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1)
108화 해후 (1)
건너편 계곡으로 바람처럼 달려간 해인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옹색하기 그지없는 움막 수백여 개가 눈앞에 펼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부상을 회복하고 있을 보현 스님과 사형들을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무예가 해인에는 못 미치나 그렇다고 결코 약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군의 칼에 당했을 리는 없고 아마 조총에 당한 것 같았다.
원주 스님이 말하기로는 보현 스님외에 두 명의 스님도 기식이 엄엄하다고 했다.
치료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상처는 태식호흡으로 다스릴 수 있음에도 아직 기식이 엄엄하다면 납 구슬이 몸에 박혀 있는 것이리라.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 다쳤다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건봉사 승려들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유탄에 맞았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왜군이 눈에 띈다면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쟁을 하러 왔으니 조선 병사들을 적대시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왜 애꿎은 백성들을 해치는지, 그런 명령을 내린 왜장은 곱게 조선 땅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법륜 사형!”
셋째 사형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워낙 목소리가 컸던지 움막 여기저기서 쑥부쟁이 같은 머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산발한 머리뿐만 아니라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몰골들이 엉망이었다.
계곡에 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모습인가 싶었다.
하기야 긴 피난살이에 목숨을 연명하기도 급급한데 언제 몸을 단장할 겨를이 있겠는가.
지금 조선에 사는 민초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모습들이었다.
이렇게 사는 건 짐승이나 다를 바 없지만 생목숨을 버릴 수는 없으니 억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그중 비교적 멀끔한 모습의 중년인이 나서서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는 게요?”
“보개산 심현사에서 온 스님들을 찾소이다.”
“보개산이 어디오?”
“철원 도호부에 있는 산이오.”
“아! 철원 쪽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저 위쪽으로 가 보시오. 거길 가 보면 만날 수 있을 게요.”
해인은 계곡 위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곳에는 보개 마을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들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해인이 달려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봤지만 해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해인의 외모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으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도 아니고 수염까지 길렀으니 어찌 알아보겠는가.
거기에 더해 복색도 양반 차림이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이보시오. 보현 스님은 어디에 계시오?”
조선에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양반이 상민에게 하대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양반 차림의 해인이 하오체로 물었으니 오는 말 또한 정중했다.
해인이 심현사의 사미승으로 있을 때에도 천지 분간 못 하는 또래들 외에는 다들 스님으로 예우해 주었던 이들이라 하오체를 했다.
“나리께서는 뉘신데 보현 스님을 찾는 것입니까.”
“한성에서 왔소. 건봉사의 원주 스님이 이곳에 보현 스님이 계시다고 하여 찾아왔소만.”
잠시 해인을 훑어보던 중년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현 스님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다치신 건 들으셨습니까?”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오.”
“젊은 스님들도 둘이나 다쳤습니다.”
“그 얘기도 들었소. 어디에 계신지 앞장서 주시오.”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사내는 해인을 계곡 옆의 평지 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껍질도 벗기지 않고 얼기설기 엮은 통나무집이 있었다.
옹색하긴 하나 그래도 움막보다는 나아 보였다.
마침 밖에서 탕약을 끓이고 있던 셋째 사형 법륜이 통나무집으로 다가오는 해인과 보개 마을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법륜 사형!”
“누구신지···. 해인 사제?”
상투를 틀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긴 했으나 해인의 목소리며 눈매 등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예. 해인이오. 사형.”
“어이구! 사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얼싸안았다.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떨어진 둘의 눈자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제.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고 찾아왔나?”
“심현사에 두 번이나 들렀으나 종무소식이기에 혹시나 싶어 이곳에 온 것이오. 원주 스님께 들어 보니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 다쳤다던데 어찌 된 영문이오?”
“퇴각하는 왜놈들을 뒤쫓다가 조총에 맞았다. 다행히 조총탄을 제거했지만 쉽게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구나.”
“스님은 지금 깨어 계시오?”
“그래. 얼른 들어가서 문안 인사부터 여쭙자.”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문짝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낮이지만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옅은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해인은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셋째 사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침에 고름을 짜내었다. 매일 피고름이 고이는구나.”
