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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109화 (109/130)

해후 (2)

109화 해후 (2)

건봉사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찬영과 다섯 호위를 데리고 보현 스님이 머물고 있는 계곡으로 올라왔다.

보개 마을 사람들은 새로 올라온 여섯 명의 장정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찬영이나 호위 다섯의 기도는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렵다.

특히 다섯 호위는 왜군을 여럿 죽인 터라 더더욱 살벌해 보였다.

기를 갈무리하는 해인과 달리 있는 기운을 그대로 밖으로 내놓기 때문이다.

“사제. 저들이 수하들이냐?”

“예. 사형. 여기 이 사람만 빼고 제 수하요. 찬영아. 인사드려라. 막내 사형이다.”

“처음 뵙겠소. 김찬영이오.”

찬영이 하대가 아닌 평대로 인사했다.

양반이 중에게 하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해인의 사형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으리라.

허나 앞으로 함께해야 할 사이여서 그런 걸 따질 만큼 꽉 막힌 찬영도 아니었다.

“어이쿠. 나리. 말을 편히 하십시오.”

“아니오. 승우 형의 사형이니 제게도 윗분이나 다름없소. 승우 형처럼 앞으로 편히 대해 주시오.”

“법도가 있는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치도곤을 맞을 일이지요.”

“이젠 그런 법도가 없는 곳으로 가잖소. 나이로 위아래를 나눈다고 들었으니 저도 그에 따를 것이오.”

찬영도 반상의 구분이 없는 곳이란 소리에 반색을 했었다.

조부를 끝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이가 없어 평소에도 별로 따지지 않았던 찬영이 아니던가.

오죽하면 집안의 여종이 오라비처럼 자신을 따랐겠나.

아무리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승려인 법륜과 양반인 찬영이 주고받는 얘기는 곁에 있던 보개 마을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양반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는 작태를 눈앞에서 보았으니 충격적일 수밖에.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질 것이다.

“사형. 북쪽으로 이주를 떠날 사람들을 알아보오. 이곳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소.”

“사형들이 정신 차릴 때까지는 마무리될 게다. 그런데 김 진사댁은 어찌하면 좋겠느냐?”

“일단은 권해 봐야지요. 그 양반 혼자 외톨이로 둘 수는 없잖소.”

김 진사는 보개 마을의 구심점이다.

물론 지금이야 보현 스님과 사형들이 구심점이 되었지만.

대지주인 김 진사가 고향을 버리고 북쪽으로 따라올 리는 없지만, 마을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겠다고 하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다만 그가 따라왔을 때가 문제이다.

반상의 구분이 없는 곳이기에 스스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노비 몇 명만으로 과연 만족할 수 있을지.

“김 진사의 큰따님은 출가를 하였소?”

“왜란 전에 한성의 참판 댁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건 왜?”

김 진사의 큰딸은 바로 금동 아씨다.

한때 해인이 짝사랑하던 여인이었던 것이다.

“아니오. 마을 소식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오.”

“참으로 고운 아씨였는데···. 무탈한지 모르겠다.”

금동이 심현사를 안방 드나들 듯했으니 약간의 정도 들었을 터.

아니면 해인처럼 사형들도 금동을 연모했거나.

바깥세상을 모르고 절에서만 살았으니 금동의 방문은 사형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아리땁고 조신하기까지 했으니 승려라는 신분을 떠나 한 번쯤은 마음에 두었을 거였다.

그로 인한 번뇌로 공부가 더뎠을 건 명약관화하다.

“혹시 사형도···.”

“어허. 신소리 하지 마라.”

“그것보다는 왜군을 상대로 손에 피도 묻혔으니 이젠 어쩌오? 그 몸으로 어찌 부처님 전에 서겠소.”

“······.”

“사형. 보현 스님이 열반하고 나면 해동에서 여진족이나 쫓으며 삽시다.”

“······?”

“파계를 하란 말씀이오.”

“사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화두를 던져 놓았으니 이제부터 사형의 고민이 시작될 거였다.

보현 스님까지 열반하고 나면 불가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해인이 심현사에 있을 때도 보현 스님의 눈을 피해 약간의 일탈을 했던 사형들이다.

거기에 왜군을 살상까지 한 마당이니 절밥을 계속 먹기도 애매하다.

중생을 제도하는 건 속세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설득한다면 흔들릴 게 틀림없다.

사형들만 합세한다면 해동을 이끄는 건 훨씬 수월해지기에 슬쩍 불을 지핀 것이다.

* * *

보개 마을 사람들 중 김 진사와 친인척 관계거나 세습 종을 제외한 일백칠십이 명이 해동으로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가장의 결정에 식구들이야 그냥 따르는 것이지만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인 숫자가 고향을 등질 줄은 몰랐다.

그만큼 팍팍한 삶이란 뜻이지만 이번 왜란이 민초들에게 끼친 영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왕이 야반도주하듯 한성을 떠나고 서슬 퍼렇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도 왜군 앞에서는 한낱 고양이 앞의 쥐에 불과한 존재임이 드러났으니 누구를 믿겠는가.

거기에 더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던 관아의 장교나 나졸들도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개 마을 사람들을 지켜 준 건 심현사의 승려들이었다.

그들이 안전한 곳으로 떠난다는데 어찌 안 따르겠는가.

“사형. 이들이 북방으로 가는 동안 먹을 양식이 없는데 어찌하오?”

