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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87화 (87/130)

해동의 겨울 (3)

087화 해동의 겨울 (3)

해인은 아탕게와 함께 호위 병사들만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족장의 첫째인 와르타 부락에 들렀다가 둘째인 아골타 부락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이주민들의 임시 숙소가 마련되었고 굶주릴 걱정도 덜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주민들은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거나 틈을 내어 각자의 집을 짓고 있었다.

척박한 함경도에서 움막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 각자의 집터를 정해 주자 다들 억척같이 매달렸다.

산지인 함경도와는 달리 평지에 자라는 아름드리나무가 지천이었기에 운반도 수월했다.

피죽도 못 먹던 처지에서 적으나마 식량이 배급되고 거기다가 명절에나 맛을 보던 고기를 수시로 먹는 터라 기운도 세졌다.

당장 땟거리 걱정이 사라지고 양반과 벼슬아치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이니 주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해동 부락 주변은 나무와 사냥감만 지천인 게 아니었다.

옹기나 사기를 구울 진흙도 있었고 우연찮게 발견한 철광산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굴을 파야 광석을 얻을 수 있었는데 해동의 철광은 노천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캐낼 수 있었다.

철광은 의원들이 약초 뿌리를 캐다가 붉게 녹슨 돌덩어리가 널려 있는 걸 보고 대장장이 장쇠에게 알린 게 계기였다.

그래서 해인도 노천광을 직접 확인하는 등 한동안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부락 인근에서 철광이 발견한 건 해동으로서도 큰 복이었다.

철만 있으면 농기구에서부터 조총 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함경도 각 관아를 돌며 구걸하듯 쇠를 얻지 않아도 되었다.

주민들에게 튼튼한 농기구와 생활 도구를 양껏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 외부와 교역할 물목이 더 늘어났다는 점도 해인을 기쁘게 했다.

섬에서 돌아온 박이규가 듣는다면 좋아서 펄쩍 뛸 것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말을 몰고 있는 해인의 곁으로 아탕게가 말을 바짝 붙였다.

“형님.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흐뭇한 얼굴이오?”

“노천광을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다. 해동으로서는 참으로 좋은 징조가 아니냐.”

“소제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차라리 은광보다는 철광을 발견한 게 한편으로는 다행이오. 은광을 발견하면 해동을 주목할지도 모르지 않소.”

“별걱정을 다한다. 은광이 해동에만 있다면 모를까 함경도에도 많고 가란구륜 부족에도 세 곳이나 있잖으냐.”

“족장도 은광을 자랑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오.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것도 은광을 차지하려는 속셈이라고 하지 않았소. 소문이 나면 필시 벌레들이 꼬일게요.”

은이 타국과의 교역에서 물품 대금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서로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러니 어딘가에 은광이 있다고 하면 누구나 넘보는 것이다.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것도 은광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 영향을 끼쳤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건주여진도 가란구륜 부족의 은광에 눈독을 들이는 건 아닌지.

누루하치가 동쪽으로 전사들을 자꾸 보내는 이유도 은광 때문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아골타 형님과 상의를 해 봐야겠군.”

“형님. 아골타 부락에도 은광이 있소?”

“아우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구나. 최근에 아골타 형님 부락에도 은광을 두 곳이나 발견했다는구나.”

족장은 최근에 아골타의 부락에서 은광을 두 곳이나 발견했다며 좋아했던 것이다.

그 소문이 누루하치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야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

안 그러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벌써 사방으로 소문난 게 아닌가 싶소. 건주여진 전사들이 자주 기웃거린 이유도 대충 알 것 같고요.”

“속단하긴 이르다. 몇몇만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게다.”

* * *

와르타의 해안부락 근처에 도착한 건 해동을 떠난 지 엿새만이었다.

예전보다 이틀이나 단축한 것이다.

마침 눈도 오지 않았고 몇 번이나 다녔던 길이라 지체할 것도 없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야숙을 한다고 임시 거처를 짓는 수고를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이 얼기설기 만들어 둔 숙소도 곳곳에 있었고, 유목민들의 가죽 천막이 있어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번에 가죽 천막을 여러 개 가져왔는데 무척 요긴하게 쓰였다.

