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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84화 (84/130)

조선의 반격 (4)

084화 조선의 반격 (4)

회령 은광을 폐쇄하고 서둘러 철수한 후 박이규와 일꾼들을 수비대 오십 명과 함께 해동으로 먼저 보내고 전황을 알아보기 위해 경흥 관아에 들렀다.

의주에 있는 주상이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르기에 늘 귀를 열어 놓고 있어야 한다.

해인이 경흥 관아로 들어오자 전음겸 부사가 희소식을 알려왔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거였다.

명군이 조선에 도착하면 곧바로 평양성을 탈환한다며 자못 흥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도 길주로 가서 정문부 병마평사를 도우는 게 어떤가.”

정문부가 종성과 경원 부사를 독려하여 의병을 조직한 건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왜군에게 넘기자 분기를 못 참고 일서선 게 계기가 되었다.

주상이 조정 신료와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주로 몽진을 떠나자 민심이 이반되어 백성들이 왜군의 앞잡이로 돌아서는 일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순왜라고 불렀는데, 의병들은 순왜부터 잡아 족쳐서 왜군에게 조선군과 의병들의 정보가 넘어가는 걸 차단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순왜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왕자들을 왜군에 넘긴 국경인이었다.

“영감. 소관이 정문부를 돕고 싶지만 건주여진이 걱정되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나이다.”

“당장은 왜군이 먼저일세. 주상 전하께서도 그런 취지의 교지를 내리셨네.”

아마 주상은 명군에게만 전장을 맡기지 않고 각지의 수령들도 호응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싶사오나 병마평사가 소관의 등장을 마땅치 않아 할 수도 있습니다.”

병마평사는 종6품의 문신으로 병마절도사의 참모 격인데, 주로 하는 일은 군기, 고과 등을 다룬다.

또 하나는 무신 수령들과 만호 등을 견제하고 규찰하는 임무도 있다.

하여 무신들과 척을 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문부의 나이가 스물일곱으로 해인보다 많으나 한 품계 아래다.

그런지라 서로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도 있었다.

“정문부는 내가 잘 아네. 문관이긴 하나 무예도 제법 있다네. 무관들과도 잘 지낸다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여기서 발을 빼면 오해를 산다.

사실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왜란 때문이지 여진족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해인이 스스로 살길을 찾는답시고 여진족의 움직임을 부풀렸던 것이다.

“누루하치의 움직임도 살펴야 하니 전부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소관을 따라온 의병들만 데리고 길주로 가겠나이다.”

“잘 생각했네. 서신을 써줄 것이니 병마평사에게 그걸 보여 주게. 반겨 맞을 것이네.”

경흥 부사의 얼굴만 본 후 몸을 빼내어 해동으로 향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명의 원병이 평양성을 무사히 탈환하려면 사방에서 왜군을 흔들어 놔야 한다.

이런 중차대한 때 눈에 띄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세운 공이 고스란히 날아가고 의심 많은 주상의 곱지 않은 시선만 받을 뿐이다.

해동이 자리 잡을 때까지는 조선에 선을 대고 있어야 하기에 참전은 불가피했다.

* * *

해인과 이십 명의 호위대는 곧바로 길주로 향했다.

겨우 이십 명의 적은 인원이긴 하지만 전원 말을 타고 조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해인이 직접 지휘하는 터라 일당백의 전력이라 해도 무방했다.

길주에 가까워지자 곳곳에 전란의 상흔이 눈에 보였다.

크고 작은 고을의 집들은 온통 불타 초토화되었고, 방치된 시체는 들짐승에 훼손되어 섬뜩할 정도였다.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몰골들은 뼈에 가죽만 남은 형상으로 그래도 살겠다고 불타 허물어진 집을 보수하고 있었다.

마을의 논밭은 농부의 손길이 끊어진 지 오래라 바짝 마른 풀만 가득했다.

사월에 왜란이 시작되어 불과 한 달 만에 조선의 반이 왜군에 짓밟혔으니 제대로 남아난 게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각지에서 의병들이 조직되어 관군 대신에 왜군을 괴롭혔기에 함경도 북부와 평안도 북부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남쪽은 소식이 끊겨 온전한지의 여부도 모르고 있고.

