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기지개 (4)
092화 해동의 기지개 (4)
길주 목사 정문부로부터 가토의 왜군이 함흥까지 밀려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해인은 아탕게와 병사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달렸다.
모두 말을 타고 있기에 진군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정문부가 해인이 그동안 건주여진을 압박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기동력과 조총으로 무장된 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 하나하나가 무관에 못지않았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정문부는 해인의 의병들을 일컬어 과거의 신립 장군과 그의 병졸들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형님. 아무래도 병력을 많이 빼돌리는 건 무리일 것 같소. 길주 목사의 눈빛을 보니 무슨 신군을 보는 것 같지 않소이까.”
“그러게 말이다. 욕심이 뚝뚝 묻어나더구나.”
“설마 형님 염려대로 평양으로 불러들일 일은 없겠지요?”
“강원도 접경까지만 종군하고 물러나기로 했으니 염려 마라.”
정문부와는 강원도 접경까지만 종군하고 다시 변경으로 회군하기로 합의했지만, 해인의 부대를 바라보는 정문부의 눈길을 생각하면 육십 명이나 되는 병사가 부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문부가 해인의 부대가 여진족을 막기 위해 끝까지 종군하지 못하는 이유를 장계에 늘어놓다 보면 필시 주상이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천지에 이런 부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주상의 치세를 보여 주는 본보기인데 가만히 놔두겠는가.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고 당장은 선두에서 왜군을 상대할 일이 걱정이었다.
그동안은 기습 전법으로만 왜군을 상대했는데 이번에는 정면에서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상태에서 왜군 주력을 기습 공격하려면 희생은 불가피하다.
물론 우회 공격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주력을 깨려면 정면에서 공격할 수밖에 없다.
“형님. 소제에게 이십 명만 내어 주시오. 주력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야지 않겠소.”
“주력 부대가 넓게 포진해 있으면 기습의 효과가 있겠느냐. 병력을 분산할 게 아니라 한 곳에 집중하자.”
“우리가 만든 조총이면 왜군 일이백도 거뜬하오. 소제가 우회해서 왜놈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면 위험 부담을 덜 수 있소.”
아탕게는 정면 승부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겠단다.
해인과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만, 그러다가 아탕게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이다.
“아니다. 정면 승부를 하더라도 요령을 부릴 수 있으니 함께 움직이자.”
“형님. 아직도 소제를 믿지 못하는 게요? 소제를 앞장세우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간 게요.”
“아우를 위험 속으로 밀어 넣고 마음이 편할 형이 어디 있다더냐.”
“소제도 위험하다 싶으면 몸을 사릴 것이니 염려 마오.”
함흥에 가까워지자 아탕게는 정면 승부보다는 기습 공격을 주장했다.
그마저도 통하지 않자 별동대를 구성해 왜군의 시선을 흩트려 놓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타당한 방법이긴 하나 너무 적은 인원으로 들이치다가는 잘못될 가능성도 많았다.
“그러면 일단 척후를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결정하자.”
“만약 왜군들의 주력이 견고하다면 소제의 말대로 해 주시오. 형님.”
* * *
함경도로 진출한 가토의 주력군은 함흥에서 대부분 덕원군(원산)으로 철수한 후였다.
아마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려는 걸 것이다.
안변과 금강산 등지에서 의병들이 들끓고 있어 육로로 철수하기가 두려웠을 터다.
당장이라도 조선을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민심을 잃지 않은 관리들과 유생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들을 사방에서 괴롭혔던 게 주효한 것이다.
함흥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은 덕원군(원산)으로 철수하는 주력군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었던 거였다.
척후가 알아 온 내용으로는 전방에 왜군이 오백 명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정면 승부를 보다는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해인과 아탕게는 병력을 반으로 나누었다.
아탕게가 삼십 명의 병사들과 함께 옆구리를 치기로 하고 산 쪽으로 우회하는 동안 해인은 삼십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왜군의 정면으로 향했다.
왜군들도 조선의 의병이 나타나자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선 의병들의 공격은 활이 먼저이고 어느 정도 기세가 꺾이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지극히 원시적인 공격이 다였지만 그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데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방포하여 접근을 차단시키는 게 왜군들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러나 해인의 부대가 조총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군 조총의 사거리를 조금 벗어난 곳에 말을 멈춘 해인의 부대는 일렬로 서서 방포 준비를 했다.
