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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96화 (96/130)

첫 교역 (3)

096화 첫 교역 (3)

울아타는 두 명의 호위 병사와 함께 상단의 부행수인 이운규를 뒤따르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곳은 장주의 저잣거리였다.

오늘 이운규가 씨앗을 구하러 간다고 하였기에 호위로 따라나선 것이다.

이운규도 몸이 날렵하고 환도를 쓴다고 하나 매일 수련을 하는 호위대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저잣거리에는 이국의 상단들이 가져온 갖가지 상품들이 즐비했다.

대부분 옷감과 향신료지만 회회의 유리 제품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형형색색의 물감을 들여 만든 그릇은 정말 갖고 싶은 물건이었으나 당장은 그림의 떡이었다.

너무 비싸기도 하거니와 그걸 사다가 팔아먹을 곳도 없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향신료를 취급하는 명나라 상점에서 씨앗을 취급한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비대한 중원인 남자가 일행을 반겼다.

이운규가 한어로 씨앗을 사러 왔다고 하자 대뜸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어설픈 한어를 구사했으니 명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안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되물었더니 명나라 밖으로 가져갈 수 없는 씨앗도 팔 수 없다는 거였다.

이운규의 설명을 들은 울아타는 코웃음을 쳤다.

“부행수. 놈이 가격을 더 받으려는 수작이오.”

“아닐세. 명나라는 타국에 이익이 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네.”

“하여튼 명나라 놈들은 온갖 것을 뺏어가면서 손에 쥔 건 안 내어놓으려고 한다니까.”

“자네는 가만히 있게. 내가 잘 설득해 봄세.”

“부행수. 그만 나갑시다. 씨앗 파는 곳이 이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소.”

울아타와 이운규가 조선말로 실랑이를 하자 주인이 나섰다.

“조선에서 왔소?”

“그렇소만.”

“혹시 조총을 가지고 오진 않았소?”

“······?”

“장주에 은밀히 떠도는 소문이 있어서 묻는 게요. 왜국과 전쟁 중이니 노획한 조총이 있을 게 아니오. 조총을 준다면 반출을 금지한 씨앗을 넘겨 드리리다.”

“무슨 씨앗이기에 그러는 것이오?”

“마령서와 옥미라는 식물이오.”

그러면서 씨앗을 선뜻 꺼내 보여 주었다.

마령서는 말 그대로 말방울처럼 생겼고 옥미는 쌀보다 몇 배나 굵은 알갱이였다.

나중에 조선에서 감자와 강냉이로 불리는 작물과의 만남이었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오?”

“더운 곳 추운 곳 가리지 않고 잘 자라오. 씨를 뿌린 지 석 달이면 수확할 수 있는 종자요.”

이것이야말로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해동에 딱 맞는 작물이었다.

욕심이 동한 울아타가 이운규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눈짓을 했다.

“부행수. 저 씨앗은 해동에 반드시 필요하오. 조총을 주고서라도 가져가야 되오.”

“조총을 우리 임의로 처분할 수는 없네. 윗분들과 상의해야하네.”

“이미 우리가 조총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잖소. 포도아 사람들에게 처분을 맡겼더니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오.”

“큰일이군.”

* * *

장주의 상인들 사이에 조선 상단이 조총을 판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걸 확인한 해인은 길버트 선장을 불렀다.

길버트는 해인을 조선의 귀족으로 알고 있어서 자신이 모시는 남작과 준하는 예로 해인을 대했다.

양이들 기준으로 보면 양반도 귀족이니까.

거기에 무관 벼슬을 하고 있다고 하니 선장이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조선인 귀족과 여진 부족 후계자가 어찌 함께하는지가 헷갈릴 뿐이었다.

“선장. 이미 소문이 돌고 있으니 중단해야 하는 게 아니오?”

“염려 마십시오. 한 사람에게 모두 넘기는 게 아니고 서너 정씩만 넘기는 거라 괜찮습니다. 조총이 많은 이문을 남긴다는 걸 잘 아는 상인들인지라 절대로 판을 깨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사 관아에서 나선다고 해도 상인들이 알아서 막을 것이고요. 저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가 절실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조선 상단이 아닌 우리가 나선다면 더욱 조용히 거래를 끝낼 수 있습니다.”

“정말 괜찮겠소?”

