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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105화 (105/130)

한성에서 (5)

105화 한성에서 (5)

허인회를 다시 찾은 해인은 한성을 떠날 뜻을 밝혔다.

어차피 논공행상이 끝나면 해인을 함경도로 보낼 것인데 미리 내려가 있겠다고 한 것이다.

해인만큼 여진족을 잘 알고 있는 무관이 없으므로 조정에서 임지만 정해 주면 그에 따르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폈다.

“지금 조정에서는 자네의 공적을 놓고 고심 중에 있는데 이렇게 떠나면 주상 전하를 능멸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네.”

“영감. 소관이 한성에 온 지 벌써 열흘이 다 되어 갑니다. 아직 왜군이 남해 지방에 있고 북쪽은 여진족이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한시가 급한 지경에 이렇듯 시간을 끈다는 건 조정 신료들이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허인회와 아무리 속을 털어놓고 있는 관계라 해도 정도가 심한 발언이었다.

누가 듣는다면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성을 떠나기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최 교위가 이렇게 강하게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었기에 허인회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럴까 싶었는지 역정을 내기는커녕 얼른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이 사람아. 공적을 따지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공적을 인정받으려면 지방관들에게 사실 확인을 먼저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서 다소 늦어지는 것이니 너무 조바심치지 말고 진득하게 기다리게.”

“영감. 왜란 중에 제 자리를 지켰던 수령방백이 몇이나 된다고 보십니까. 다들 일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피신하기에 급급했던 자들이 어찌 소신이 왜군과 싸운 전과를 알겠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날까 염려하여 소관의 전과를 깎아내리려 할 것입니다.”

과연 해인의 공적을 곧이곧대로 보고할 지방 수령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설사 제대로 된 공적을 올려보내더라도 조정 신료들은 파당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하기에 바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부지하세월이다.

해인이 미련을 두지 않고 그냥 함경도로 가 버리면, 조정 신료들은 앓던 이가 빠졌다고 좋아할 거였다.

자신들에게 줄을 대고 있는 수령방백보다 상대적으로 대단한 전공을 세운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경흥과 회양 부사, 길주 목사의 장계는 이미 올라와 있네. 그 외의 전공도 더 확인해 보겠다는 것이네.”

“소관이 한성에 올라온 건 외가 식구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영감의 존안을 뵙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조정에서 자네의 공훈을 숙의하고 있는 때에 당사자가 한성을 떠나 버리면 조정 신료들의 입장이 난처하지 않겠는가.”

“조정 신료들의 입장보다는 북변의 상황이 더 다급하오이다. 공신록에 연연할 때가 아니기에 함경도로 가겠다는 것이옵니다.”

허인회가 먼저 해인의 공적을 상신하겠다고 나섰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변했다.

조선에서 벼슬을 유지하려는 이유인즉슨 친인들의 전정에 누가 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외가 식구들이 해동으로 오겠다고 했고, 한성판윤과 친우까지 유명을 달리한 터라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의 눈치를 볼 일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네 휘하에 의병들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여진족을 상대하겠다는 건가?”

“뜻있는 상단들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들의 재력이면 다시 의병들을 모아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직첩도 부여받지 못한 무관이 의병을 모은다면 쉽게 모이겠는가?”

“영감.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도처에서 의병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소관이 그동안 함경도에서 활약을 하였으니 수월하게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군은 당장 코앞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의병 활동을 인정하겠지만 여진은 아직 도발하지 않았네. 그걸 문제 삼으려 들면 자네만 곤란해지네.”

허인회의 말에 해인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지금은 당장 왜군이 조선 강토를 휘저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의병 활동을 눈감아 주지만 왜란이 끝나면 임의로 의병을 모집한 것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관군이 막아내지 못한 건 뒷전이고 혹시라도 의병들이 왕권을 침해할까 봐 벌써부터 견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허인회의 염려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영감. 나중에 의병장들을 토사구팽하는 겁니까?”

