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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82화 (82/130)

조선의 반격 (2)

082화 조선의 반격 (2)

녹둔도로 가는 길에 족장이 거주하는 부락을 들렀더니 주을이 해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금방 돌아올 것처럼 약속했으면서도 이제야 나타났으니 속깨나 끓였을 터인데 예전처럼 함부로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다.

많이 조신해진 것이다.

그동안 주을의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던 터라 조금은 미안했다.

그래서 해동에서 잡은 물개 가죽을 내놓았더니 활짝 웃었다.

자신을 생각해서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척 바쁘셨나 봐요.”

“섬에 유황을 채취하러 갔다 왔소.”

“큰 오라버니가 가져온 유황도 많을 터인데 어찌 직접 섬에 가셨는지요?”

“그곳을 우리 영역으로 삼을 생각에 다녀왔소.”

“섬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공주도 보면 흡족해할게요. 들짐승들이 지천이라 사냥하기에도 그만이오.”

사냥 얘기가 나오자 주을의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요즘 조신한 규수 흉내를 내느라 좀이 쑤셨을 거였다.

“무릉도원만큼이나요?”

“그곳보다 더 많은 것 같았소. 그리고 이제는 무릉도원을 해동이라 부르기로 했소.”

“이름이 예쁘군요. 우리 부족도 아직 지명이 없는데 이제 막 터를 잡기 시작한 곳에 지명을 붙이다니···.”

“족장님께 말씀드려서 이곳과 두 분 형님이 계신 곳에도 지명을 붙이자고 해야겠소.”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이제껏 그런 것에는 다들 무신경했거든요.”

오죽하면 족장의 이름을 빌려 가란구륜 부족이라 했겠는가.

거기에다 문자가 없고 노략질만 일삼는다 하여 오랑캐라고 얕잡아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지명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구전으로 전해 오는 지명이 있으나 사람마다 제각각 달리 부르니 그걸 지명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진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았기 때문이오. 그런데 족장님 대에 와서 한곳에 정착을 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그러면 뭐 하겠어요. 파렴치한 짓을 해도 그게 부끄러운지를 모르는 전사들이 아직도 널려 있는데요. 우리 부족이라도 변화할 수 있게 낭군께서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 주세요.”

주을이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여진족이 지금껏 어떤 짓을 했는지, 그게 왜 부끄러운지를 알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두 분 형님들은 지금껏 잘하고 계시잖소. 그리고 부족의 일에 소관이 함부로 관여해서는 안 되오. 해동이 좀 더 부족에 동화된 후라면 모를까.”

“무슨 뜻인지 잘 알지만......”

주을은 조선인 유모 할머니의 영향으로 학문도 익히고 조선의 풍습도 잘 안다.

몸만 여진족이지 머리는 조선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주을이기에 멀쩡하던 조선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왜군이 조선을 삼키면 북쪽도 위험하고, 그게 아니라도 같은 종족인 건주여진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니만치 지금 가란구륜 부족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공주가 그런 걱정을 하는지는 몰랐소. 형님들과 상의해서 변화를 이끌어 보겠소. 하루아침에 변화될 거라고 생각하진 마시오.”

“고마워요. 우리 부족과 해동 사람들이 함께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이미 함께하고 있다오.”

“그게 무슨···.”

“포도아의 범선이 그 시작이오.”

* * *

녹둔도에는 수비대 오십 명이 주둔하고 회령의 은광에도 같은 수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쇠돌과 교대한 수비대장은 만석으로 척후조장에서 일약 일백 명의 병사를 책임지는 지휘관이 된 것이다.

해인이 녹둔도에 도착하자 토성 밖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독려하던 만석이 반겨 맞았다.

“장군. 원로에 고생 많으셨습니까.”

“이곳은 별일 없었느냐.”

“별일 없었소이다. 다만 경흥 부사께서 장군을 여러 번 찾으셨습니다.”

“경흥 부사가? 급한 일이라던가?”

“그리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으나 상의할 일이 있다고 오시는 대로 들러 달라 당부했나이다.”

경흥 부사가 해인과 상의할 일이 뭐 있을까.

왜군이 밀고 올라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일 도문강을 건너보면 알 일이다.

“회령 은광도 별고 없겠지?”

“주변 수령들이 자주 사람을 보내 기웃거린다 하옵니다.”

왜군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이제야 기를 편 육진 수령들이 은광을 기웃거리는 것이리라.

그래 봐야 함경도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던 해인의 의병들이 주둔하는 곳이기에 감히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주상이나 조정의 존재가 유명무실한 때라서 무력을 가진 자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왜군을 토벌한 건 관군이 아니라 의병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방 수령들이 토벌에 일조를 했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주지 않았겠는가.

“내일 경흥 관아로 갈 것이다.”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만석은 병사들을 이끌고 무력시위라도 할 생각이었다.

왜군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자 각 고을의 수령들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아니다. 호위대만으로도 충분하다. 괜히 부사를 긴장시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 토성 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던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안 그래도 이주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꾸역꾸역 몰려드니 쫓아낼 수도 없고···.”

“곡식은 충분하느냐?”

“경흥 관아에서 수시로 보내 주어 이주민들이 굶을 일은 없습니다. 다만 녹둔도에서 수용할 인원을 초과하는지라 어찌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몇 년 동안 가뭄이 들고 거기에 왜란까지 겹쳐서 각 관아에는 환곡할 곡식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경흥이나 경원 등은 왜군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았기에 추수를 마칠 수 있었고 관아에는 곡식이 제법 쌓여 있었다.

