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반격 (3)
083화 조선의 반격 (3)
전은겸 부사의 식솔이 머무는 살림채인 내아로 들어서자 중앙에는 돌로 두른 작은 연못이 눈에 띄었다.
연못 중앙에는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살림채는 두 개였는데 앞뒤로 나란히 서 있었고 그중 앞쪽에 있는 기와집의 사랑채로 들어섰다.
사랑채에 들어온 해인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부사에게 여쭈었다.
“영감. 객사도 있는데 내아에서 굳이···.”
“객사에는 듣는 귀가 있잖은가. 최 교위가 온다는 기별을 듣고 내자에게 주안상을 준비하라 했으니 편히 들게.”
“한낱 무관을 이리 대접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왜군들에게 저승사자로 통하는 자네가 어찌 한낱 무관인가. 본관 또한 자네 덕에 주상 전하로부터 과한 상찬을 듣고 있다네. 그래서 작은 성의를 표하려는 것일세.”
경흥 부사는 아마 해인을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일 거였다.
관아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고 해인의 전공을 고스란히 받아먹고 있었으며 의주에 있는 주상으로부터 온갖 칭찬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여진의 동향까지 빠짐없이 알려 주는 지방관이 요즘 같은 때 누가 있겠는가.
해인이 경흥 부사를 충신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후, 사랑채 문 앞에서 주안상을 들이겠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 주안상을 준비하였나이다.”
“이리 들여라.”
문이 열리더니 계집종 둘이 상을 맞잡고 들어섰다.
상 위에는 돼지고기와 생선 구이, 소채 무침 등이 다였지만 전란 통에 이 정도면 산해진미나 다름없었다.
해인으로서는 눈이 돌아갈 음식들이었다.
기껏 먹어봐야 찐쌀과 육포가 전부였고 시간이 남아 사냥이라도 해야 노린내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시게.”
“소관에게는 과분한 음식입니다.”
“잘 아네. 매일 노숙을 하며 거친 음식만 먹었을 테니 따뜻할 때 어서 들게.”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체면 불고하고 술과 고기를 부지런히 입속으로 넣었다.
해인이 하도 맛나게 먹어서인지 부사의 젓가락도 번갈아 상 위를 오르내렸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해인이 부사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영감. 긴히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자네의 의병들이 회령 근처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왜군들이 유난히 회령에 미련을 두는 것 같아 경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혹시 자네도 들었는가?”
“무슨 소문인지···.”
“잠채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아무래도 자네의 활약에 배가 아파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네.”
최근에 주변 관아에서 은광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했었다.
다행인 것은 경흥 부사가 해인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소문을 낸 자들은 해인의 전과를 음해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전란 중에 은을 잠채하여 어디에 써먹겠는지요. 왜군과 싸우려고 땀 흘려 훈련하고 있는 의병들이 듣는다면 맥이 빠질 일이오이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회령에서 철수하겠습니다.”
해인은 당장이라도 철수할 뜻을 비추자 부사가 펄쩍 뛰며 만류했다.
“어허! 너무 흥분 말게. 그래서 본관이 나서려는 게 아닌가. 힘을 합해 왜군을 상대해도 시원찮을 판에 내부에서 공을 깎아내리려는 자들이 있으니 장차 이 조선이 어찌 될지 걱정이네.”
“일부 수령들이 예전에도 잠채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마 혼란한 틈을 타 욕심을 채우고 싶은데 소관의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눈엣가시 같겠지요.”
“무엇이? 국법으로 막은 채굴을 지방관들이 앞장서서 잠채했다는 말인가?”
“예. 영감.”
조선에서 금이나 은을 잠채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지방관과 육방 관속들이 은밀하게 끼어 있는 건 당연지사였고.
그렇기에 해인도 박이규를 부추겨 잠채를 하는 것이지만.
“당장 장계를 올려 자네를 음해하는 자를 가려내 달라고 하겠네.”
“그럴 게 아니라 소관이 움직여 보겠습니다. 아직 소관의 임무가 철회되지 않았으니 국법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해인은 여진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암행어사인 허인회의 명으로 경흥에 남아 있던 터였다.
