도아 사람들로부터 조총을 구한 후 그것을 흉내 냈기에 지금 조선 땅을 마구 짓밟고 있잖은가.

“무릉도원에 가면 주변을 면밀히 살펴봐야겠습니다.”

“겨울 동안은 그곳에 있을 생각인가?”

“조선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종종 나와 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박이규 상단이 회령의 은을 채굴할 동안만이라도 의병장으로서의 확고한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아직은 무릉도원에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왜란이 끝나면 논공행상이 있을 것인데 굳이 마다할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명성을 얻은 후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무릉도원으로 데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주을은 당분간 이곳에 있도록 해라.”

“예?”

“아버지!!”

“자네가 자주 이곳에 들른다니까 그러는 걸세. 그동안 살림살이하는 거라도 알려 줘야 하지 않겠나. 옷을 짓고 밥 짓는 건 가르쳐서 보내야지.”

그러자 주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개도 못 들었다.

그동안 선머슴처럼 쏘다니기만 했던 것이다.

“예. 장인 어른. 아직은 어수선하니 부족에 남아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소관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데 홀로 그곳에 있는 것도 걱정되고요.”

“주을도 그리 알고 조신하게 있거라.”

“예. 아버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해인에게 눈을 흘겼다.

왜 자신을 부락에 떨어뜨려 놓냐는 무언의 항변일 터.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미처 주을의 의사를 물을 틈도 없었다.

함께 다니면 조금 성가신 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주을의 톡톡 튀는 성격이 활력소가 되었는데 말이다.

주을의 따가운 눈빛을 피한 해인은 그저 입맛만 다셨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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