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80화 (80/130)

해동의 발돋움 (4)

080화 해동의 발돋움 (4)

바닷가 근처에는 어른 몸통만한 나무가 무성해서 반나절 만에 세 개의 뗏목을 뚝딱 만들었다.

말도 실어야 하고 파도에도 견딜 크기였다.

섬까지의 거리가 삼백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아 대충 만들어도 문제없지만 이번 한 번만 사용할 게 아니기에 튼튼하게 만들었다.

고된 훈련을 견디고 잘 먹기까지 한 호위대들은 힘든 기색이 없었다.

해인의 호위로 발탁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북상하는 틈틈이 무예까지 봐주는 터라 신명이 절로 났던 것이다.

호위들이라고 붙여 준 의병들은 조총을 조금 잘 쏘고 남들보다 말을 잘 탄다는 것 외엔 특별한 게 없었다.

그래서 무병장수할 호흡이라며 태식호흡을 알려 주고 틈틈이 검술을 가르쳤다.

해인의 눈에는 호위는커녕 자신의 앞가림도 못 할 것 같았기에 몸이나마 건사하라고 가르쳐 준 거였다.

뗏목으로 작은 해협을 건넌 후 임시로 머물 막사를 지었다.

섬에도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재목으로 쓸 나무가 지천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진족들은 이 섬을 쿠예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섬은 발해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천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날씨가 지금보다 훨씬 따듯했던 모양이다.

해안부터 시작된 숲은 약 십 리를 지나서야 끝이 났는데, 거기서부터는 숲과 초지가 혼재되어 있었다.

섬 가장자리는 평탄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농사를 지으려면 벌목을 해야 가능할 것 같았다.

해동보다 한참 북쪽이라 농사가 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와르타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섬 남쪽에는 곳곳에 작은 평야가 있다고 했으니까 일단 거기까지 가 보는 게 우선이었다.

길도 없는 곳을 헤치며 남쪽으로 꼬박 닷새를 달린 끝에 거대한 산과 그 앞에 펼쳐진 평야를 만날 수 있었다.

평야라고 하나 듬성듬성 숲이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섬의 최남단은 아니나 날씨는 북쪽보다 훨씬 따뜻했다.

사백 장가량 되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옆으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의 높이도 엄청났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가 북풍을 막아주고 있어서 유난히 따뜻한 것 같았다.

뿔이 유난히 크고 덩치가 말만큼이나 큰 사슴들이 무리를 이뤄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조총으로 몇 마리만 사냥하자. 고기 맛이 어떤지 봐야겠다.”

“예. 장군. 잠시만 기다리소서.”

고기 맛을 보자고 하자 부관 역할을 하는 울아타가 말에서 내려 몇몇 호위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

울아타는 아탕게의 한 살 아래 동생으로 올해 열여덟인데 아탕게만큼이나 기골이 크고 몸이 날랬다.

혹여 여진족과 조우할 경우를 대비해 통역으로 데려온 거였다.

잠시 후 조총의 방포 소리가 조용한 평원에 울려 퍼졌다.

수천 년간 조용히 잠자고 있던 섬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접근해도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풀을 뜯던 덩치 큰 사슴들이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곧이어 울아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장군. 너무 무거워서 끌고 올 수 없나이다. 말민큼이나 무겁습니다.”

“사슴이 맞기는 맞느냐?”

“예. 장군.”

울아타와 호위들이 시냥한 사슴은 다섯 마리였는데 다가가서 살폈더니 여진의 말보다 컸다.

불규칙하게 여러 가닥으로 자란 날카로운 뿔도 어린아이만큼 컸고 다리도 말보다 길었다.

그리고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가죽이 마음에 드는구나. 잘 벗겨서 말려 두어라.”

“한 마리만 잡아도 고기가 넘쳐나겠습니다.”

“나머지는 육포로 말려라.”

해인을 포함하면 서른한 명이다.

장정 서른한 명이 사슴 한 마리로 배를 채울 정도라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슴은 금방 해체되었다.

함경도 산골 출신들이라 사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미는 데 다들 일가견이 있었다.

여기저기 화톳불이 피워지고 때아닌 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술을 가져오지 않은 게 아쉬울 뿐, 호위대 병사들이 표정은 무척 밝았다.

북쪽과 달리 따뜻하기까지 하고 높은 산에서 흘러드는 큰 강이 있고 울창한 나무와 들짐승이 지천인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왁자지껄하며 고기를 뜯는 호위대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터전을 또 하나 얻은 뿌듯함에 해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내일부터는 이곳에 임시 막사를 짓고 주변을 더 살펴본다. 원주민이 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구나.”

“장군. 유황이 있는 곳에 원주민이 살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유황이 있는 곳은 땅에서 수증기가 나와 사시사철 따뜻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 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섬이 얼마나 크면 몇 날을 다녀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더 남쪽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남쪽으로 나흘을 더 달려서야 섬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곳에서 이 섬의 원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생긴 건 여진족이나 조선 사람들하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움막 같은 가옥이 사십여 개가 있었고, 마을 뒤의 야트막한 산에서 흘러오는 냇물에는 수증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유황 냄새가 코를 자극했는데, 아마 마을 뒷산에서 발원한 물에 유황이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유황이 녹은 뿌연 개울물은 무척 따뜻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이 왔음에도 별로 경계도 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잠시 후 부락의 족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일행을 반겼다.