해인의 의병들이 야금야금 빼먹은 게 제법 많았지만 아직 여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모였느냐?”

“일백여 가구에 육백이 넘사옵니다.”

“녹둔도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느냐?”

“오십 가구가 적당합니다. 다행히 무서리가 내리고부터는 도문강을 넘는 사람이 없습니다.”

녹둔노가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지금 이들을 해동으로 보내면 임시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고생이 막심할 것인데···.

그러나 토성 밖에 움막을 치고 있는 것보다는 해동이 더 낫다.

이곳은 나무가 없어서 거처를 만들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염두를 굴리던 해인은 결심을 굳혔다.

“겨울을 날 일이 걱정이구나.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지 않았으니 전부 해동으로 이주를 시켜야겠구나. 자네의 수비대가 호위를 맡아라.”

“그리되면 녹둔도가 비는데···.”

“회령에 있는 수비대를 이쪽으로 옮기면 된다. 호위대도 있으니까 어찌 꾸려갈 수 있다.”

“장군. 호위대가 겨우 이십 명이오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회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에 굳이 수비대를 둘 필요는 없었다.

여차하면 해인과 이십 명의 호위대가 경비를 하면 될 일이고.

호위대 중 열 명을 선원들을 선발하라고 해동으로 돌려보낸 게 아쉽긴 하지만 나머지 호위대들도 모두 조총을 갖고 있어서 일당십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럼. 소인은 내일 일찍 이주민을 끌고 출발하겠습니다.”

“곡식도 모두 챙겨가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도착하도록 서둘러라.”

“예. 장군.”

녹둔도를 비운다고 큰일이 날 것도 아니었다.

지금 모인 사람들이라도 데려가는 게 맞다.

전황이 조선에 유리해지면 사람들이 굳이 북쪽으로 가려하지 않을 것이니까.

사람 수를 늘릴 수 있을 때 늘려 놓아야 한다.

만석은 해인이 왜 무리를 하는지 알기에 군소리 없이 따랐다.

이주민을 이끌고 그 먼 곳까지 갈 생각을 하면 고생길이 훤했다.

* * *

만석이 녹둔도를 비우고 떠나자 해인은 호위대를 이끌고 경흥으로 들어섰다.

약간 쌀쌀한 날씨임에도 저잣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곳 분위기로 봐서는 조선에 전란이 일어났다는 걸 실감할 수 없었다.

이건 모두 해인이 회령에서 경원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막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곳마저 왜군에게 뚫렸다면 도문강 유역의 고을들은 쑥대밭이 되었을 거였다.

해인과 호위대가 말에서 내려 관아 길로 들어서자 저잣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일부는 탁주가 든 바가지를 내밀며 권하기도 했다.

이미 해인과 의병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경흥에서는 무관 최승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을 척살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십 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관아에 들어서자 부사 전은겸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이 사람아. 도대체 어딜 다니기에 이리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가.”

“영감. 별고 없으셨는지요. 소관은 그동안 건주여진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나이다.”

“별일 없었는가?”

“동해여진을 자주 도발하고 있나이다. 소관의 의병들과도 몇 번 부딪쳤습니다.”

해인은 건주여진을 핑계 삼았다.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부사의 소임인데, 해인이 대신해 준 셈이니 군소리가 있을 수 없었다.

“어허! 이를 어쩌나. 그전에는 우리 조선의 눈치를 살피더니 왜란으로 혼란한 틈에 대놓고 설치는 게 아닌가.”

“여진을 일통하겠다는 의지인 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조선이 될 것이지만 부사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어서 말을 아꼈다.

“최 교위의 노고가 크네. 요즘 육진의 지방관 중 누구 하나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지 않아 고심이 컸네만 자네 덕에 놈들의 움직임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일세. 건주여진과 부딪쳐 다친 자는 없었는가?”

“전투 중에 어찌 다친 자가 없었겠습니까만 영감께서 보내 준 의원들 덕에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의원이 더 필요하지는 않는가?”

부사 전은겸은 혹시 관군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할까 봐 얼른 의원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해인으로서는 바라던 바였지만 말끝을 살짝 흐렸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전장에 나설 의원이 있을지···.”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의원이 마른 땅 진 땅 가린다면 경을 칠 일이지.”

“지당하신 말씀이오이다.”

“본관이 책임을 지고 젊은 의원 한두 명을 더 보내 주겠네. 다친 의병들을 치료해야 또 싸울 게 아닌가.”

해인이 다른 부탁을 하지 않자 부사는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감사하오이다. 영감.”

“감사는 본관이 해야지. 최 교위 덕에 주상 전하에게 내 위신을 세울 수 있지 않았겠나.”

“의주에 계시는 주상 전하께서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요즘은 장계에 일일이 답을 내리시는 걸 보면 조금 여유를 갖게 된 모양일세. 조만간 명의 2차 원군이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함세.”

명나라가 원군을 보낼 거라는 걸 지방관이 소문으로 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으니 믿어 보는 수밖에.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객사에 하루 묵으면서 나와 함께 곡주나 마시고 노독을 좀 풀게.”

“영감. 밖에 의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오리까?”

“행랑에 묵도록 조치하겠네. 술과 고기도 넉넉히 내릴 것이니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러더니 해인을 이끌었다.

동헌에서 나온 부사는 객사로 가지 않고 내아로 발걸음했다.

내아는 부사의 살림채인 사적인 공간이라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면 객사에서 연회를 베푸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왜 내아로 가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란으로 한성에 있던 식솔들을 경흥으로 불러들인 걸 알고 터라 내아에 발걸음 하기가 망설여졌다.

“영감. 내아에는 왜···.”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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