“오죽하면 배를 지킬 최소한의 조총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리겠습니까. 상인들이 조총을 구하려고 혈안인 걸 보니 명나라 사정이 많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명나라도 이제 그 기운이 다한 것인지 관리들은 썩었고 도처에 도둑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재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을 키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서역 상인들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그들이 가져온 무기들은 아주 고가에 명나라 사람들에게 은밀히 넘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범선이 들어오면 당연히 조총이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한다는 것이다.

비록 조선 상단이 타고 온 범선이라도 말이다.

하다못해 천축이나 안남의 상인들도 어디에서 구했는지 조총을 몇 정씩 챙겨와 조총의 무게만큼 은을 요구했다.

문제는 길버트 선장이 대신 나서 주기에 일정 부분의 이문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서면 안 되오?”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나서는 게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쪽에 얼마의 이문을 드려야 하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련님을 구해 주셨는데 그 정도의 일도 못 해 준다면 어찌 뱃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조총을 대신 거래해 주는 대가를 치른다고 하자 길버트는 펄쩍 뛰었다.

뱃사람의 의리를 들먹이는 걸 보니 바다에서는 그들만의 법이 따로 있는 듯 보였다.

이때다 싶어 범선을 거론했다.

“그대들이 포기하고 버린 범선을 우리가 수리해서 이번에 가져온 것을 잘 아실 것이오. 그 범선은 어찌하면 되겠소?”

“이미 포기한 배였습니다. 그걸 어찌 수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가스파라호는 그대들의 것입니다.”

“그럼 범선의 이름을 우리가 바꿔도 문제가 되지 않겠소? 이 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묻는 것이오.”

바다를 떠다니는 범선이 수백 척이라면 모를까 불과 수십 척이 서역과 동양을 오간다고 들었다.

당연히 배의 형상만 봐도 누구의 것인지 어느 나라의 배인지를 뱃사람들끼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빤히 알고 있는 범선의 이름을 바꿨다면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해적들도 탈취한 범선을 몰고 다닌다기에 물어본 것이다.

괜히 해적으로 오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은 염려 마십시오. 이미 난파선이라고 공표했고 이번에 조선 상단에 귀속되었다는 것도 명나라 관아에 신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각 나라의 뱃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졌으니 오해를 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의외로 시원하게 권리를 포기했다.

서역 사람들이 제법 도리를 아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선장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하게 생각하오. 염치없지만 하나 더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옥미와 마령서 씨앗을 좀 구해 주시오. 우리가 직접 나서니까 조총과 맞바꾸자고 덤비니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오.”

“그 씨앗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구해다 줄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서 자신들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씨앗은 우리가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래요? 선장의 배에 그 씨앗이 있소?”

“당장은 없지만 금방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씨앗이오?”

“우리는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뱃사람입니다. 우리가 구하려고 나서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이라니, 도대체 무얼 믿고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것일까.

자신들을 지켜 줄 조총이나 화포가 있기 때문인가.

“그대들의 화포도 구할 수 있겠소?”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우리가 전해 준 화포로 인해 역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가란구륜 부족에 남겨 둔 화포는 무엇이오?”

“우리 선원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잘 묻어 달라는 선물이었습니다. 이렇듯 범선을 수리하여 명나라까지 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가져온 모피를 보았을 것이오. 혹시 욕심나지 않으시오? 화포를 가져온다면 질 좋은 모피를 양껏 가져갈 수 있을 것이오.”

해인의 말에 길버트는 눈빛을 반짝였다.

자신도 이번에 해동의 모피를 일부 구매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자신이 가져가고 싶었지만 명나라 상인이 환장을 하는 통에 수십 장밖에 얻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 상단에는 말하지 않았겠지요?”

“가란구륜 부족으로 올 수 있는 나라는 당분간 포도아로 국한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다음번 항해 때에 최신 화포를 구해다 드리지요.”

* * *

일백여 정의 조총을 길버트에게 넘기고 이틀을 기다렸다.

남작의 아들인 그레고리우스가 아직 가스파라호에 남아 있기에 길버트가 해인의 뒤통수를 칠 염려는 없었다.

그레고리우스가 가스파라호에 남아 있는 이유는 길버트가 씨앗을 구해 올 때까지 울아타에게 항해술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자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울아타에게 쏟아부었다.

항해술이라는 게 몇 달을 배운다고 쉬이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울아타는 배우겠다는 의지가 유난히 강했다.