조선 의병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왜군들은 길게 목을 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군 진영은 자신들의 사거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멈춰 선 의병들을 보고 방심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해인의 병사 삼십 명이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는 소리였다.
이쪽을 구경하던 왜병들이 여기저기서 풀썩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이십여 명이 쓰러지자 왜군 진영에서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재빨리 장전하고 재차 방포를 하자 이번에도 그 정도의 숫자가 고꾸라지거나 뒤로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왜군 좌측 산 쪽에서도 방포 소리와 함께 연기가 풀썩 피어올랐다.
아탕게의 부대가 조총을 쏜 것이다.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자 왜군 측에서도 조총으로 반격을 했지만, 왜군의 조총은 이쪽에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사거리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인 쪽의 방포가 다섯 번쯤 계속되자 왜군 진영은 급하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조총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인데, 해인과 아탕게는 뒤로 물러난 만큼 전진하며 계속 조총을 쏘아 대고 있었다.
각각 삼십 명씩 육십 명의 조총에서 불을 뿜자 왜군의 숫자는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자 왜군들은 뒤로 몸을 빼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날아오는 조총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급기야는 말을 탄 장수가 뭐라고 소리를 치자 일제히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들 말에 올라 왜군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르라.”
“예. 장군.”
이제는 몰이 사냥하듯 느긋하게 뒤를 따르며 왜군들의 혼을 뺄 일만 남았다.
아탕게의 부대도 다시 해인과 합류했다.
“형님. 뒤를 바짝 추격합시다. 저놈들은 반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소.”
“이 정도만 해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우리가 끝까지 의병 노릇을 할 거라면 몰라도 적당히 쫓다가 무기를 수거하고 돌아가는 게 옳다.”
“아 참! 그렇지. 조총부터 수거해야지요.”
전투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아탕게의 눈이 번들거렸지만, 왜군의 무기를 수거해야 한다고 하자 이내 공격 욕심을 버렸다.
자신이 지금 흥분 상태라는 걸 인지한 것이다.
비록 왜군의 조총이 장쇠 등이 만든 것보다 성능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귀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 명의 병사도 희생되지 않고 이 정도의 전공을 세운 것에 만족해야지, 더 욕심을 부려 본들 누가 알아주지도 않잖은가.
오늘의 전투만으로도 후세에 길이 남을 전공이라 할 수 있었다.
단시간에 줄잡아 삼백여 명의 왜군을 섬멸했으니까.
이는 조선 장인들이 만든 조총이 우수했고 잘 조련된 병사들이었기에 가능했다.
잘 훈련된 육십 명의 조총 부대는 그보다 수십 배가 많은 적도 손쉽게 섬멸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좋은 예였다.
“뒤처지는 왜군을 붙잡거나 사살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예. 형님. 소제가 잠시 흥분한 것 같소. 잔당들만 처리하고 돌아가시지요.”
* * *
이번 전투로 노획한 조총만 해도 삼백이십여 정이었고 상처 입거나 온전하게 잡은 왜군 포로도 육십여 명에 달했다.
부상당한 왜군을 전처럼 죽이지 않고 포로로 데려가는 이유는 정문부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아우는 병사 사십 명을 데리고 해동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아직 쓸 만한 조총을 추려 해동으로 가져가거라. 길주 목사에게는 수십여 정만 내놓아도 감지덕지할 게다.”
육십 명의 병사 중 사십 명은 이번 전투로 잃었다고 할 참이었다.
이 정도의 전과에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인 것이다.
“형님. 우리 병사가 사십 명이나 희생되었다면 과연 믿을까 모르겠소.”
“왜군을 사백 명 가까이 죽였는데 그 정도는 잃었다고 해야 말이 되지 않겠느냐. 왜군 주력이 뒤를 치는 바람에 희생이 컸다고 둘러댈 것이니 너는 중도에 있는 관아를 피해 은밀하게 도문강을 넘어라.”
“은밀히 돌아가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목사가 형님을 붙잡고 늘어지면 어쩌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알았소. 말과 화약 등도 소제가 모두 가져가겠소.”