“의병의 세력이 강하면 무슨 명목을 붙여서라도 힘을 약화시킬 것이네. 창피한 일이지만 조정 일각에서는 그런 논의도 오가고 있다고 들었네. 주상 전하의 눈치를 보는 일부 신료들이 앞장서는 것 같으네. 그러니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겠다는 생각은 접게.”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의병들까지 의심하고 드는 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만정이 뚝 떨어졌다.

왕의 눈치를 보는 일부 신료들이 나중에 왕권을 위협할 만한 의병장들이 누구인지를 살피고 있다면 해인처럼 화려한 전공을 세운 의병장은 볼 것 없이 견제 대상일 것이다.

그런 의병장에게 어찌 높은 벼슬을 내리겠는가.

오히려 한성으로 불러올려 꼼짝달싹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음이다.

“영감. 아무래도 소관이 벼슬을 내려놓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영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북변으로 가서 백의종군을 하는 게 속 편할 것 같습니다.”

“멀쩡한 벼슬이 있는데 어찌 백의종군을 한다는 말인가?”

“여진족이 언제 도발할지 모르는데 직첩 없는 무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백의종군밖에 더 있겠습니까?”

방금 발언은 주상의 귀에 들어가라고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품계는 있으나 직첩이 없으니 일개 군졸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종군한다면 더 이상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므로.

벼슬에 미련이 없음을 알리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 * *

허인회가 간곡하게 붙잡았지만 만정이 떨어진 해인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치졸한 주상과 그저 일신의 영달과 파당의 이익만 좇는 조정 신료들이 있는 한성에 신물이 난 것이다.

백성을 하늘로 알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이들만 가득한 곳에는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을 벗어날 마음밖에 없었다.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외가댁으로 돌아온 해인을 찬영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님. 무슨 일이 있었소? 왜 이리 힘이 없어 보이오?”

“찬영아. 내일이라도 한성을 떠나자꾸나. 조선에는 더 이상 미련도 없구나.”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허 영감댁에서 몹쓸 얘기라도 들은 게요?”

“말을 하면 내 입이 더러워질까 싫다. 어서 떠날 채비나 하자.”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해인이 이렇게 막말에 가까운 언사를 쏟아 내자 찬영은 괜히 두려움이 앞섰다.

“형님. 자세히 얘기해 보오. 내게 못 할 말이 어디 있소.”

“안으로 들어와라.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다.”

방으로 들어선 해인은 주안상부터 청했다.

“찬영아. 곡주부터 한잔해야겠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 어른들이 걱정하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런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잠시 후 여종이 가져다준 술상을 마주한 둘은 말없이 술잔을 돌렸다.

해인의 침묵에 찬영도 함부로 말을 걸 수 없었던지 술만 묵묵히 따라 주었다.

“찬영아. 조선 땅이 누구의 것이더냐?”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네가 아는 바대로 대답해 봐라. 조선이 누구의 것이며 벼슬아치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있는지.”

“나 참! 조선 땅이야 당연히 백성들의 것이지요. 벼슬아치들이야 백성들을 보살펴주는 역할이고요. 대답이 되었소?”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다행이다. 네 입에서 주상의 것이니 양반의 것이니 하는 헛소리가 나왔다면 널 해동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형님. 도대체 허 영감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 게요?”

찬영이 해인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말이 엇나가면 해동 구경을 영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란이 끝나면 의병장들은 토사구팽이다.”

“토사구팽이라니요? 나라를 구한 사람들에게 상을 못 줄망정 그게 무슨 소리요?”

“백성들이 주상이나 벼슬아치들보다 의병장을 더 따른다면? 언제라도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겠느냐.”

“주상은 왕권이 약해질까 두려워하고 신료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까 불안하다는 말이군요.”

총명한 찬영은 말귀를 금방 알아들었다.

“그래. 내 전공을 알아본답시고 함경도 수령들에게 확인하는 중이라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구나.”