실제로도 울아타는 그레고리우스의 머릿속에 든 항해술을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울아타의 명석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해동에서 장주까지 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스파라호의 타륜을 직접 잡았고 해도를 작성한 장본인이 울아타였다.

물론 그레고리우스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실수가 있을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일일이 지적해 주었지만.

이틀 후, 길버트 선장이 조총을 판 대금과 옥미와 마령서를 가져왔다.

옥미와 마령서를 각각 세 자루씩 가져왔는데, 이 정도 양을 심어 수확하게 되면 수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거였다.

“이 알곡 하나에 그렇게 많이 달린단 말이오?”

“땅을 깊게 갈아엎고 적당한 깊이로 심어 두면 석 달 후에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마령서는 아이 주먹만 한 알맹이가 네댓 개가 땅속에서 자라고 있을 겁니다. 그걸 캐다가 삶아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옥미는 땅 위로 훌쩍 자라면서 두어 개의 알곡 덩어리가 맺힐 것입니다. 그걸 그냥 삶아 먹어도 되고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두었다가 물을 부어 끓이면 죽이 되지요. 든든한 요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곡식이라면 병사들의 행동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찐쌀이나 육포처럼 딱딱하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 먹을 수 있으니, 이동이 잦은 병사들로서는 이보다 좋은 양식은 없을 듯싶었다.

“정말 석 달이면 추수를 할 수 있소?”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석 달 안에는 무조건 수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것 덕분에 기근을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연중 따뜻하다는 포도아도 이상 기온으로 겨울이 길어지고 무척 추워졌다고 했다.

조선만 유난히 추워진 게 아니었다.

겨울이 길어진 만큼 다른 곡식들은 수확량이 현저히 떨어졌는데 마령서와 옥미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니까 반가울 수밖에.

이걸 해동에 심어 씨앗을 늘린 후 조선에도 보급한다면 가진 게 없는 백성들도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 귀한 걸 구해 주셨는데 어찌 보답해야 하오?”

“아닙니다. 마령서 등은 도련님을 구해 준 선물입니다. 겨울쯤에 부족을 방문할 것이니 모피나 많이 준비해 주십시오. 대가는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선장의 말씀이 옳소이다. 어느 한쪽이 기우는 거래가 계속되면 결국은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때 박이규가 슬쩍 나서서 판을 키웠다.

“선장님. 혹시 범선을 구할 수 있겠소이까?”

“범선이 또 필요하십니까?”

“한 척으로는 불안해서 그렇소. 두 척이면 위급할 때 서로 도울 수 있지 않겠소.”

“아국으로도 오갈 생각이십니까?”

“기왕 교역에 나섰는데 명나라만 고집할 이유가 없지요. 멀리까지 다녀야 이문이 많이 남을 게 아니오. 그대들이 명나라와 왜국을 방문하는 것처럼 말이오.”

“흠! 범선을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귀족들도 너도나도 교역에 나섰기 때문이지요.”

“어허!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범선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없으니 위험한 항해를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박이규만큼이나 해인도 실망이 컸다.

범선을 한 척 더 구한다면 포도아는 물론 천축국도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온갖 향신료를 쉬이 구할 수 있다고 들었던 것이다.

고기를 먹을 때 누린내를 없애는 향신료를 이곳 장주에서 처음 맛봤는데,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는 양이들이 욕심낼 만했다.

해동에서도 사냥감이 풍부해 육식 위주의 식사를 주로 하는데 누린내만큼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었다.

“범선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대신 최근에 작성한 해도와 나침반과 천리경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만 있어도 바다에서 방향을 잃거나 암초에 부딪쳐 배가 파손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물건을 어찌···.”

“도련님과 우리 선원들을 살려 준 은혜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들의 동료애도 대단했다.

하기야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살려 내어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그 감동이야 오죽하겠는가만.

아무튼 범선을 구하지 못한 대신,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하고 목적지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기구를 얻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 대신 그레고리우스 도련님을 풀어 주십시오.”

“오해가 있었군요. 우리는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게 아니오. 아직 항해술을 다 익히지 못했기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장주에 있을 동안 제가 항해술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도련님보다는 제가 경험이 풍부하니까요. 그러니 이번에 도련님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굳이 그레고리우스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인질로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스스로 남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자 말없이 듣기만 하던 와르타가 입을 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우리의 손님이었소. 그가 우리 부족을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보내 줄 것이오. 그 대신 범선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오. 범선 장인이 도와준다면 손재주 좋은 해동 사람들이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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