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기지개 (3)
091화 해동의 기지개 (3)
해인과 아탕게가 이끄는 일백 명의 병사들이 경흥에 당도하자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무척 놀라워했다.
아직 밤에는 쌀쌀하기에 여진족처럼 모피 옷을 입었고, 다들 조선말을 하는 터라 조선에 이런 군사들이 있었다는 말은 못 들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부 귀한 말을 타고 있었고 왜군들만 갖고 있다는 조총을 들고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해인은 시위하듯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온 거였다.
여진족들을 물리칠 만큼 막강한 무력을 갖고 있는 병사들을 보여 줌으로써 민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북쪽에도 살기 좋은 곳이 있다는 걸 소문낸다면 뒤따를 것이므로.
경흥 관아에 도착한 해인은 전은겸 부사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경흥 부사는 해인과 병사들이 겨우내 건주여진의 준동을 막은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교위. 그동안 고생 많았네.”
“영감.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본관이야 관아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을. 노숙을 하며 여진족을 막아낸 자네에 비할 수 있겠는가.”
“무관의 책무인데 고생이랄 게 무어 있겠습니까?”
관아 마당에 들어선 해인의 병사들을 죽 훑어보던 부사가 놀란 눈빛을 했다.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 병사들은 의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늠름했던 것이다.
여진족들만 입는 모피를 두른 모습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병사들이 모두 조선 사람들인가?”
“예. 영감. 소관이 훈련시킨 의병들이올시다. 겨우내 건주여진과 드잡이를 한 정병들입니다.”
“눈빛이 형형한 게 모두 일당백의 기개가 느껴지네.”
겨우내 물개 등을 사냥하고 훈련에 임했으니 눈빛이 살아 있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육식 위주로 먹었으니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고 몸집도 불었다.
퀭한 얼굴인 경흥 관아의 군졸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영감께서 곡식을 보내 준 덕분입니다.”
“본관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그러고 보니 최근에 도문강을 넘어오는 여진족이 없는 걸 보니 최 교위의 활약이 대단했던 모양일세.”
“주로 동해 여진 쪽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겨울을 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동안 함경도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기에 가란구륜 부족을 살짝 띄웠다.
어느 누가 족장에게 가서 사실 확인을 할 것도 아니기에.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려 가란구륜 족장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해야겠네.”
“그래 주신다면 족장도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장인인 가란구륜이 들었으면 콧방귀를 뀔 일이지만 굳이 마다할 것도 없었다.
동해여진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조정 신료들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해인의 행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진족 족장에게 형식이긴 하지만 벼슬을 내린 예는 몇 번 있었다.
조선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게 하려는 유화책인데, 실제로 일부 소규모 부족은 부족 전체가 조선에 귀화하기도 했다.
“그동안 북방에서 고생했는데 또 자네를 불러서 면목이 없네. 신하로서 주상 전하의 교지를 받드는 게 우선이니 어쩌겠는가.”
“소관의 소속이 불분명하기는 하나 의병들을 이끄는 의병장으로서 당연히 참여해야지요. 이번에는 함경도에서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겠습니다.”
“주상 전하는 조선 땅에서 왜군이 모두 물러날 때까지 의병들이 활동하기를 원하시네.”
관군도 아닌 백성들로만 구성된 의병이 죽든 말든 끝까지 싸워 달라는 주문이었다.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구하려면 누구든 나서야겠지만, 조선을 버리고 명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던 위인이 요구할 말을 아니었다.
속에서 분기가 치솟았지만 내색은 할 수 없었다.
함경도만 탈환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던 해인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의 조총 부대가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감. 명에서 원군을 더 보내 주지는 않는지요?”
“명나라도 지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고 알고 있네. 조선이 잘못되면 자신들까지 피해를 입을까 봐 원군을 보내 주기는 했으나 그리 대단하지는 않은 모양일세.”
명의 원군은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고야 가까스로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런 상황이라 주상과 조정 신료들은 전국에 파발을 보내 의병 활동을 독려하는 것일 터.