어둠이 눈에 익자 이내 보현 스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스님. 해인이 왔습니다.”
“······.”
“스님. 해인이라고요. 얼른 눈을 떠 보세요.”
그래도 스님의 반응이 없자 예전의 말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응석 어린 해인의 말에 보현 스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겹게 떠졌다.
잠시 해인을 올려다보던 보현이 손을 움직여 해인의 손을 잡고 힘없이 물었다.
“해인이냐?”
“예. 스님. 해인입니다. 으흐흑···.”
보현 스님의 손을 맞잡은 해인은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승이자 어버이 같은 이가 북망산을 앞두고 있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거기에 더해 일심과 벽개 사형까지 기식이 엄엄한 상태이니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해인아. 얼굴을···.”
얼굴을 가까이 대자 바짝 여윈 손으로 해인의 눈이며 입술을 더듬더니 엷게 웃었다.
웃음 끝에 보현 스님의 눈에 이슬이 맺히더니 눈꼬리를 거쳐 방울져 떨어졌다.
“네가 찾아올 줄 알았다. 너를 봤으니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구나.”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보현 스님의 말과 표정으로 보아 갈 날이 정해졌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스님. 으흐흑···.”
“다 큰 녀석이 어째 눈물이 이리 많을꼬. 다친 곳은 없더냐?”
“무탈하옵니다. 스님.”
“그럼 됐다.”
“스님도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내 몸은 내가 안다. 이제 장작더미 위에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
“으흐흑···.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세요. 스님은 제가 반드시 살려 낼 것입니다.”
“내게 헛된 노력을 들이지 말고 일심과 벽개나 잘 구완해라. 둘은 아직 북망산에 갈 날이 멀었구나.”
“스님과 사형들 모두 제가 구완할 것이니 황망한 말씀 거두세요.”
보현 스님은 해인의 말에도 더 이상 대꾸를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깜짝 놀라 코끝에 손을 대봤으나 약한 숨을 쉬고 있었다.
지금껏 억지로 기력을 짜내어 얘기하고 혼절한 거였다.
* * *
보현의 곁을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는 해인을 밖으로 끌고 나온 법륜이 긴 한숨을 쉬었다.
“사제. 스님은 이제껏 사경을 헤매다가 어제야 잠시 기력을 찾았어. 사제가 오늘 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 같구나. 일종의 회광반조인 셈이지.”
불교에서는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으로 회광반조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에 비유한다.
“언제부터 저리된 것이오?”
“두 달이 넘었어.”
두 달 넘게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희망이 없다는 얘기였다.
멀쩡한 사람도 두 달을 누워 있으면 기력을 못 찾는데 깊은 상처를 입고 두 달을 누워 있었으니 늙은 몸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두 사형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오?”
“며칠째 고열에 시달리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상처가 곪은 게 원인이 아닌가 싶은데···. 어제부터 차차 열이 내리고 차도가 보이니까 곧 깨어날 게다.”
열이 내렸다니까 다행스러웠다.
보현 스님도 두 사형들은 아직 북망산에 갈 날이 멀었다고 했으니 희망이 있었다.
법랍이 오래된 노승들이 종종 앞날을 예측하기에 그리 믿는 거였다.
“사형. 보현 스님께서 보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건봉사로 온 것이오?”
“그래. 그때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몇 년 전부터 간자들을 풀어 조선 땅 구석구석을 훤히 꿰고 있던 왜군들이었으니, 임시방편으로 보개산으로 피신했다면 횡액을 면치 못했을 터.
해인이 입수한 지도에도 철저히 조사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보개 마을의 가옥 숫자는 기본이었고 철원 도호부 일대의 산천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있었으니 근처 어디로 피신한다고 해도 금방 찾아냈을 거였다.
“왜군들이 남쪽으로 퇴각했는데 왜 아직도 이곳에 이러고 있었소.”
“왜군들이 언제 다시 올라올지 모르는데 어찌 움직이겠느냐.”
