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교역 (4)
097화 첫 교역 (4)
길버트 선장은 장주에 머물 동안 울아타에게 항해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항해 기구인 나침반과 해도(海圖) 등도 전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조선 주변의 바다도 그려져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세상을 돌아다녔으면 조선까지 그려 넣었을까.
해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조선의 형상이 다른 나라보다 너무 작게 그려져 있기에 물어보았다.
“선장. 조선 바다를 누가 그렸소?”
“나도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선구자들이 이백 년 전부터 동양으로 여러 번 항해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명나라에도 천축국과 아라비아를 돌아본 정화라는 관리가 있다고 하던데 들어 보셨습니까?”
“금시초문이오.”
이제 겨우 세상에 눈뜬 해인이 그런 일을 어찌 알겠는가.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음이다.
“이 세상이 둥글게 생겼다는 것도 모르십니까?”
“······?”
“하늘의 해가 뜨고 지는 이유가 바로 이 세상이 둥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걸 알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과일처럼 둥글게 생겼기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으나, 서역 사람들과 조선과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벌어져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조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명나라도 이들과 교류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어찌 조선만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담을 쌓고 있는지 말이다.
“솔직히 처음 듣는 말이라 무척 혼란스럽소. 우리는 그저 명나라의 눈치만 보는 터라........”
“우리도 조선과 교역을 하고자 몇 번 시도했었습니다만. 어떤 관리도 응하지 않더이다. 그나마 먼 곳에서 왔다고 물과 식량을 조금 얻은 게 전부였습니다.”
어느 바닷가 고을에 당도했는지는 모르나 고을 현감이나 군수가 독단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다.
아마 주상에게 장계를 올리고 법석을 떨었을 것이지만, 색목인이라 부르는 양이들이 왔다고 쫓아내라고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물과 식량을 얻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괜히 활을 날리고 칼부림이라도 났으면 큰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니까.
이들은 범선을 보호하기 위해 조총과 화포를 싣고 다니는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약탈도 서슴없이 자행한다 들었다.
오늘 해인은 길버트 선장으로 인해 세상에 대해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양이들과 동양의 다른 나라는 이렇게 서로 교역을 하는데 조선은 타국과의 교역조차 막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해동에 뿌리를 내린 것은 참으로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길버트 선장. 장주에 머물 동안 소관에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려 주시오. 그러면 크게 보답하리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도련님을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세상일을 조금 말해 줬다고 어찌 보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조선에 장군과 같은 분이 계셔서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소관은 조선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했다오.”
“새로운 곳에 정착했다면···. 나라를 세운 겁니까?”
“그저 작은 부락일 뿐이오. 소관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오.”
말을 하다 보니 해동을 어찌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조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긴 했으나 나라라고 말하기에는 낯간지러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진 부족에 편입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공국이군요.”
“공국이라니요?”
“사람 수가 적고 땅이 작은 나라를 우리는 공국이라고 부릅니다.”
“흠! 사람은 적으나 땅은 조선보다 훨씬 크다오.”
해동만 해도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북쪽 섬인 쿠예를 합하면 몇 배는 더 될 것 같았다.
다만 아직까지 북쪽 땅을 해동이라 명명하지 않았을 뿐.
이번에 돌아가면 발길이 닿는 곳마다 해동의 땅이라는 비석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게 큰 땅을 확보하고 계시다고요?”
“그렇소. 우리의 영역은 이미 예전에 선조들이 발을 디딘 곳이오. 발해라고 들어 보았소?”
“발해라···.”
“고구려의 후손이 만든 거대한 나라였소.”
“아! 코레를 말하는군요. 우리는 지금도 조선을 코레라고 부릅니다.”
고구려는 일찍이 타국과 교역을 했다고 들었다.
길버트가 말하는 코레는 아마 고구려를 말하는 것일 터.
“앞으로 해동을 코레라고 불러도 무방하오. 해동 사람들도 코레의 후손이라오.”
* * *
장주에 보름가량 머물다가 출발한 코레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울아타가 선장이 되어 해동으로 출발했다.
코레호는 가스파라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명의 관아에 교역선으로 신고하는 과정에서 가스파라호를 코레호로 개칭했던 것이다.