“영감. 왜군을 몰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주여진도 견제해야 합니다. 소관의 병사들이 함경도를 벗어나면 건주여진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소관의 조총 부대가 있었기에 건주여진이 움츠리고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명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영감.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려 함경도가 처한 상황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천지 분간을 못 하는 주상이 오판을 하고 있다면 그걸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그런 신하는 조선에 류성룡 대감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도 현실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 주상에게 간언을 못 하고 있을 것이리라.
당장 코앞에 보이는 왜군을 몰아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어명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일단 참전은 하게. 그동안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려 보겠네. 본관이 보기에는 주상과 조정 신료들이 이곳의 상황을 몰라 주상 전하의 어명을 받잡은 것 같네.”
“예. 영감. 소관은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 * *
해인은 찜찜한 마음을 안고 길주로 향했다.
경흥 부사를 부추겨 장계를 올리기로 했으나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다.
적당한 때 슬쩍 뒤로 물러나면 될 것을 괜히 장계를 올려달라고 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주상이 해인의 조총 부대를 욕심내어 평양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주까지 몽진을 한 것도 자신을 지킬 마땅한 무력이 없었기에.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 의병이 있다면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할 수도 있음이다.
이런 걱정을 아탕게에게 내비쳤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걸작이었다.
“형님, 별걱정을 다 하시오. 왜군과 싸우다가 조총 부대가 거의 궤멸되었다고 하면 되지요. 그럼 주상이 우리를 찾을 일도 없고 함경도를 벗어나 강원도로 내려갈 일도 없잖소.”
“병사들을 어찌 숨기고?”
“적당한 때 빼돌려서 해동으로 보내야지요. 어차피 한두 번은 전투를 치러야 하니 핑곗거리도 충분하잖소.”
해인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은 아탕게가 신통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탕게나 울아타 형제는 머리가 제법 뛰어난 편이었다.
무예를 가르칠 때 느꼈던 일이지만 하나를 알려 주면 바로 응용을 할 만큼 총명했다.
울아타에게 뱃일을 배우라고 한 것도 그런 총명함 때문이었다.
포도아 선원들과 어울리면서 어느새 그들과 손발 발짓을 하며 소통하는 걸 봤던 것이다.
“형님. 지금이라도 일부를 돌려보냅시다. 다른 의병들이 우리의 전력을 알기 전에요.”
“아무래도 그게 낫겠다.”
아탕게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선 사십 명을 추려 녹둔도로 돌려보냈다.
남은 육십 명만으로 왜군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두 번 왜군과 전투를 치른 후 사십 명을 더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러면 이십 명만 남게 된다.
이십 명으로는 더 이상 전투를 치를 수 없어 회군을 한다면 문제 삼을 일이 없어진다.
의병들이 전투 중에 대부분 죽었다는데 어쩌겠는가.
* * *
작년 늦가을 해인이 그렇게 찾으려 했던 정문부는 길주 목사로 제수되어 있었다.
주상이 정문부의 의병 활동을 높이 치하한 것이다.
정작 큰 공을 세운 해인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경흥 부사나 경원 부사, 회령 부사에게 공을 넘긴 것이었으니.
해인의 활약으로 인해 가토군이 지리멸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문부는 해인의 부대를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해인보다 다섯 살이 많은 이십팔 세의 정문부는 왜란으로 인해 종육품 북평사에서 졸지에 정삼품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최 교위의 공은 본관이 잘 알고 있네. 스스로 공을 낮추었더군.”
“소관은 여진족의 동태가 수상하여 남아 있었던지라 왜군을 상대하는 일은 가외의 일이었습니다.”
“어사 영감께서 최 교위에게 밀명을 내린 걸 얼마 전에야 알았네. 주상 전하께서도 최 교위가 가토의 우군장을 사로잡은 일을 두고 크게 치하하셨네. 조만간 한성을 수복하면 최 교위를 부를 걸세.”
“당연한 일에 공을 탐한다면 어찌 무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육진의 수령들 중 최 교위의 활약을 칭찬하지 않는 분이 없었네. 그동안 주상 전하와 조정 신료들이 경황이 없어서 최 교위를 챙기지 않았을 뿐 결코 잊은 것은 아니네.”