“그리해라. 조총도 구경거리에 불과할 건데 화약이나 쇠 구슬을 관아에 넘겨준들 크게 소용도 없을 것 같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조총은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차라리 그걸 해동 사람들이, 가란구륜 부족 사람들이 사용하는 게 조선을 위해서도 이롭다.
조총을 손에 쥐여 줘도 전통을 고집하며 화포나 활만 고집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곳간에서 녹이 슬어 버려질 것이라면 해인이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총을 한 정도 넘기고 싶지 않았지만 왜군과의 전공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고 얼른 해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넘겨주는 것뿐이다.
* * *
길주 관아에 왜군 포로들과 조총을 넘겨주자 목사인 정문부는 무척 놀라워했다.
해인의 부대가 대단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 봐야 백성들 중 뽑은 의병에 지나지 않는데, 그들을 이끌고 이런 전과를 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의병 육십 명으로 왜군 사백을 물리쳤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의병의 반 이상을 잃어 침울해 있는 해인을 위로하기보다는 전투 상황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지 이것저것 물어 왔다.
“왜군 정병을 상대로 이런 전과는 일찍이 없었네. 주상께 전공을 알려 드려야 하니 소상히 말해 보게.”
“특이한 전략을 쓴 것도 아닙니다. 적들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공격을 한 게 주효했을 뿐입니다. 의병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런 전과가 나올 수도 없었을 겁니다. 모든 공은 죽은 의병들에게 있습니다.”
“아까운 의병들이 사십 명이나 희생되었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일세. 죽은 의병들 앞으로 큰 상급을 내려 달라고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리겠네. 남은 식솔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겨우 이십 명만 남았는데 이 인원으로 건주여진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곳에서 본관과 함께 왜군을 물리치세나.”
정문부는 당장 왜군을 물리치는 게 우선이라 여진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렇게 출중한 맹장을 자신이 임의로 판단을 내려 북변으로 올려보냈다면 주상이 곱게 있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해인을 붙잡는 거였다.
“영감. 소관 휘하에는 이십 명의 병사들뿐이옵니다. 이들만으로는 왜군의 잔당들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조총을 노획했잖은가. 그것으로 장정들을 훈련시키면 되지 않겠나.”
“소관의 병사들은 근 일 년 가까이 훈련을 받은 장정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말을 타고 조총을 공기 다루듯 할 수 있었습니다.”
“······.”
“그들과 같은 정병이 되려면 그만큼의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번의 전과도 그런 장정들의 희생 위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본관이 종성과 회령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울 때도 수많은 의병들을 잃었네. 최 교위의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아네.”
그러나 해인이 이렇게 빨리 왜군을 격퇴하고 돌아올지는 몰랐던 것이다.
엊그제 장계를 올렸기에 주상의 교지가 내려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은 이곳에 붙잡고 있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소관은 북변이 걱정되어 무리한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대단한 전과를 올렸지만 형제 같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본관이 전공에 눈이 멀어 최 교위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네.”
“아닙니다. 소관의 우둔함이었습니다. 이 전란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겠기에 앞뒤 재지 않고 서두른 게 화근이었습니다.”
“······.”
정문부는 미안한 마음에 묵묵부답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어명을 앞세웠기에 해인과 병사들이 일선에 나선 것이 아닌가.
고락을 함께한 의병들을 잃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당초보다 병력이 3할밖에 남지 않은 터라 더 이상 의병 활동을 못 할 처지가 되자 정문부는 관군에 편입되기를 권했지만 해인은 경흥으로 돌아가겠다며 거절했다.
원래의 임무인 여진족의 동향을 파악하는 명분이 있었기에 정문부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아무리 왜란이 벌어졌다고는 하나 여진족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문부가 여느 문관과 같았다면 강제로라도 해인을 주저앉혔겠지만 병마절도사 휘하의 북평사라는 벼슬을 했기에 여진족의 도발 또한 걱정되었던 것이다.
정문부도 그렇게 장계를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성품으로 보아 해인의 공을 축소하거나 탐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주를 떠날 수 있었다.
전란이 끝나도 해인이 일방적인 행동을 문제 삼을 일은 없을 거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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