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기지개 (1)
089화 해동의 기지개 (1)
정월을 지나 이월이 되자 혹독한 추위도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이따금 폭설이 내리기는 했지만 응달을 제외하고는 순식간에 녹았다.
낮에는 질퍽하던 땅이 밤이면 단단히 얼어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람결에 매운 흙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곧 봄이 올 것 같았다.
마당에 내려선 해인은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손 차양을 하고 바다를 바라봤다.
겨우내 얼었던 바다는 유빙이 떠다녔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북쪽이기에 추운 게 아니라 이제껏 겪어본 추위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추위로 따져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함경도 산간 지방의 추위보다 더했다.
이곳은 비록 함경도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온 곳이지만 해안 지방의 특성상 그리 춥지 않다고 들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근래 들어 몇 년째 흉년이 들고 장마가 줄어든 걸 보면 이상 기후 현상이 아닌가 싶었다.
올해 첫 농사를 지어야 하는 터라 과연 농사가 잘될지가 걱정되었다.
그런 걱정을 하며 마구간으로 몸을 돌렸다.
해인이 다가가자 애마인 돌쇠가 힘차게 앞발굽을 몇 번 두드렸다.
돌쇠가 반기는 거였다.
“돌쇠야. 잘 잤느냐?”
히힝!
해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콧김을 뿜으며 투레질로 화답한다.
튼실한 허벅지가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당장이라도 달리고 싶은 모양이다.
돌쇠는 가란구륜 족장이 혼례 선물로 해인에게 준 말이었다.
일반적인 여진의 말보다 잔등이 한 뼘 정도 더 컸는데 힘도 좋아서 어지간해서는 지치지 않았다.
겨우내 암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무던히도 말썽을 부렸기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돌쇠의 씨를 받는다면 튼실한 망아지가 태어날 것이므로.
안장을 올리고 돌쇠의 등에 올라탄 해인이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돌쇠야. 가자.”
한 차례 투레질을 한 돌쇠가 몇 걸음 내딛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돌쇠의 투레질에 화답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호위대원들의 말이었다.
해인의 집 주변에 숙소를 둔 호위 병사들은 해인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아탕게와 울아타도 합세했다.
“형님. 잘 주무셨소.”
“그래. 아우도 잘 잤느냐?”
“예. 형님. 밤새 바람이 요란하더니 잠잠해졌네요.”
“그러게 말이다. 울타리라도 무너지는 줄 알았다.”
봄이 오는 걸 시샘이라도 하듯 매일 밤 세찬 바람이 불어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했다.
아직 해동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해의 날씨를 알 길이 없는 해인으로서는 봄 문턱에 강한 바람이 부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매년 계속되는 것인지를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이러다가 농사도 시작할 수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앞섰다.
다행히 아침이 되자 언제 그렇게 세찬 바람이 불었나 싶게 잠잠해졌던 것이다.
“곧 파종을 해야 하는데 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이는구나.”
“함경도 바닷가도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불다가 잠잠해졌으니 이곳도 곧 그러겠지요.”
“글쎄다. 지형적인 영향인 것 같긴 한데 이러다가 파종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닌지 영 불안하다.”
파종이 늦어지면 당연히 추수가 늦어진다.
남쪽보다 빨리 겨울이 다가오기에 하는 걱정이었다.
“형님. 별걱정을 다하시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겠지요. 순리대로 곧 새싹이 돋고 꽃이 필 거니까 너무 염려 마시오.”
아탕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봄의 문턱에 들어섰는데 별일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왜군과 건주여진에 신경 써야 할 판에 농사 걱정까지 하게 될 줄이야.
“소제도 농사 걱정을 할 줄은 몰랐소.”
“우리의 책임이 무겁다. 그러니 농사에도 신경을 써야지 어쩌겠느냐.”
농사가 안 된다면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한다.
이곳을 버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겨우내 지은 집들마저 포기해야 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주민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해동의 앞날도 보장되기에 바람결이 바뀌기만 고대할 수밖에.
* * *
이월의 막바지에 이르자 북풍이 잦아들고 동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에도 땅이 얼지 않았다.
그러자 해동 사람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농토를 일구는 데 힘을 쏟았다.
길들인 큰사슴과 병사들의 말까지 동원하여 나무뿌리를 뽑고 큰 돌을 치우는 등 다들 억척을 떨었다.
그동안 잦아들지 않던 바람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던 해인의 마음은 무척 가벼워졌다.
해인의 고심을 알고 있던 주을도 덩달아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장군께서 얼굴이 펴지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전사들이 농사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다른 부족이 들었다면 웃음거리였을 거예요.”