왕과 신료들은 조선으로 넘어온 왜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복잡한 심정으로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전방으로 척후를 갔던 호위병이 먼지를 날리며 돌아왔다.

“장군. 오 리 거리에 왜군의 주둔지가 보입니다.”

“몇이나 되더냐?”

“일백이 조금 넘습니다.”

최근에 왜군들은 의병들의 공격에 대비해 최소 삼백 명 이상의 단위로 움직이거나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겨우 일백이 넘는 병사가 머물고 있다면 주둔지가 아니고 초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곧 근처에 대규모 군사가 있다는 뜻이다.

길주 아래에 단천이 있고 그곳은 대규모 은광이 있는 곳이라 가토가 그곳에 똬리를 틀고 은을 채취하고 있을 거였다.

일전에도 은을 빼앗겼으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을 터.

괜히 건드렸다가는 본진의 공격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지금은 정문부의 의병과 합세하기 위해 가는 길이라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정문부의 의병이 어디에 활약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조선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왜군의 첩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회할 길이 있느냐?”

“산으로 가는 수밖에 없나이다.”

“답답할 노릇이구나. 의병들이 어디에서 활약하는지를 알아야 될 터인데···. 일단 초소는 피해야겠다. 앞장서라. 지금부터는 말발굽에 감발을 하고 움직인다.”

말발굽에 마른 풀을 감아 감발을 하고 바로 옆 산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가토군의 본거지기에 어디에 왜군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병들도 벌판에 진을 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 요행히 산속에서 만난다면 다행이고.

* * *

길도 없는 산속을 말을 끌고 다니는 건 한마디로 고역이었다.

그나마 풀이 마르고 나무이파리가 떨어져서 시야가 확보되었기에 다행이었다.

계속 전진해도 왜군은커녕 짐승조차 보이기 않았다.

산속까지 왜군들이 감시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앞장서서 길을 여는 해인은 기감을 활짝 열어 놓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던 해인이 별안간 손을 번쩍 들고 일행을 멈춰 세웠다.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전방에 누가 있다. 말 울음소리가 안 나도록 재갈을 잡아라!”

억눌린 소리지만 이십 명의 호위대는 모두 해인의 말을 들었다.

거리는 일백 장.

바람결에 묻혀 들려오는 소리는 조선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여진이 있을 리 만무하니 왜군일 게 분명했다.

말들을 한자리에 묶어 두고 호위대 다섯에게 지키게 한 후, 해인을 비롯한 열여섯은 조총을 장전하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해인의 손에는 표창까지 들려 있었다.

인기척으로 보아 적어도 이십여 명은 넘어 보였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이렇게 크게 인기척을 낼 정도면 근처에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아무리 긴장을 풀고 있더라도 초병은 세웠을 것이다.

초병을 소리 없이 제압하려면 표창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그동안 대장장이 장쇠에게 명하여 표창을 수십 개나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경원으로 넘어오는 고갯마루에서 표창을 요긴하게 써먹었기에 더 만들었는데, 그걸 본 아탕게도 요즘 표창 던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반 식경쯤 전진하자 빽빽한 숲이 사라지고 갑자기 환해졌다.

산속의 공터가 있기가 쉽지 않은데 전방에 공터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왜군들은 방만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방금까지 뭘 먹었는지 나뭇가지로 이를 쑤시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타구니를 긁으며 낄낄거리는 자도 있었다.

음식을 해 먹고 잠시 쉬는 모양새였다.

숫자를 세어 보니 스물세 명이었다.

조총으로 한 번에 모두 제압할 수는 없으나, 해인이 손을 거들면 조총을 재장전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는 숫자였다.

특이한 건 바지저고리 차림의 조선 사람들이 셋이나 왜군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약 이십 장 가까이 접근한 후 호위대원들에게 각자 쏴 맞춰야 할 왜군을 지정해 주고 손을 들어 심지에 불을 붙이게 한 후 표창을 더 꺼내었다.

꽝! 꽈광!

잠시 후 조총 소리가 온 산에 요란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해인의 손에 들려 있던 표창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해인이 양손으로 두 번째 표창을 날린 후에는 멀쩡히 서 있는 왜군이 넷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중 셋은 조선인이고 하나는 왜군의 지휘관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넋이 나간 조선인은 머리를 땅에 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환도를 빼든 해인이 바람처럼 공터로 달려 나갔다.