장대는 주변에 널린 나무를 베어다 쓰고 가죽 천막만 씌우면 장정 예닐곱 명이 잘 공간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천막 중앙에 화톳불을 피울 수 있었기에 추위도 모르고 편히 잘 수 있었다.

가죽 천막을 걷어 말 위에 올리던 아탕게가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님. 어떻소? 잘 만하지요?”

“그러게 말이다. 정말 좋더구나. 새벽녘에 불이 꺼졌는데도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병사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잘 잔 것 같구나. 가죽 천막을 좀 더 보급해야겠다.”

겨울철에 노숙을 한다는 건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밤새 화톳불이 꺼지지 않게 살펴야 하고 추위 때문에 깊은 잠도 잘 수 없다.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런 상태로 전투를 한다면 과연 제 실력을 발휘하겠는가.

겨울에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고 장거리 이동을 피하는 이유가 바로 추위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럴 염려가 사라졌으니 해동의 병사들은 가진 전력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염려 마오. 사냥감이 지천이니 가죽 천을 금방 보급할 수 있소. 그리고 가죽 천막이 없더라도 모피로 만든 옷을 나눠 줬으니 어지간한 추위는 견딜 수 있을게요. 형님께서는 박 행수나 잘 다독이시오. 아까운 모피를 병사들에게 지급했다고 불만이 대단하오.”

“그 양반이 병법을 몰라서 그런 게지. 병사들이 힘을 내면 모피는 얼마든지 마련해 줄 수 있는데 말이다.”

교역도 중요하지만 당장 병사들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북방의 추위를 견디려면 모피로 된 옷은 필수였다.

추위에 노출된 병사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음이다.

그리고 고뿔에 걸리면 며칠을 앓아야 기력을 찾기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병사 수를 더 늘리기보다는 기왕 있는 병사라도 잘 입히고 먹이겠다는 게 해인의 생각이었다.

“자! 준비되었으면 출발하자.”

“예. 형님.”

* * *

와르타의 부락에 도착했더니 어쩐 일로 아골타도 그곳에 와 있었다.

사전에 약속한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해인이 도착할 때에 맞춰 아골타가 온 거였다.

해인으로서도 아골타 부락에 가지 않아도 되어 잘된 셈이었다.

아무리 모피 옷을 갖춰 입고 가죽 천막이 있다지만 겨울에 그곳까지 다녀오려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안 그래도 큰형님을 뵙고 둘째 형님 부락에 가려고 했는데 잘되었네요.”

“아우가 바쁜 것 같아 내가 해동으로 가려던 참이었네.”

“급한 일은 대강 처리했소이다. 그래서 나들이 삼아 나온 것이오.”

“전보다 얼굴이 좋아 보여 다행일세.”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소이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을 압박하고 있고 조만간 명에서 원군도 들어온다고 하니 소제가 설칠 일은 줄어든 셈이지요.”

“아우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좀 쉬어야지.”

“그런데 요즘도 건주여진 전사들이 기웃거리고 있는지요?”

“추워진 후로는 놈들도 넘어오질 않네.”

여진족이 춥다고 바깥출입을 안 하겠는가.

동해여진에 조총 부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아마 몸을 사리는 있을 것이다.

“저번에 소제의 병사들이 건주여진 전사들과 맞닥뜨린 일이 있었소이다. 그때 몇 놈을 일부러 놓아주었지요. 이쪽에 조총 부대가 있다는 걸 알리려는 의도였는데 그게 주효한 것 같으오.”

“주을에게 대강 들었네만. 놈들을 어디에서 만났는가?”

“큰형님 부락에서 사흘거리 정도 될 거외다. 서른 명의 건주여진 전사 중 두 놈만 살려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도륙 내었소.”

“참 큰일을 했네. 우리에게도 조총 부대가 있다는 걸 안다면 이제 건주여진 놈들은 다시는 이곳에 얼씬거리지 않을 걸세.”

왜군도 혼쭐을 낸 건주여진이 가란구륜 부족의 조총 부대를 과연 두려워할까 모르겠다.

어쩌면 건주여진도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을지도.

“놈들이 조총이 두려워 꼬리를 말 것 같지는 않소. 소제가 곰곰이 살펴보니 놈들이 노리는 게 은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오.”

