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에서 (1)
101화 한성에서 (1)
한성으로 출발하려고 경흥 부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이제 한성으로 가면 다시 얼굴을 볼 날이 있을까 모르겠네.”
“소관은 다시 함경도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동안의 전공으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는데 이 험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여진족을 잘 알고 있는 소관이 어찌 편한 곳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충신이로고.”
변경인 함경도에 가겠다고 할 무관은 조선 천지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경흥 부사의 입에서 충신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소관. 영감께 부탁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게.”
“서신을 받은 지 두 달을 넘겼는데 허 영감 또한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소관이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한 걸 모르고 있었다는 장계를 올려 주실 수 있겠는지요. 이렇다 할 구실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그러합니다.”
“최 교위 같은 충신이 조선 천지에 어디 있다고 그런 오해를 하겠는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냐고 의문을 가질 신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토의 병사들도 남쪽으로 철수했고 함경도가 안정되었기에 여진족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제껏 요동에 있었다고 핑계를 댄다면 괜한 오해만 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네. 본관이 그 정도도 못 해 주겠나. 쯧쯧··· 파당의 이익이 걸려 있으면 최 교위의 전공도 깎으려 들지도 모르지. 참으로 통탄할 일일세.”
“소관은 공을 탐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다만 핍박이나 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최 교위의 활약은 함경도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지금껏 일언반구도 없었네. 이는 최 교위의 활약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까 염려하는 소인배들이 주상 곁에 있기 때문일세.”
권좌에 오른 이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파벌을 만들고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상대방을 깎으려 든다.
권력의 달콤함에 빠지면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고 오로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뭉친다.
조선이 지금 이 꼴이 된 이유도 그런 신료들 때문이었다.
물론 왕권 강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속 좁은 주상이 가장 큰 원흉이지만.
경흥을 출발한 해인 일행은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왜군이 이미 남쪽으로 퇴각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작년만 해도 온통 잡초만 무성했던 논밭에는 곡식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는 마을마다 온전한 집이 보이지 않았다.
불탄 채로 남아 있었고, 구석진 곳에는 인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군들은 퇴각하면서 집을 불태웠고 이유 없이 조선 백성들을 죽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들녘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어디에 숨었다 살아남았는지는 몰라도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먹고살겠다고 농사를 짓는 걸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저들 중 대부분은 친인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고 심지어는 왜국으로 끌려갔을 것인데 말이다.
왜군에 사로잡힌 임해군과 순화군도 왜국으로 압송되었다고 했으니 조만간 화의 협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할지, 그저 암담할 따름이었다.
왕을 따라 몽진이나 갈 것이지 뭐 한다고 함경도로 와서 도움은커녕 걸림돌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해인이 사로잡은 가토의 우군장인 마사노리와 교환하려 했으나 결렬되었다고 한다.
왜국은 조선 왕자라는 좋은 먹잇감을 쉬이 놓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
왕자들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하고 협상해야 왜군들도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내놓았을 것인데, 주상은 필시 왕자들을 살리려고 협상에 나선 신료들에게 저자세로 임하라고 했을 터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의병들의 활동만 위축되게 만든 왕자들이나, 그저 자식의 안위만 챙겼을 주상을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듯이 견부 밑에 호자가 날 리 있겠는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 * *
왜란 때 사라졌던 주막이 곳곳에 문을 열고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섯 필의 말이 산허리에 있는 주막에 도착하자 주모가 뛰쳐나와 호들갑을 떨었다.
요즘 같은 때 말을 타고 다닌다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의 무리일 것이니까.
거기에 무장까지 했으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주모. 오늘 이곳에 유할 것이니 봉놋방을 내어 주게.”
“아이고 나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몹시 시장하니 국밥부터 말아 주게. 돼지고기가 있으면 좀 삶아 주고.”
“예. 나리. 쇤네가 금방 올리겠사옵니다.”
사십 중반쯤 되었을 주모는 귀한 손을 맞이한 게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리 통에 목숨을 부지한 것도 용한데 외진 곳에 주막을 연 것을 보니 참으로 억척스러워 보였다.
주모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해인에게 호위대 조장인 길섭이 다가왔다.