코레는 서역 사람들이 고구려를 일컬어 그리 부른다고 하니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해인은 길버트에게 선물 받은 천리경을 꺼내어 망망대해를 살폈다.
이따금 보이는 거대한 물고기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집채만큼이나 큰 시커멓게 생긴 물고기는 고래였는데 등에서 물줄기를 뽑아내며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혹시 고래가 범선에 다가와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싶어 무척이나 신경 쓰였던 것이다.
천리경은 먼 곳의 물체를 눈앞으로 당겨 보는 요상한 물건인지라 해인은 천리경에 푹 빠져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둥근 대롱을 늘렸다 줄였다 하면 크기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천리경만 있으면 먼 곳에 있는 적도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미리 적을 발견했으니 전투에서 승리하는 건 당연하다.
나중에 길버트가 해동을 방문할 때 천리경을 더 갖다준다고 했으니 앞으로 건주여진이든 왜군이든 천리경의 제물이 될 터였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해인에게 박이규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파도가 제법 세었던 것이다.
“형님. 이제 적응할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중심을 그리 못 잡으시는 게요?”
“내가 아우님처럼 대단한 무예를 익힌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이런 파도에 중심을 잡을 수 있겠나.”
“몸에 힘을 빼고 파도에 몸을 맡기시오. 그럼 자연스럽게 중심이 잡히오.”
안 넘어지려고 기를 쓰니까 오히려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했음에도 박이규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예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말이 쉽지. 제대로 안 되네. 그런데 아우님은 뭐가 그리 좋아서 미소를 짓고 있나?”
“이 천리경이란 게 요상해서 그렇소. 이런 걸 만들어 내는 서역 사람들이 참으로 신통방통하지 않소? 이것 말고도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포도아에 가 보고 싶은 게로군.”
“포도아뿐만 아니라 천축국과 안남 등도 가 보고 싶소. 우리 조선보다 일찍 눈을 뜬 나라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지 직접 보고 싶소.”
이번에 명의 장주에서 해인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 보잘것없는 나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공맹을 쫓고 있는 조선 양반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지한지를 말이다.
새로운 세상을 본 후로는 더 이상 조선의 눈치를 보고 연연할 마음은 사라졌다.
나라의 안위는 도외시하고 왕권만 생각하는 왕과 당파 싸움에 매몰된 신료들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기왕 일으켜 세운 해동을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곳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누구에게도 얕보이지 않으려면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하고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유교보다는 실용적인 양이의 학문을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아주 귀중한 종자를 얻었다.
옥미와 마령서만 있으면 식량 걱정을 덜 수 있게 될 것이다.
해동에 잘 적응한다면 쿠예섬에도 보급할 생각이었다.
해동의 인구가 일만이 넘어가면 쿠예섬도 본격적으로 손에 넣을 작정이다.
자꾸 북쪽으로 올라가 봐야 추위로 인해 농사짓기도 힘들뿐더러 사람이 살아가기에도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동의 영역임을 표시하고 누구도 욕심내지 못하게 할 거였다.
* * *
돌아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바닷길을 잘못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폭풍이나 다름없는 바람을 만나 무척 고생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배가 파손되거나 선원들이 다치는 일은 없었지만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뼛속 깊이 새길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겨우 한 번의 항해로 바다를 만만하게 봤던 일행들은 식겁을 한 셈이었다.
대마도를 끼고 동해로 들어설 즈음에 왜군의 선단을 만나기는 했으나 워낙 덩치가 큰 배이기도 하거니와 서역의 배로 오인해서인지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코레호에 화포라도 있었다면 요절을 내 주었겠지만 조총 몇 정으로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었기에 속만 끓였다.
해전을 치른 경험도 없이 어설피 덤볐다간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될 것이기에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교역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돌아온 해동은 완연한 초여름 날씨였다.
그동안 해동에는 별일이 없었다.
주을과 배 속의 아이도 무탈했고 아탕게도 해동을 잘 이끌고 있었다.
해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함경도를 잠시 다녀온 아탕게는 배를 만들 줄 아는 장인을 열 명이나 데려왔다.