정문부는 문관이긴 하지만 병마절도사 밑에서 무관들을 감찰하는 업무를 맡았던 터라 무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최 교위가 식년시 갑과 출신이면서도 한성에 머물지 않고 어사의 호위무관으로 변경까지 왔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갑작스러운 난리임에도 의병을 일으켜 여진족을 견제하였다.
그런 장수가 조선에 누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한 것도 모자라 겨우내 여진족의 준동을 홀로 막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경흥 부사를 비롯한 육진의 부사들이 인정하는 최 교위만 곁에 있어준다면 왜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내는 건 여반장이다.
그런 무관인데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해인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길주 목사 정문부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찌 모르겠는가.
“영감. 소관은 왜군보다는 건주여진이 더 걱정입니다. 이제껏 건주여진의 전사들을 상대하느라 휘하의 의병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습니다. 남은 병사들마저 잃으면 북방이 위태로울까 밤잠을 설칠 정도입니다.”
“이보게. 북방도 불안하지만 당장은 왜군이 우선이 아닌가. 본관과 함께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세나.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벌써 이만육천에 달할 정도이니 곧 왜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네.”
“선후를 어찌 모르겠습니까만. 북방을 너무 비워 놓으면 누루하치가 오판을 할까 걱정되어 그렇지요.”
“본관도 여진족의 소식을 듣고 있네. 본관이 함경도 북평사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동향도 면밀히 살펴보았네만 여진족들은 변경에서만 집적댈 뿐이네.”
여진족을 잘 안다는 정문부도 누루하치의 세력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걸출한 인물이 나올 수 없는 토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조선 관리들은 여진족이 그저 약탈이나 일삼는 족속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감. 건주여진을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됩니다. 누루하치가 요동을 일통하고 동해여진마저 넘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 봐야 글도 모르고 짐승 같이 사는 오랑캐에 불과하네. 그들이 설마 나라를 만들겠는가.”
“그들이 예전에 금국을 만들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잠깐 반짝이다가 스러져간 나라가 아닌가. 뿌리가 깊지 않은 족속의 한계일세.”
적당한 순간에 여진을 핑계 대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해인으로서는 정문부를 어찌 설득할지 난감했다.
올곧은 선비이긴 하나 주변 정세를 보는 눈은 해인에 못 미쳤던 것이다.
아니면 유학을 근본으로 삼는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처럼 오랑캐라고 마냥 무시하고 있거나.
왜국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다가 지금 온 강토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벌써 잊은 것인지.
“영감. 소관의 임무는 여진족의 동향을 살피는 것입니다. 주상 전하의 교지가 있어야 함경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관이 생각하기에는 왜란이 일어남으로써 최 교위의 임무는 종료된 것이나 같네만. 그렇다고 주상 전하의 교지 없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도 최 교위 입장에서는 곤란하긴 하겠군.”
“그러하오. 허나 당장 눈앞에 있는 왜군을 먼저 치는 게 우선이오니 소관이 선두에 서겠소이다. 그런 후 변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해 주옵소서.”
해인이 선두에 서겠다고 하자 정문부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주겠나? 그렇다면 최 교위의 부대는 강원도 접경까지만 종군하게. 주상께는 여진족의 동태가 수상하여 최 교위의 부대를 뒤로 물렸다고 장계를 올리겠네.”
“감사합니다. 영감.”
“본관이 오히려 감사할 일이네. 최 교위 같은 충신이 몇 명만 더 있어도 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걸세.”
정문부는 문관답지 않게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환도도 다룰 줄 알고 활도 잘 쏜다고 했으니 무반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무관들을 상대로 감찰 업무를 하려면 그 정도의 무예는 있어야 말발이 통했을 것이다.
일단 함경도를 벗어나지 않아도 되었지만, 문제는정문부와 약속한 대로 선두에 서서 왜군을 상대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선두에 서면 왜군의 주력 부대를 상대할 수밖에 없어서 아무래도 병사들의 희생이 뒤따를 것 같았다.
해인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왜군 진영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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