“부인. 농사는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근본이오. 그러니 농사일이 바쁘면 병사들도 열 일을 제쳐 두고 도와야 하는 게 맞소.”
“박 행수가 섬에서 은광을 발견했는데 농사가 안 되어도 괜찮지 않아요?”
“은이 있어 곡식을 살 수는 있겠으나 만약 다른 곳에도 흉년이 들어 팔지 않겠다면 어쩌겠소. 해동이 안정되려면 식량만큼은 자급자족해야 하오.”
박이규가 섬으로 교역을 나섰을 때 회령에서 함께 온 광부들도 따라나섰는데 운 좋게도 섬에서 은광을 발견했었다.
주을과 혼례를 마치고 함께 해동에 돌아왔을 때 그 소식을 들은 해인은 기쁜 나머지 잔치까지 벌였었다.
덕분에 해동에서 주을과의 혼례식을 좀 더 거창하게 한 꼴이 되었지만.
철광에 이어 은광까지 발견했으니 해동의 앞날은 꽃길만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은광이 있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만 막는다면 해동은 승승장구할 것이니까.
거기에 더해 주민 수만 더 늘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먹을 게 풍부하고 약초까지 널려 있으니 자연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그래서는 하세월이다.
조선에서 사람들을 더 데려오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럼 저도 나서서 농사일을 돕겠어요. 사냥을 다니기가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고요.”
“큰일 날 소리를. 아무리 바빠도 임부까지 나서는 게 말이 되오?”
주을이 임신한 걸 알게 된 건 정월 보름이 막 지난 때였다.
함께 식사를 하던 주을이 헛구역질하기에 체한 줄 알고 의원에게 보였더니 태기가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주을은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조심했다.
“산모가 건강해야 태아도 건강하게 자란답니다. 사냥은 못하더라도 농사는 도울 수 있어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허투루 볼 일은 아니오. 허리를 펼 겨를도 없이 부지런을 떨어야 겨우 밥술이나 뜰 수 있다오. 정 일손을 돕고 싶다면 틈나는 대로 부녀자들에게 활이나 가르치시오. 아직 조총을 많이 만들지 못해 활이라도 익혀 두는 게 좋겠소.”
여자들까지 활을 들고 나설 상황이면 풍전등화에 놓였다고 봐야 한다.
이미 병사들마저 거덜 난 상황에서 가녀린 아녀자들이 활을 들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만, 내 것을 지키겠다는 악착같은 마음이라도 갖고 있으라는 뜻이다.
“파종을 서두르는 걸 보니 곧 함경도로 가시겠군요.”
“그냥 이곳에 파묻혀 만사를 잊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소. 조선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 나중에 누루하치까지 설치지 않겠소. 우리가 평안하려면 조선이 빨리 일어서야 하오.”
겨울 동안 해동의 척후대가 경흥까지 오가며 전세를 파악했는데, 드디어 명군의 도움으로 정월에 평양성을 탈환했던 것이다.
그러자 독이 오른 왜군들이 곳곳에서 조선 백성을 도륙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왜군들은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의 코도 베고, 갓 낳은 아이와 산부의 코까지 베어간다는 거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왜군을 코와 귀를 베는 남자라는 뜻으로 이비야라 부른다고 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파종이 끝나면 병사들을 이끌고 함경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란이 길어지면 조선은 더 피폐해질 것이고 그걸 복구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조선이 맥을 못 출 동안 건주여진까지 설친다면 동해여진은 물론 해동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낭군님께서 세운 뜻을 막고 싶지는 않으나 해동의 앞날과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보중하셔야 합니다.”
“절대 무리를 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오. 내 힘이 자랄 만큼만 왜군을 상대할 것이오.”
“부디 그래 주세요.”
* * *
박이규는 날이 풀리자 또 북쪽 섬을 다녀왔다.
섬의 원주민들이 겨우내 잡은 모피를 철제 농기구와 바꿔 온 거였다.
전란 중에 누가 모피를 찾는다고 그리 열심인지 모르겠다.
“형님. 조선에서 모피를 살 사람이 있겠소? 우리 부락에도 모피가 넘쳐나는데 뭘 그리 가져오시는 게요.”
“우리 부락 사람들도 모피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섬사람들이 무두질한 모피가 우리 것보다 훨씬 좋네. 원주민들의 모피를 명나라로 가져가면 부르는 게 값일 걸세. 명의 은을 끌어오려면 모피만큼 좋은 것도 없네.”
“우리도 이제 은광이 있잖소.”
“은은 아무리 많아도 썩지 않네. 모아 둘 수 있을 때 모아 두어야지. 포도아의 범선을 사려면 백만금의 은이 필요하다니까 말일세.”