전란의 여파로 먹고살기가 팍팍해진 장인들이 식솔들까지 데리고 해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굳이 강제로 데려올 것도 없었다고 했다.
이미 함경도 일원에는 해동으로 이주하면 왜군에게 죽을 염려는 물론 굶어 죽을 걱정도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녹둔도에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함경도까지 올라왔으나 당장 부쳐 먹을 논밭이 없으니 비어 있는 녹둔도로 모인다는 거였다.
보리며 귀리가 무릎까지 자란 걸 보고 속으로 무척 놀랐다.
이미 희미하게나마 알곡이 맺혔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곡이 굵어지고 단단해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해인의 기억에는 각종 곡식들이 생장하는 모습들이 줄줄이 지나갔지만, 그런 단편적인 기억으로는 이게 과연 잘 자라는지가 가늠이 안 되었다.
다만, 농사를 지어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화전을 일군 첫해에 뿌린 씨앗처럼 해동의 지력이 무척 좋다는 거였다.
해인이 잘 자란 곡식을 보며 입을 딱 벌리고 있자 함께 걷던 아탕게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농사를 지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형님이 놀라실 줄 알았지요. 주민들도 이렇게 잘 자라는 걸 본 경우는 없다고 하오. 우린 참으로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 같소.”
“거름을 준 것도 아닌데 어찌···.”
“그만큼 지력이 좋다는 증거지요. 앞으로 몇 년간은 윤작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기름진 땅이라 하오. 이렇게 빨리 자란다면 겨울이 아무리 빨리 찾아와도 걱정이 없을 것이오.”
“그렇겠구나. 내가 이번에 가져온 씨앗도 뿌려 보자. 조금 늦기는 하지만 생장 속도가 석 달밖에 안 된다니까 무리를 해도 될 것 같구나.”
앞으로 추석까지는 넉 달이나 남았기에 추수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 무리를 해 보려는 것이다.
가져온 씨앗을 전부 심지는 않고 반만 뿌려 볼 참이다.
행여 실패할 것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씨앗을 구하셨소?”
“옥미와 마령서라는 씨앗이다. 씨를 뿌리고 석 달이면 추수를 할 수 있다니까 해동에 딱 맞을 것이다.”
아마 다른 여진 부족이 이렇게 곡식이 잘 자라는 곳인지 안다면 벌떼처럼 달려드리라.
이곳을 지키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보물을 가진 자가 힘이 없으면 뺏기는 게 세상 이치이다.
“석 달 만에 추수한다면 한 해에 두 번 심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오?”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만. 일단 올해는 씨를 뿌려도 문제없을 것 같구나.”
“알았소. 당장이라도 심어 보겠소. 만약 지금 파종해도 추수가 가능하다면 내년에는 이른 봄부터 부지런을 떨어야지요.”
전사인 아탕게가 농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을지는 몰랐다.
아탕게도 이젠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타고난 전사지만 세상은 싸움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이다.
“명나라 상인들이 조총에 목을 매더구나. 그만큼 명나라가 불안하다는 증거다.”
“내분이 일어난 게요?”
“명나라는 너무 늙었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나라 이름이 바뀔 것 같소?”
“그거야 모르지만. 곧 시끄러워질 것 같다.”
“우리도 힘을 길러야겠군요.”
“이미 기르고 있잖으냐.”
“이주민을 더 받아야 하지 않겠소. 백성들의 숫자가 곧 힘이 되오.”
역시 아탕게는 흔해 빠진 전사가 아니었다.
비록 건주여진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부족장의 아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맞는 말이다. 곧 왜란이 끝날 것이다. 그리되면 이주민들을 받는 것도 어려워질 게다.”
“지금이 적기네요.”
“그래. 이제는 눈치 보지 말고 해동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내자.”
“드디어 형님께서 작정을 하셨군요.”
“이번 교역에서 많은 걸 느꼈다. 알고 보니 조선이 참으로 작더구나. 좁은 곳에서 아옹다옹할 게 아니라 이곳에서 웅지를 펴 보자. 아우가 고생을 좀 많이 해 줘야겠다.”
“예. 그래야지요. 해동만 해도 조선의 몇 배나 되는 곳이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도 많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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