“관군들이 무너져서 의병이 대신 일어났는데 수령인들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답니까? 형님이 왜군과 싸우는 걸 옆에서 보기는 한 것이오?”

“다른 곳은 몰라도 함경도에서는 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왜군들과 싸웠다.”

“이런 젠장. 관군들도 제대로 건사 못한 수령들을 누가 임명했는데··· 왜란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잘못은 인정 못 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선 의병장들의 공을 깎아내릴 생각만 한다는 게 말이 되오?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흥분할 가치도 없다. 벼슬에 미련도 없다만 한성에 더 있다가는 내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아서 당장 떠나자는 게다.”

“그래요. 얼른 해동으로 떠납시다. 소제도 이놈의 나라에 정나미가 떨어진 지 오래요.”

돌아가신 생부의 일로 외조부도 불이익을 당했고 외삼촌은 아예 벼슬을 할 생각조차 못 했다.

찬영도 글공부에 그리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건 급제하여 출사한다 해도 한직으로만 맴돌다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떠난다면 어른들께서 걱정이나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할아버님이나 아버님도 이미 마음을 굳혔소. 형님과 소제가 며칠 더 앞당겨 떠난다고 놀랄 일은 없소.”

“그렇다면 다행이고.”

“형님 수하들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동소문 밖 근처의 주막에 머물고 있다.”

때가 때인지라 해인을 포함해 여섯이나 되는 장정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한성에 들어온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성 밖에 머물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조정에서 해인을 부담스러워하는 판에 무장한 병졸까지 데리고 왔다면 시위한다는 말이 나돌 것이었다.

한성에서야 눈에 띄는 존재지만 도성 밖에서는 무장한 의병이 주막에 머물겠다니까 주모가 오히려 반겼다.

시절이 어수선하니 도성만 벗어나도 무법천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의병 출신들이 머물러 준다면 포도군사가 지켜 서 있는 것보다 더 든든한 것이다.

“그들의 무예는 어떻소?”

“그걸 왜 묻는 거냐?”

“해동까지 가려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인데 겨우 다섯 명의 호위로 가당키나 하겠소?”

“왜군이 모두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무슨 걱정이냐?”

“산적들과 도적들이 들끓는다고 하지 않았소.”

“다섯 명의 호위대가 부족하다고 보느냐? 그들이 어떤 전투를 치러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대단하오?”

“네 실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면 믿겠느냐?”

해인의 말에 찬영이 피식 웃었다.

농투성이들을 모아 만든 의병들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형님. 나는 형님에게 배운 검술과 역근경을 몇 년이나 익힌 몸이오. 거기다가 태식호흡도 꾸준히 했고요. 겨우 일 년 남짓 훈련한 병사들과 비교하다니 섭섭하오.”

“길고 짧은 건 대보면 알 일이지.”

“두고 봅시다. 다섯 모두 덤벼도 내 옷깃조차 못 건드릴 것이오.”

찬영은 이렇게 큰소리칠 만한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실전을 겪어 보지 못한 찬영이 과연 호위병 하나라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명나라까지 갔다 온 후로는 한층 원숙해졌다.

명나라에 갔다 왔다고 갑자기 무예가 일취월장한 건 아니지만 넓은 세상을 경험한 후로는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던 것이다.

찬영이 비록 그들보다는 무예가 높다고 하나 다양한 경험을 쌓은 호위대 또한 절대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실전만큼 좋은 수련도 없기 때문이다.

“호위대들이 비록 나이가 어리고 훈련을 받은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지만 왜군을 상대로 피를 흘려 본 이들이다. 결코 만만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러다 큰코다친다.”

“소제가 비록 실전 경험은 없으나 수련 기간이 훨씬 길잖소.”

“기회를 줄 테니 한번 겨뤄 봐라. 그 대신 창피는 당하지 마라.”

“걱정 마시오. 내 진면목을 보여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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