“은광을? 놈들이 그걸 어찌 알고.”

“부족장님이 타국과 교역한다는 걸 놈들도 소문으로 들었을 게 아니요. 그럼 당연히 은으로 거래할 것으로 짐작하겠지요. 그 은이 어디서 났는지 확인했을 것이고 족장님 부락 근처에 은광이 있다는 것 정도는 금세 알아냈을 것이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게 괜히 나왔겠는가.

아무리 쉬쉬해도 세상일은 언젠가는 들통나게 되어 있다.

“은광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데 어찌 알 수 있겠나?”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흠···! 소문이 났다면 아버님 부락이 위험할 수도 있겠네.”

“일전에 족장님께 들었는데 형님 부락에서도 은광을 두 군데나 발견했다면서요.”

“그랬지.”

“은광을 아는 사람이 많소?”

“우리 부락 사람들이야 다들 알고 있지. 요즘 부락민 전부가 은을 캔다고 난리니까.”

“혹시 형님 부락에서 소문이 났을 가능성은 없소?”

“우리 부락 사람들은 외부와 접촉이 아예 없네. 외부로 나다니는 자는 내 전사들이 유일하고.”

만약 아골타의 부락에 은광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쪽을 기웃거렸을 것인데 다행히 건주여진 전사들이 그곳에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형님 부락의 은광은 아직 모르고 있겠구려.”

“당연하지. 부락 전체가 폐쇄된 곳인데 어찌 알 수 있겠나.”

“그럼 족장님이 계신 부락이 가장 유력하네요.”

“아버님 부락의 은광은 소문이 났다 하더라도 조총 부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조총이 모든 걸 좌우하지는 않는다.

기습을 하면 조총도 소용없다.

“형님. 족장님 부락의 은광도 매장량이 고갈되었다고 소문을 내야 하오. 철저히 감추어야 한다는 얘기요. 그리고 형님 부락에서 은광을 발견했다는 걸 누루하치가 알면 분명히 욕심을 낼 것이오. 건주여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에 드리는 말씀이오.”

“은광이 뭐라고 아우는 그렇게 호들갑인가.”

“은만 있으면 뭐든 구할 수 있는 세상이오. 왜군이 조선을 침범한 이유도 은 때문이기에 조심하자는 것이오.”

해인의 말을 곱씹던 아골타는 사안이 중대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굳혔다.

“우리 전사들부터 입단속을 해야겠네. 은연중에 은을 거론할 수도 있으니까.”

“잘 생각하셨소. 형님. 그런데 소제를 보자고 하셨다는데 무슨 일인지요?”

“어이쿠. 그걸 깜빡했구먼. 자네와 상의할 일은 다름 아닌 조총일세.”

“혹시 조총이 모자라오?”

“아니네. 말하기 부끄럽지만 우리 전사들이 조총을 기피하네. 총열이 자주 터져나가는 일이 발생하니까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해. 차라리 조총을 버리고 예전처럼 활을 쏘자고 난리지 뭔가.”

왜군에게 노획한 조총은 총열이 파열되거나 작동이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가뜩이나 귀청을 찢어질 것 같은 천둥소리 때문에 조총을 만지는 것도 꺼려지는데 거기에 총열까지 터져나갔으니 조총을 잡기가 겁날 거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활보다는 조총이 훨씬 위협적이긴 한데···. 방법이 없겠나?”

“조선 장인들이 만든 조총은 총열이 파열되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우리에게도 조총을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당분간은 조총을 생산하기는 어렵소. 봄이나 되어야 생산이 가능하오.”

“알았네. 그때라도 상관없으니 새로운 조총으로 교체해 주게. 제대로 된 조총 부대를 만들고 싶네.”

조총 부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겠다는 아골타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해인의 병사들이 아무리 잘 훈련되었다고는 하나 수적으로 열세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었다.

그 빈자리를 아골타가 메꿔 주겠다는데 길게 생각할 게 무어 있겠는가.

“예. 형님께서 조총 부대를 운영하겠다는데 이 아우가 어찌 나 몰라라 하겠소. 아무 염려 말고 전사들이나 잘 다독거리시오. 앞으로 조선 대장장이가 만든 조총은 왜국이 만든 조총처럼 말썽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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