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에서 (4)
104화 한성에서 (4)
“포도아라는 나라에서 만든 범선이라는 배다. 판옥선보다 훨씬 크고 빠르다.”
“그 와중에 포도아에도 다녀온 것이오?”
“처남이 난파된 포도아 배를 구조했는데 그걸 수리해서 내가 당분간 사용하기로 했다.”
“포도아 배를 구할 정도면 여진족도 배를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니오.”
“이미 왜국이 조선을 침략할 걸 알고 있을 정도로 정보에 밝고 왜국으로 교역도 다녀올 정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넓더라.”
“여진족이 그저 노략질이나 하는 무식한 작자들이 아니었군요?”
“동해여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여진족이 아니다.”
“형님. 여진족 얘기를 자세히 해 보오. 무척 궁금하오.”
외조부와 외삼촌은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해인은 찬영의 방으로 끌려와 취조 아닌 취조를 받아야 했다.
왜란 중에 과천에서 갇혀 있다시피 한 찬영의 호기심을 풀어 주려니 그것도 고역이었다.
그러나 해인이 벌인 일을 두고 가장 호의적인 터라 외조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찬영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밤이 이슥토록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승우 형이 해동의 왕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아니오. 그럼 나는 거기 가면 왕제가 되는 것이고.”
“굳이 따지자면 그런 위치인 게지.”
“그런데 형수가 여진의 공주라면 무척 고귀하게 보이겠소.”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눈에는 고귀하다기보다는···. 어여쁘긴 하더구나.”
“무슨 기준을 말하는 것이오?”
“구중궁궐에서 화초처럼 자라는 공주와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건 기본이고 요즘은 조총까지 다루는데 그런 여인을 조선에서 과연 어찌 보겠느냐?”
“그리 활달한 분이시오?”
“여진 여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일은 예사로 하더라.”
주을을 떠올리니 불현듯 보고 싶었다.
제법 배가 불렀음에도 조총을 만지작거리며 생글거리던 주을의 건강한 미소가 그리웠다.
“형수는 글을 아시오?”
“조선인 유모에게 글뿐만 아니라 규수로서의 기본은 익히기는 했는데 글을 읽고 옷을 짓는 것보다는 들로 산으로 나다니는 걸 더 좋아하더라.”
“핫핫핫···. 그런 얼른 형수를 보고 싶군요.”
외조부와 외삼촌은 해인이 벌인 일로 인해 경황이 없는데 찬영은 그저 호기심만 가득했다.
“넌 불안하지도 않느냐?”
“현재 우리 집안에서는 누구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데 무엇이 불안하겠소.”
“나로 인해 역적의 집안이 될 수도 있는데?”
“주상의 눈에 들지 않거나 파당이 다르면 역적으로 만드는 세상이오. 돌아가신 고모부도 그렇게 억울하게 당했잖소. 이런 조선에서 무슨 희망을 품고 살겠소. 소제는 역적이 되어도 좋으니 마음 편히 살고 싶소.”
억울한 누명을 쓴 생부로 인해 생모는 종이 되지 않으려고 피신을 다니다가 죽음을 맞이한 거였다.
그리고 해인은 영문도 모른 채 절에서 자랐지 않았던가.
역모로 몰리면 이렇듯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해동은 평화롭지만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제 한 몸 지키지 못하면 식솔들까지 잃는단 말이다.”
“형님. 소제도 이젠 검술이며 역근경을 제법 펼친다오. 형님이 가르쳐 준 태식호흡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단 말이오.”
그러고 보니 찬영이 풍기는 기도가 한성을 떠날 때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태식호흡을 일백 정도 헤아려야 풍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태식호흡이 일백을 넘겼구나.”
“역시 알아보는군요. 글을 읽지 않는다고 조부님께 무던히도 혼이 났지만 왜군들이 과천 자락으로 몰려오면 한 놈이라도 베고 죽으려고 하루도 빼지 않고 수련했소.”
찬영의 몸은 예전의 글방 도령이 아닌 해동의 병사들 수준은 되어 보였다.
물론 실전 경험이 없는 터라 전투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전장에서 걸림돌은 될 것 같지 않았다.
“잘했다. 난리 통에는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 혼인을 안 한 거냐?”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요. 혼약한 집안이 여주에 사는데 이번에 왜군에게 절단이 났소. 하필 왜군이 진군하는 길목에 사는 바람에···.”