“쉽게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 의병들이 사방에서 일어났소.”
“왜군들이 힘이 많이 빠진 모양이구나. 무관인 사제가 이렇게 개별적으로 나다닐 정도라면 말이다.”
“막내 사형. 소제는 벼슬을 내려놓았소.”
“그게 무슨 소리냐?”
그로부터 한 시진가량 한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법륜은 해인의 말에 때로는 주먹을 움켜쥐고 때로는 울분을 토했다.
해인이 말을 마치자 법륜은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다. 썩은 물에 섞일 것 없이 심현사에서 불경이나 공부하자.”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소.”
“어째서?”
“챙겨야 할 식솔이 생겼소. 여진 여인을 취하고 그녀의 배 속에 아이도 있소.”
“아! 그동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럼 네 처는 어디 있느냐?”
“해동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소.”
“함경도에 그런 지명이 있더냐?”
“아니오. 여진족 땅 위에 있는 곳이오?”
해인의 말에 법륜의 눈이 커졌다.
“도대체 사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봐라.”
“소제가 함경도로 암행어사를 따라간 건 알고 계시지요?”
“알다마다. 그런데?”
“우연히 상단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해인의 설명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함경도에 머물게 된 이유와 가란구륜 족장과의 인연 등을 듣던 법륜은 그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해인의 말이 끝나자 법륜의 질문이 쏟아졌다.
“해동이라는 마을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삼천 명 가까이나 된다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오.”
“모두 사제가 거느리는 사람들이냐?”
“대부분 병사들의 식솔들이니 그렇다고 볼 수 있소.”
“그럼 거기에 절을 지어도 되겠구나.”
“그렇지요.”
“스님의 차도가 보이면 그곳으로 모시고 가자.”
해인이 봐도 보현 스님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무슨 차도가 보이겠나.
보현 스님이 열반을 한 후 움직이겠다는 말일 것이다.
“보개 마을 사람들도 데려갈 수 있겠느냐?”
“예. 남도 아니니 더 좋네요.”
보개 마을, 아니 김 진사골 사람들이라면 심현사 승려들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더욱이나 왜란으로 인해 함께 피난살이를 한 사이이고.
심현사 스님들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판이다.
“보개 마을보다는 훨씬 먹고살 만하냐?”
“예. 사형. 머슴질을 할 것도 없고 소작도 없는 곳이오. 노력한 만큼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소.”
“허허! 그렇다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구나.”
“맞소. 해동이라 부르기 전에는 우리도 무릉도원이라 불렀소.”
까맣게 탄 법륜 사형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암울한 때 새로운 희망이 생겼으니 오죽할까.
“그곳에 가 보고 싶구나. 설마 이곳보다야 낫겠지.”
셋째 사형은 피난살이 일 년 동안 마음고생이 심한듯했다.
아마 보개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오면서 이런저런 사연이 있었을 터.
“사형.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오. 보개 마을 사람들을 잘 설득해 주시오.”
“그들이 가지 않더라도 스님과 사형들만이라도 모시고 따라갈 것이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섭섭한 게 많았소?”
“섭섭할 것도 없다. 중생들의 욕심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찌 승려라 하겠느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언제 그랬냐고 하는 게 사람이다.
아마 그런 모습을 보인 사람들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따랐던 무리가 왜 반발하겠는가.
당장 먹을 게 없으니 원망이 앞설 수밖에.
“사형. 가다가 잘못되더라도 한시바삐 이곳을 떠납시다. 그래야 사람들의 불만이 해소되오.”
“보현 스님은 어쩌고?”
“중간에 잘못되더라도 모시고 가야지요. 그래야 반발이 없어집니다.”
오늘이 끝일지 내일까지 버틸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일단 모시고 떠날 생각이었다.
보개 마을 사람들에게 보현 스님은 하늘이나 다름없다.
만약 중도에 보현 스님이 생을 달리한다면 보개 마을 사람들은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해동에 집착할 것이다.
그것은 곧 해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고 한층 더 강한 결집력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보개 마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한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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