혹시라도 지휘관이 조총을 꺼내 들까 싶었던 것이다.

왜군 지휘관은 검을 미처 꺼내 들지도 못하고 혼이 나간 듯 서 있기만 했다.

“조선 백성은 고개를 들라.”

해인의 명에도 고개를 박고 있던 조선인들은 호위대가 발길로 옆구리를 내지르자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난리 중의 조선 사람치고는 그리 말라 보이지 않았다.

이자들이 말로만 듣던 왜군에 빌붙었다는 순왜들이었던 것이다.

“이놈들이 전부더냐?”

“······.”

“그새 조선말도 까먹었느냐? 피를 봐야만 입을 열겠구나.”

환도를 위로 쳐들자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나리. 살려 주시오.”

“죽지 못해 왜놈들에게 붙어 있나이다.”

“당장 먹을 게 없어 처자식이 굶는데 어찌하오.”

저마다 죽어가는 소리로 한마디씩 했다.

마지막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나섰다는 자는 오히려 당당했다.

조선이 자신에게 해 준 게 뭐냐는 표정이었다.

“살고 싶으면 묻는 말에 답을 하라. 이놈들이 전부냐고 묻고 있잖으냐.”

“예. 나리.”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더냐?”

“의병들의 동태를 살피러 나온 척후이옵니다.”

척후라면 인기척을 죽이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떠들썩하게 음식을 해 먹고 널브러져 있는 건 군기가 문란하다는 방증이다.

오랜 원정으로 왜군들도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근처에 의병이 있느냐?”

“얼마 전까지 이 근처에 있었으나 왜군이 추적하자 다른 곳으로 옮겼소이다.”

“옮긴 장소는 아느냐?”

“그걸 알 수 없어서 이곳에 이틀째 대기하는 중이오이다.”

이를테면 수색대인 셈인데,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있다는 말이었다.

해인도 의병을 만나기 위해 돌아다니는 터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문부와 의병들이 장소를 자주 옮겨 다닌다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산속을 계속 헤매고 다닐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 왜군 척후대도 궤멸시켰고 순왜와 왜군 포로 한 명도 잡았으니 나름 의병 활동을 한 셈이기에 이쯤에서 철수할 생각이었다.

“너희들의 죄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

“나리. 차라리 여기서 죽여 주시오.”

“어찌 내가 사사로이 목숨을 취한단 말인가. 국법을 어겼다면 죗값을 치러야지.”

“나라에서 배고픔을 해소해 주지 않으니 스스로 살길을 찾은 게요. 그게 어찌 무슨 국법을 어겼다는 말이오.”

순왜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악에 바쳐 소리를 질렀다.

관아에 끌려가면 온갖 고문 도구를 동원해 반병신으로 만들 것이고 급기야는 목을 베어 효시할 거였다.

그러느니 이 자리에서 죽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

“왜란 중에 너희들만큼이나 힘들고 배고픈 백성들이 한둘인지 아느냐. 그럼에도 의병이 되어 왜군과 싸워 피를 흘리고 있다. 여기 있는 의병들도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뭐 어떻다고?”

“잘난 자들은 의병이 되고 못난 우리들은 한 끼라도 배불리 먹으려고 왜군에 붙은 것뿐이오. 우리는 못나서 그런 것이니 뭐라 마시오.”

이제는 숫제 막 나가고 있었다.

벼슬아치들과 양반의 등쌀에 치여 짐승처럼 살았으니 이러는 것도 이해는 되었으나, 왜군에 붙어 조선 백성들의 적으로 돌아선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철수하라. 포로들은 회령 부사에게 넘기고 간다.”

“예. 장군.”

회령 부사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는 포로들을 그쪽에 넘겨주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광산에 부사가 사람을 보냈다면 잠채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획한 조총과 포로를 넘긴다면 회령 부사의 체면도 살려 주는 터라 잠채가 의심스러워도 그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나중에라도 잠채한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은광을 조금 건드렸다고 할 작정이었다.

물론 주상이 안다면 국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 수도 있겠으나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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