“장군. 수상한 자들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외진 곳임에도 주막에 무척 크오이다. 길손들도 유난히 많고요.”
방금 당도한 주막은 함흥을 한참 지나 영흥 고갯마루를 코앞에 둔 산 허리께쯤이었다.
지금 시간에 고갯마루를 넘으면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터라 부득불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건 맞지만, 가진 것 없는 민초들이 주막을 이용하기에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주막에 드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이는구나.”
“주막 주변에 급조한 움막들이 여러 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막 근처에 옹색한 움막들이 눈에 띄었다.
주막에 들어갈 형편은 안 되는 사람들이 근처에서 하루를 유하려는 것일 터.
움막들은 밤이슬이나 눈비를 피하는 수준이었는데 여러 사람이 손을 본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 머물다 간 후에 다음 사람이 손을 보고 또 그다음 사람이 손을 본 것이리라.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물다 간 흔적이었다.
주막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국밥 장사를 하다 규모가 커진 것이고.
해인이 머무는 봉놋방도 최근에 새로 달아냈는지 나무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왜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긴 했나 보구나. 다들 고향을 찾아 내려가는 걸 보니. 당장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운데 뭘 먹고 먼 길을 가는지 모르겠구나.”
“주막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풀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쯧쯧···. 곡식을 조금씩 나누어 주거라. 풀죽에 알곡이라도 들어가야 힘을 쓰지.”
“예. 장군.”
아직 추수를 하려면 한참이나 남아서 도처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을 때였다.
작년에는 왜군들 때문에 파종도 못 했으니 먹을 게 귀할 수밖에.
그래서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무껍질을 벗기고 풀을 베어 끓여 주린 배를 채웠을 것이다.
측은지심으로 얼마 안 되는 곡식을 조금 나눠 주었다.
안 봤으면 모를까 풀죽을 끓이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허우대 멀쩡한 장정들이 움막을 돌아다니며 으르딱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들은 누구냐?”
“인근에 사는 왈패들이 텃세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사람을 해하는 것 같지는 않더이다.”
“저게 해를 끼치는 게지 무엇이 해란 말이냐. 아직도 없는 사람들 등치는 놈들이 있구나. 가서 잡아 오너라.”
허우대 좋은 몸이면 농사를 짓든가 나무를 해도 먹고살 것인데 남의 것을 뺏는다는 게 더 괘씸했다.
저럴 힘이 있으면 의병에 가담하여 왜군들을 상대해야 옳거늘, 힘없는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호위대에게 끌려온 왈패들은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쳤다.
“이보시오. 우리는 영흥에 사는 사람인데 댁들이 무슨 이유로 죄 없는 우리에게 무력 행사를 하는 게요?”
“내 눈에 띄었기에 좀 보자고 했다. 너희들도 일면식 없는 저 사람들에게 으르딱딱거리지 않았느냐.”
“······?”
“사지육신 멀쩡한 놈들이 이곳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게 눈꼴시어서 그런다. 길섭아. 저놈들의 팔을 한 짝씩 부러뜨려라.”
“이것 보시오. 무슨 이유로 팔을 부러뜨리려는 것이오?”
놈들이 악을 쓰거나 말거나 길섭과 호위대들은 불쏘시개로 쓰는 장작을 꼬나들더니 모질게 팔을 내리쳤다.
딱! 딱! 딱! 딱!
일 년이 넘도록 밤낮으로 무예를 익힌 호위대는 일당백의 전사가 아니던가.
그런 이들이 내려치는 방망이질은 모질다 못해 섬뜩할 정도였다.
듣는 사람의 오금이 다 저릴 만큼 찰진 소리였다.
길섭 등의 매질에는 감정이 잔뜩 실려 있었던 것이다.
팔이 부러진 왈패들은 마당을 굴러다니며 고통스러워했다.
“왜놈과 맞서 싸워야 할 멀쩡한 몸뚱이를 엉뚱한 데 사용한 대가이다. 억울하면 주상에게 하소연하여라. 주상을 대신하여 죄를 물었으니 말이다. 나는 무관 최승우라고 한다.”
* * *
철원 도호부에 가까워질수록 해인의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했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다들 고향을 향하기에 당연히 보현 스님과 사형들도 심현사에 돌아왔을 것이므로.