족장은 여진 말이 유창했다.

부락 사람들은 여진족의 후예들이거나 이곳의 원주민이었던 것이다.

유황을 가져가겠다고 했더니 산 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다.

이들에게 유황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르타사 섬에만 가면 유황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족장을 따라 마을을 둘러봤는데, 움막 같은 주거 형태나 입고 있는 복색으로 봤을 때 외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이곳 말고도 다른 부락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섬 곳곳에 크고 작은 부락이 형성되어 있단다.

지독한 유황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면 이미 만성이 된 듯했다.

족장에게 단도와 도끼 등을 선물하자 무척 좋아했다.

얼마 전에 방문한 와르타도 원주민들에게 도끼 등을 줬더니 유황을 캐는 데 도움을 줬다고 했기에 미리 준비한 거였다.

선물을 받은 족장은 자진해서 일행을 유황이 있는 산으로 안내했다.

물은 산 중턱쯤에서 샘솟고 있었는데 유황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물과 함께 뜨거운 수증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주변에는 유황이 덕지덕지 쌓여 있었다.

“가져갈 만큼만 채취하라. 다음에 또 올 것이다.”

“예. 장군. 그런데 올해는 더 오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양껏 가져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봄이나 되어야 또 올 수 있기는 하지.”

유황이 화약의 재료임을 알고 있는 호위대원들은 욕심껏 유황을 채취했다.

봄이나 되어야 또 올 수 있기에 기회 있을 때 많이 가져가려는 것이다.

조총이 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무기이기에 화약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쪽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캔 유황을 마흔한 마리의 말에 가득 실었다.

이번 원정에 열 마리의 말을 더 가져온 덕에 많은 유황을 실을 수 있었다.

말등에 유황을 가득 실은 덕에 정작 해인과 호위대는 걸어가야만 했다.

고생고생하며 뗏목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을 때는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했다.

유황을 보관할 임시 막사를 짓고 서둘러 바다를 건넜다.

* * *

해인을 맞이한 아탕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먼발치에서 섬만 구경하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직접 섬을 답사하고 올지는 몰랐던 것이다.

“형님. 눈이라도 내려 길이 막히면 어쩌려고 그렇게 무리를 하셨소.”

“내가 말했잖으냐. 이곳은 바다의 영향으로 함경도보다 더 따뜻하다고.”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를 바 없는데 뭘 그러오. 눈에 갇히면 오도 가도 못 하니까 그렇지요.”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눈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느냐. 눈이 왔다고 사냥을 멈출 수도 없잖으냐.”

아탕게는 해인이 돌아와야 할 기일에 돌아오지 않자 어지간히 속을 끓였던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탕게는 엄청난 유황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형님. 그 섬에는 유황이 지천인가 보오.”

“그래. 이제 유황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초석만 있으면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원주민들도 적대적이지 않아 보이고.”

고립되어 살아서인지 적대적이기는커녕 무척 반겼다.

아마 가란구륜 족장의 맏이인 와르타가 유황을 채취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잘 대해 줬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면 같은 여진의 후예기에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던지.

“원주민들이 얼마나 되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이백여 명 정도 되더구나. 섬에는 작은 부락이 여럿 흩어져 있다고 했으니까 많아 봐야 몇천은 넘지 않을 게다.”

부락끼리 적대적이지 않고 대체로 우호적인 것 같았다.

전혀 무장하지 않고 있기에 그리 짐작하는 거였다.

무슨 이유로 섬에 들어와 살았는지 모르나 다른 부락을 취하고 세를 불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사는 삶이라 뺏을 것도 없어 보였지만.

“형님. 그 섬을 해동의 영역으로 하려 하오?”

“너는 머리 위에 누가 올라앉아 있는 걸 봐줄 수 있겠느냐?”

“말도 안 되오. 절대 용납하지 못하오.”

해인 또한 마찬가지로 해동 위쪽에 적대 세력이 될지도 모를 존재를 그대로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만 반발하지 않는다면 서로 공존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해동 부락에 사람이 늘어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곱게 볼지 걱정이오.”

“해동에 동화시켜야지. 서로 교류하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그늘에 들어오지 싶다.”

사람이란 새로운 문물을 접하다 보면 그 편리함에 젖어 들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해인이 방문했을 때 원주민 젊은이들 중 일부가 호위대를 보고 무척 부러워하는 걸 봤던 것이다.

고립된 생활을 강요받고 있던 젊은이들로서는 말을 탄 호위대들이 흠모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럼 내년 봄에는 본격적으로 움직여봐야겠군요.”

“농기구를 전해 주면 좋아할 게다. 아직도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더구나.”

“철제 농기구도 없다면 아예 외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모양이오.”

조선만큼이나 큰 섬에 겨우 몇천의 사람들이, 그것도 호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진족과 원주민이 산다면 당연히 받아들이던 복속시켜야 한다.

강압적으로 합치지 않고 자연스레 해동에 동화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대강 훑어봤지만 섬을 차지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능히 나라를 만들어도 될 만큼 넓었고, 당장 왜와 건주여진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유황뿐만 아니라 배를 곯을 일이 없을 만큼 사냥감들이 지천이었다.

또 엄청난 숲과 너른 들판도 해인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막연히 걱정했던 농사도 원주민들의 나무 농기구를 보는 순간 해소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너른 땅 어딘가에는 은이나 철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고.

감사합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