아직 해인의 임무를 거두어들이지 않았기에 암행어사의 수행 무관의 신분은 여전한 셈이었다.
거기에다 의병을 일으켜 눈부신 전과를 올린 의병장이기도 하고.
“아닐세. 임의로 움직여서는 안 되네.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고 움직이게. 본관이 그리 만들어 보겠네.”
부사로서는 해인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주변 지방관들보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도 해인 덕분이지 않은가.
가토의 측근 장수를 사로잡아 의주로 압송한 것으로 이미 주상의 상찬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해인이 잘못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의주에 있는 주상 전하께서 사소한 일에 나설 경황이 있겠나이까.”
“이것보다 중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가. 의병의 사기를 깎아내리는 일이 곧 왜군을 돕는 것인데. 자네에게 힘을 실어 달라고 주상께 주청하겠네.”
“감사합니다. 영감.”
“오히려 내가 할 소리일세.”
* * *
다음 날, 해인은 바로 경원으로 향했다.
경흥 부사는 하루 더 쉬어가라고 붙잡았으나 객사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채를 한다는 소문이 났다면 일단 멈춰야 한다.
가토의 병사들이 운반하던 은을 노획했기에 포도아 등과 교역할 여력은 충분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해인과 이십 명의 호위대가 경원 관아에 들이닥치자 경원 부사 최우돈이 얼굴이 노래진 채 달려 나왔다.
갑자기 의병이 나타났다는 건 곧 왜군이 들이닥친다고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부사의 염소수염이 덜덜 떨리고 입가에는 버캐가 허옇게 끼어 있었다.
중참 때가 조금 넘었건만 아직도 얼굴이 불콰한 걸 보니 밤새 주독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부사 영감께 인사드리오. 의병을 이끌고 있는 교위 최승우라 합니다.”
“그대가 위명이 자자한 최 교위인가? 갑자기 무슨 일인가? 혹시 왜군이 가까이 온 것인가?”
“회령 쪽으로 자주 출몰한다 하여 급히 그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럼 회령으로 가야지 여긴 어인 일인가?”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잡고 왜군을 치러 가는데 의병들이 먹을 곡식이 떨어져서 부사 영감께 들렀습니다. 사정이 되는 대로 곡식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전하의 어명으로 출정한다는 말인가?”
최근에 눈부신 전과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래 봐야 정육품 무관에 불과하다.
그런 자가 주상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았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주상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봉수대가 무너져 조선의 연락 체계는 현재 마비 상태였다.
그러니 변방의 수령으로서는 도대체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아직 모르고 계시었소이까? 지금 의주에서 평양성을 탈환한다고 노심초사하고 있나이다. 곧 명에서 2차 원군을 보낸다니까 조만간 평양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뭣이? 평양성을 되찾는다고?”
“소관도 경흥 부사께 들은 얘기인지라···.”
평양성을 되찾는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냉수를 벌컥거렸다.
그리되면 주상이 정상적으로 정사를 볼 것이고, 그동안의 논공행상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대로 주독에 빠져 있다가는 부사 자리도 불안해진다.
물론 개전 초기에 정문부를 도와 의병을 일으키는 데 일조를 하긴 했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서 내심 찜찜해 있었다.
“최 교위. 본관이 도울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보게. 곡식이야 당연하고 그 외에 필요한 게 있는가?”
“최근에 소관과 의병들을 음해하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니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좀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소문인데 그러나?”
“소관이 회령에서 잠채를 한다는 말이 나돈다 하오이다.”
그러자 부사 최우돈이 펄쩍 뛰었다.
“아니. 왜군을 상대하기도 바쁜 귀관이 무슨 수로 잠채를 한다고.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 그런 음해를 한다는 겐가? 내가 나서서 확실히 뿌리를 뽑겠네.”
“경흥 부사도 주상께 장계를 올려 일벌백계하겠다고 벼르고 있나이다. 영감께서도 소관의 억울한 처지를 살펴 주십시오. 왜군을 상대하기도 바쁜데···. 영 맥이 빠지옵니다.”
“이를 말인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회령에 기웃거리는 왜군이나 도륙 내 주게나.”