찬영이 이를 갈고 무예에 매진한 이유가 혼인할 처자의 죽음도 한몫을 했으리라.
졸지에 혼약한 이를 잃었으니 그 충격 또한 컸으리라.
어른들끼리 약속한 혼약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규수지만 왜군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죽었을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칠 터.
“이미 지난 일이다. 잊어라.”
“형님 같으면 쉬이 잊히겠소?”
“내가 전장에서 얼마나 많은 주검을 봤는지 아느냐? 내 손으로 목숨을 거둔 왜군이나 여진 전사들을 생각하면 꿈자리가 사납다. 그래서 지난 일들은 억지로라도 잊으려고 한다.”
“승우 형이 전장을 전전하며 매일 피비린내를 맡고 견딘 것에 비하면 소제가 지금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게지요. 나라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양반 중의 한 사람이라 죄스럽기도 하고요.”
“그런 마음이면 됐다. 자! 한 잔 받고 잊어라. 더 좋은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보자.”
해인도 술기운이 젖어 전에 없이 호기를 부렸다.
아직 갈 길이 먼 해동이지만 사람이 모이면 어찌 잘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우선 외가 식구들이라도 해동으로 오면 힘이 되고 전보다는 덜 외로울 것이므로.
* * *
허인회의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해인은 지인들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명월옥에서 인연을 맺은 무과 시험 동기였던 김민혁은 한성에 마지막까지 남아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고, 마찬가지로 한성 부윤인 김인수 대감도 그때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전사 소식을 듣고 해인은 한참이나 망연자실했다.
어찌 보면 한성에서 해인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아닌가.
외가댁 골방에서 술로 속을 달래던 해인을 찬영이 바깥으로 끌어내었다.
“승우 형. 나보고는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라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오.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지 않소. 억울한 죽음도 아니고 한성을 지키다 돌아가셨으니 그나마 다행이오. 한성을 버리고 피난 간 자들은 얼굴도 못 들고 다니지만 그쪽 집안사람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오.”
“······.”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쏘입시다. 그러면 조금 나아질 것이오. 형님이 이러고 있으면 해동에서 기다리는 형수님이나 백성들은 어찌 되겠소.”
찬영이 해동을 거론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란으로 잘못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으며 그 일로 고통받는 사람 또한 한둘이겠는가.
죽은 사람에 미련을 두다가 산 사람들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큰 잘못이다.
며칠 골방에 박혀 있었던 건 해인이 함경도에서 왜군을 상대로 그렇게 애썼음에도 지인들은 한성에서 허망하게 죽었기에 맥이 빠졌던 것이다.
“그래. 해동으로 가야겠다. 같지도 않은 직첩을 받겠다고 한성에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나.”
“소제도 함께 가겠소.”
“아니다. 내가 배를 갖고 제물포로 올 것이니 그때 외조부와 함께 오거라.”
“형님. 한성은 답답해 미치겠소. 해동에 가서 말을 타고 질주하며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소.”
찬영은 한시라도 빨리 해동으로 가고 싶었다.
형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곳은 무릉도원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간에 지금은 무조건 한성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곳은 명월옥 같은 기생집은 고사하고 주막조차 없는 곳이다. 며칠만 지내보면 숨이 막힐 곳인데 어찌 견디려느냐?”
“형님. 그곳에 놀러 가겠다는 게 아니오. 백성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사냥도 하며 해동에 보탬을 주려고 가는 것이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뒹굴며 건주여진의 도발도 막을 것이고요.”
“정말 그럴 참이냐?”
“이제 걸음마를 떼는 곳인데 소제라도 한 손을 보태야지요.”
찬영의 의지는 확고한 것 같았다.
지금 찬영의 무예라면 능히 수비대 정도는 맡을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해동의 수비대를 한번 맡아 보겠느냐?”
“뭐든 시켜만 주시오. 뼈가 부서져라 힘써 보겠소.”
“야숙을 밥 먹듯 해야 하고 쉴 틈도 별로 없다.”
“소제가 바라던 바요.”
“좋다. 내일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나와 함께 해동으로 가자.”