해인도 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포도아나 명과 교역하려면 은이 있어야만 원하는 물품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이 아닌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려면 그 양이 엄청나야 할 것이므로.
“은이 귀하다는 건 소제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은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으면 무엇하겠소. 당장 은을 써먹을 곳이 없는데. 그래서 상단 사람들도 뱃일을 익혀 두라는 것이오. 명으로 가든 왜국으로 가든 일단 조선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소.”
“당연히 익혀야지. 상단 사람들도 곧 와르타 부락으로 보내겠네.”
상단 사람들도 뱃일을 배우라고 채근했으나 북쪽의 쿠예섬을 오가느라 아직도 와르타 부락으로 가지 않았다.
쿠예섬에서는 은을 채취하느라 뱃일을 배울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섬의 은광이 회령보다 많을 것 같소?”
“은맥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으니 회령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니 기대해 보게. 내가 올해 안에 명나라를 오가는 포도아 상인들을 설득해서 번듯한 범선을 한 척 가져오겠네.”
“와르타 형님이 범선을 그냥 타고 다니라고 했잖소.”
“남의 걸 얻어 타면 대가를 치러야 하네. 우리만 이문을 취할 수는 없잖은가. 와르타가 아우님의 처남이긴 하나 계산은 똑바로 해야 하네. 세상 이치가 그런 걸세. 언젠가는 범선을 돌려줘야 하니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하자는 것일세.”
맞는 말이긴 했다.
와르타의 전사들도 함께 배를 타고 다니는 터라 이문이 생기면 나누어야 한다.
“돌려주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소. 어차피 가란구륜 부족과는 함께해야 하는데.”
“그래도 배가 더 있으면 좋지 않겠나. 선단을 이루면 위급할 때 서로 도울 수도 있고 더 많은 양의 화물을 나를 수 있으니까 말일세.”
역시 박이규다운 발상이었다.
타국과 교역을 할 때 선단을 이뤄 다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썩 괜찮은 방어책인 셈이다.
누가 감히 여러 척의 범선을 넘보겠는가.
거기에 화포라도 장착하면 무적일 것이다.
“형님.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이오.”
“그렇지? 뭔 수를 쓰든 범선을 구매해 보겠네.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직접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봄세.”
“배를 만드는 장인을 구하기가 그리 쉽겠소? 그리고 설사 데려온다고 해도 조선 장인들이 과연 포도아의 범선을 만들 수 있겠소?”
“그럼 와르타 부락에 있는 포도아 선원들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떤가?”
포도아의 범선은 조선의 판옥선과는 외양부터 다른 형태였다.
거기에다 각각의 돛마다 그 기능이 달라서 쉽게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조선의 판옥선은 평저선인 데 반해 범선은 첨저선이라 흉내조차 못 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조선의 배가 양이의 배보다 못하다는 건 아니다.
평저선인 조선의 배들은 방향 전환이 쉽고 얕은 곳에서도 움직일 수 있어 강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다만 큰 파도가 몰아치는 대해에서 평저선은 복원력이 떨어져 위험한 반면,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는 첨저선은 그렇지 않다.
“이번에 함경도를 갈 때 와르타 형님 부락에 가서 알아봅시다.”
“그러세. 조총도 흉내 내어 더 좋게 만들었는데 범선이라고 흉내 못 내겠는가. 그러려면 본보기가 있어야 하니 이래저래 포도아 배가 한 척 있어야겠네.”
문제는 포도아 사람들이 쉽게 범선을 양도할지가 관건이었다.
문외한인 해인이 보아도 포도아의 범선은 기능 면에서나 외양이 예사롭지 않아 그들도 함부로 내돌릴 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팔지 않겠다면 강제로 배를 뺏는 수밖에 없는데, 그랬다가는 그들과 척을 지게 되고 교역 또한 물 건너간다.
“와르타 형님의 범선을 샅샅이 훑어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요.”
“그걸 뜯어 보면 역으로 만들 수 있겠는데···.”
“어이쿠 형님. 그 귀한 배를 어찌 분해할 생각을 하시오.”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려면 하나하나 들어내 보는 게 가장 확실하네. 눈썰미 좋은 조선 사람들이 분해했다가 재조립하는 건 일도 아니잖은가.”
뭔가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맨손으로 시작한 해동이 아닌가.
조총도 흉내 낼 수 있다면 범선이라고 흉내 못 내겠는가.
그러려면 이래저래 사람이 필요하다.
해동의 주민만으로는 모든 것을 소화하기에는 벅차다.
해동이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하려면 강제로라도 많은 장인들을 데려와야 할 판이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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