* * *
경원 관아를 빠져나오는 해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경원의 최 부사는 왜란이 벌어졌어도 하릴없이 밥만 축내었던 터라 곧 조정이 정상화되면 뽑혀 나갈 일만 남은 인물이다.
해인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면 나름 후방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포장할 수 있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설사 잠채한 증좌가 있다 해도 아니라고 대변해 줄 수령을 한 명 더 확보한 셈이어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 목적지는 회령이었다.
박이규가 잠채하는 은광은 회령 관아에서 북쪽으로 삼십 리가량 떨어진 청초산에 위치해 있었다.
청초산은 종성부와도 인접해 있어 종성 부사도 은광에 관심을 두고 있을지 모른다.
해인이 은광에 당도하자 박이규가 반겨 맞았다.
“어서 오게. 아우님. 이러다가 얼굴 잊어먹겠네.”
“형님. 고생이 많으시지요.”
“나야 입으로만 일하는데 무슨 고생이겠나. 수비대원들과 일꾼들이 고생이지.”
“은 채굴은 어찌 되어 가오?”
“제법 모았네.”
박이규는 그동안 모은 은을 내보이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왜군에게서 탈취한 양보다는 훨씬 적었으나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이 제련해 놓았던 것이다.
“요즘도 이곳을 기웃거리는 자들이 있소?”
“수비 대원들이 산 입구에서 잘 막고 있네. 의병들이 간자라고 으르딱딱거렸더니 곱게 물러가더군.”
기웃거리는 자들을 왜군의 간자로 몰아붙이자 끽소리도 않고 물러갔단다.
“누가 보낸 자들인지 확인해 보았소?”
“회령 관아에서 나왔다더군. 왜란 전에도 이방을 앞세워 잠채를 했다는 게 일꾼들의 증언일세. 그동안 꽤나 많이 파먹은 것 같네.”
“형님. 아무래도 잠채를 중단해야겠소.”
“이제 본격적으로 채굴할 판인데 여기서 멈추자고?”
“경흥 부사가 의주에 있는 주상에게 장계를 올린다 했으니 곧 비답이 내려올 것이오.”
“그럼 근처의 지방관들이 확인하러 오겠네그려.”
“예. 그러하오. 이쯤에서 철수해야겠소.”
“그런데 땅을 파헤친 게 드러날 텐데 어찌하면 되겠나?”
“애써 판 굴이기는 하나 무너뜨려야지 어쩌겠소.”
주상의 비답이 당도하기까지 잠채한 걸 감출 시간은 충분했다.
나무를 벌채한 것이야 의병들의 숙소를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하면 될 일이고, 은광은 무너뜨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곧 눈이 내려 주변이 덮일 것이고 봄이 오면 풀이 자라 언제 잠채를 했는지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알았네. 굴을 무너뜨리고 철수하세.”
“형님. 나중에라도 잠채할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니까 입구 쪽만 무너뜨리는 게 어떻소?”
“과연 그런 때가 올까?”
“세상일을 어찌 알겠소.”
“미련을 접으세. 나중에라도 굴이 발견되면 구설에 오를 수도 있으니 철저히 무너뜨리는 게 낫지 싶네.”
“알았소. 형님 뜻대로 하시오.”
은광이야 해동에도 있을 수도 있고 섬에도 있을 것이어서 미련을 접기로 했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가 괜히 역적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으니까.
뭐든 역모로 몰아붙이는 주상이고 보면 잠채를 이유로 누명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님. 일꾼들에게 품삯을 후하게 주어 뒷말이 없도록 하시우.”
“저들을 모두 해동으로 데려갈 생각이네. 채굴도 잘하지만 은을 분리해 내는 능력도 탁월하다네. 앞으로 써먹을 일이 많을 걸세.”
“일꾼들이 그 먼 데까지 가려 하겠소?”
“이미 얘기가 다 되었네. 아우님이 무리를 이끌 것이라 했더니 다들 따른다고 했네.”
왜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당장 먹고살 일이 걱정인 백성들로서는 배만 곯지 않는다면 어디든 갈 판이었다.
“어허! 이러다가 소제가 역모를 획책한다는 소리를 듣게 생겼소.”
“하하하··· 백성을 빼돌렸으니 이미 역모나 다름없지 않은가.”
“형님. 말이 씨가 되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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