왜군들이 아무리 설쳤어도 보현 스님과 사형들은 무사할 것이었다.
보개 마을 사람들까지 피신시킬 정도인데 별일이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을 살필 자신이 없었다면 모두 이끌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런 생각으로 보개 마을에 들어섰으나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단숨에 심현사로 달렸으나 거기에도 사람의 온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군들이 남쪽으로 철군한 지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보현 스님과 사형들 그리고 보개 마을 사람들이 증발하듯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서둘러 마을을 벗어났으면 떠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증발하듯 사라지고 종래 무소식이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금강산을 둘러보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심현사에서 한없이 시간을 축낼 수 없었던 해인은 한성으로 말을 몰았다.
한성에 도착하자마자 외가댁부터 들렀으나 하인 두엇만 해인을 반길 뿐 아무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과천으로 피난 가 있던 외가 식구들은 한성이 수복되자 우선 하인들만 올려보내어 집을 건사하게 한 거였다.
외가댁은 벼슬하는 사람이 없는 터라 왕을 따라 몽진을 갈 수도 없었기에 왜군이 없는 곳을 택했단다.
왜군들이 한성을 공략하자 북쪽으로 가지 않고 문중 땅이 있는 과천으로 간 거였다.
그곳 또한 왜군들이 들이닥쳤으나 다행히 무사하다고 했다.
만약 해인의 말을 듣고 심현사로 왔다면 더 낭패를 볼 뻔했을 거였다.
일단 외가댁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다니까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함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성에 입성한 왜군들은 종루나 돈화문 일대의 규모가 큰 기와집을 징발해 사용했는데 외가댁도 거기에 포함되었으나 그리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왜군 중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가 머물렀던지 비교적 깨끗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군들이 철수하면서 외가댁에 비치된 서책이나 도자기 등 값나가는 물건은 남김없이 쓸어가 버렸다.
외가댁에서 나와 허인회 영감 댁으로 찾아간 해인은 누추한 기와집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인회는 여전히 예전처럼 구차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이 난리 통에는 누구나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으니 허인회인들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만.
“이리 오너라.”
“뉘신지요?”
대문을 열고 고개만 삐죽 내밀던 떠꺼머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교위 나리!”
“갑득이구나. 그동안 잘 있었느냐?”
“아이고. 교위 나리. 무사하셨군요.”
갑득은 죽었다 살아난 부모를 만난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암행 길에 함께 고초를 겪었던 터라 정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 의외의 반응이라 조금은 얼떨떨했다.
“갑득아. 왜 그러느냐?”
“소인은 나리께서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하다.”
“영감마님께서 자나 깨나 나리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어찌 그리 연통이 없었습니까?”
몇 달 전부터 깜깜무소식이었으니 이런 반응도 이해는 되었다.
아마 해인이 잘못되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함흥에서 왜군과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부터는 명나라와 쿠예섬을 다니느라 연락을 끊고 있었더니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영감께서는 댁에 계시느냐?”
“아이고. 소인이 너무 반가워서 그만. 영감마님은 사랑방에 계시옵니다.”
워낙 옹색한 집이라 대문간의 소란이 다 들렸는지 여기저기서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방 문을 연 허인회가 해인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영감. 그동안 잘 계시었는지요.”
“최 교위! 이 사람아.”
단 두 마디였지만 허인회의 말속에는 온갖 감정이 다 담겨 있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어이구. 자네 때문에 애간장이 다 녹았네.”
허인회는 무척 쇠약해져 있었다.
시원찮은 몸으로 주상을 따라 의주까지 갔다 왔으니 오죽했겠는가.
왕실 사람들이야 관아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정 신료들은 여염집을 징발하거나 한뎃잠을 잤을 거였다.
금방이라도 조선이 망할 처지였으니 제대로 대우받았겠는가.
나라 걱정에다 식솔들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할 신세였을 터.
그런 상황이면 없던 병도 나게 되어 있다.
하물며 암행 때 얻어걸린 고뿔의 여파로 쇠약해진 허인회는 더 말할 것도 없음이다.
사랑방에서 해인의 절을 받은 허인회는 눈시울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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