* * *
다음 날, 해인은 외조부와 함께 조반을 들며 찬영을 해동으로 데려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허인회가 함경도에 자리를 알아본다고 했으나 공적을 인정받아 새로운 임지를 받은들 정상적으로 정사를 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은 해동에 집중할 때이지 알량한 벼슬에 연연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접고 나자 모든 게 다 부질없어 보였던 것이다.
“찬영이 너를 따라가겠다고 했단 말이지?”
“한성에 있는 게 너무 답답하다 하더이다.”
“그놈이 그동안 서책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고 무예만 연마하더니만....그곳에서 찬영이 할 일이 있느냐?”
“찬영에게 해동의 수비대장을 맡길 생각입니다.”
“찬영이 과연 잘해 낼 수 있겠느냐?”
“찬영의 무예라면 충분합니다.”
외조부는 해인의 말을 듣고부터 며칠 동안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해동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당장 옮길 수는 없기에 우선 찬영이라도 먼저 보낼 생각인 것 같았다.
해동이 과연 해인의 말마따나 무릉도원인지를 가늠해 보려는 것일 터.
“가산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우리는 가을쯤에나 해동으로 가련다.”
“소손이 배를 보내겠사옵니다.”
“아니다. 남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마라. 우리가 알아서 함경도까지 가겠다. 거기서 만나도록 하자.”
“소손이 말을 타고 달려도 십 일은 잡아야 되는 거리이옵니다. 식솔들을 이끌고 오려면 한 달 남짓이나 걸리는데 어찌 감당하려고 하십니까. 배를 이용하면 편히 오실 수 있사옵니다.”
허인회도 함경도까지 오면서 노독으로 건강을 해쳤기에 하는 염려였다.
물론 그때는 겨울 날씨라 고생이 남달랐지만 말이다.
“이놈아. 서역의 배가 제물포에 나타나면 어찌 되겠느냐? 관아에서 모르고 넘어간다 해도 제물포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칠 게다. 괜히 남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다.”
“소손이 알아서 할 것이니 염려 놓으소서.”
외조부의 염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서해는 섬이 많아 배를 얼마든지 숨길 수가 있다.
“이 할아비가 비록 늙었으나 그 정도도 못 걸을 것 같으냐?”
“할아버님이 건강하신 건 소손도 잘 아옵니다. 하오나 아녀자들이 감당 못 할까 걱정되어 그런 것입니다.”
외조부가 어딘가로 떠난다면 직계 외에도 따를 사람이 많다.
단출하게 움직이는 것도 눈에 띄거늘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관아에서도 예의 주시할 것이다.
왜군이 남쪽으로 후퇴한 마당에 북쪽으로 떠나는 피난 행렬을 무심히 볼 수령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었다.
“제물포로 온다는 게 이 할아비와 아녀자들이 걱정되어 무리를 하는 게 아니더냐.”
“할아버님. 설사 무리를 한다손 치더라도 소손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옵니다. 혹여 누군가 방해를 한다 해도 거뜬하게 따돌릴 수 있고요.”
“뭘 믿고 그리 큰소리냐?”
“범선의 선원들이 모두 병사들이고 소손의 호위대원입니다. 그들만으로도 수백의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해인의 말에 외조부와 외삼촌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범선이 얼마나 크기에 수백의 적을 물리칠 만한 병사들을 태우고 다닌단 말인가.
“그리고 소손 밑에는 범강장달 같은 병사들이 삼백 명이 넘고 그 외에도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자경대가 사백이 넘사옵니다. 그들만으로 왜군 수천을 물리치고 요동을 호령하는 건주여진 전사들을 도륙 내었습니다. 그러고도 단 한 사람의 인명 손실이 없었나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왜군이 사용하는 조총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지요. 그걸 노획해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군 것보다 훨씬 좋사옵니다.”
내친김에 해동의 병력까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두 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해동의 무력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네가 도깨비라도 만났더냐?”
“궁하면 통한다고 했습니다. 소손 그런 마음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이 할아비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느냐?”
“예.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지만 중요한 건 별로 없습니다.”
“놀랄 일이 더 없느냔 말이다.”
“하하하···. 놀랄 일은 얼추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놈아. 네 얘길 듣다 보면 내가 쓰러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다.”
해동에 와 보면 놀랄 일 천지인데 정말 외조부께서 쓰러질까 겁난다.
그래도 자랑할 게 많은 게 어디인가.
해동으로 이주한 게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두고두고 할 것이다.
해동은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역동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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