“원주 스님께 부탁을 드려봐야겠다. 피난민들이 건봉사 경내를 벗어난다고 하면 반길지도 모른다.”

경내와 근처 계곡에 머무는 중생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건봉사로서도 그동안 골머리를 앓았을 거였다.

그런 사람들이 떠난다면 앓던 이가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귀향길에 쓸 양식 정도는 보태 줄 것이다.

“그런데 보현 스님이 혼수상태인데 이대로 떠났다가는 중간에 낭패를 볼 것인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차라리 혼수상태인 게 더 낫소. 스님이 정신이 들면 절대로 따라나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여기 있으나 움직이나 보현 스님은 이미 숨이 언제 멎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임종을 지켜보겠다고 마냥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두운 방에서 죽을 날만 꼽고 있느니 해동으로 이동하면서 조선 산천이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물론 혼수상태의 환자가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짓인지는 잘 안다.

하지만 겨우 탕약에만 의존하며 요행수를 바라고 있느니 맑은 바람이라도 쐬게 해 주는 게 스님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해인의 감각에도 스님은 더 이상 회생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자꾸나. 사형들이 깨어나면 난리를 칠 것이니 깨어나기 전에 움직이자.”

이렇게 무리하다가 나중에 깨어날 사형들에게 지청구나 듣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쉽사리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강행하는 거였다.

사형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려면 하세월이다.

“사형. 얼른 원주 스님께 가서 건봉사를 떠난다고 말하시오. 소제는 수하들과 들것이라도 만들어야겠소.”

“그래. 얼른 다녀오마.”

* * *

건봉사를 떠나려고 하는 날 일심과 벽개 사형이 정신을 차렸으나 걸을 정도는 아니어서 들것에 실려 갈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렸다고는 하나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해인과 그저 눈만 맞추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꼬치꼬치 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해인과 찬영이 앞장서고 호위대원 다섯이 후미에 서서 일행들을 이끌었다.

일행은 건봉사를 벗어나 반나절을 움직이다가 숨을 골랐다.

“저이가 예전에 심현사의 동자승이었다더군. 정육품 교위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자네는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가?”

“우리 뒤를 따르는 의병들에게 물었더니 그리 말하더군.”

“스님이 어찌 벼슬을 할 수 있다던가? 의병으로 공을 세워 그리된 건가?”

“원래부터 양반집 자손인데 사정이 있어 심현사에 있었다고 하더라고.”

“아이고. 그럼 우리가 동자승 때 막 대한 걸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을까?”

보개 마을 청년 서넛이 잠시 쉬는 틈을 타 해인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양반인 줄 몰랐는데 무슨 상관이야. 만약 악감정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왜놈에게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건데 어찌 데려가겠어?”

“그렇기는 하네.”

“그런데 해동이라는 곳이 어디래?”

“함경도 너머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거긴 여진족들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얘기가 잘된 모양이지 뭐.”

“그 흉악한 놈들이 조선 사람들을 곱게 받아들인다고?”

“저이가 벼슬아치니까 잘 봐준 거겠지.”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대화들이 곳곳에서 오가고 있었다.

보개 마을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해인은 보현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중도에 잘못되면 가는 길이 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승우 형님. 혹시 우리가 지나치는 관아의 수령들이 시비나 걸지 않을까 모르겠소.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했는데 피난민이 올라오는 걸 달갑게 생각하겠소?”

“남쪽의 상황이 안 좋다고 겁을 먹으면 먹었지 관여하지 않을 거다. 저길 봐라. 봉화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잖으냐.”

얼마 전부터 봉화가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봉화가 기능을 찾고부터 각 고을의 수령들이 더 전전긍긍했다.

봉화가 오르지 않을 때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다면 지금은 전날에 벌어진 남쪽의 상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피난민들이 자기 고을에 정착만 안 한다면 모른 척할 거다. 이 사람들이 곡식을 달라고 떼라도 쓰면 어쩌겠느냐.”

“피난민 주제에 감히 관아에 가서 행악을 한다고요? 치도곤을 각오하고요?”

“관아에 나졸들조차 없는데 무슨 수로.”

왜군들에 이리저리 쫓기다 보니 조선의 지방관아는 유명무실해졌다.

수령이 죽은 곳도 많고 관아가 불타 당장 집무를 볼 곳도 없었다.

그 와중에 왜군에게 척살당한 나졸이며 장교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나마 함경도는 일찍 의병 활동을 했기에 멀쩡한 관아가 몇 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해인의 설명을 들은 찬영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조선이 정상을 찾으려면 몇 년이 지나도 어렵겠네요.”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주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해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대대손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다.”

“올라가면서 소문을 내야겠네요. 어차피 사람들을 더 모아야 한다면 지금이 가장 적기가 아니오.”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모으기도 겁난다.”

“지금도 없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초근목피하며 올라가야지요. 올라가는 김에 다 끌고 올라갑시다. 북쪽에 살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하면 다 따를 것 같소. 관아에서도 백성들을 챙기지 않는데 누가 어디로 가든 간섭도 없을 게 아니오.”

이제는 찬영이 더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과천에 갇혀 있으면서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리는 모양이다.

“그래. 도문을 넘으면 장인어른이 도와줄 것이다.”

“잘되었소. 이제는 눈치 볼 것도 없잖소. 어차피 조선을 등지는 판에.”

찬영은 조선 관리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사람들을 더 모으자고 했다.

해인도 그럴 생각이었다.

관아에서 막으려 들면 무력을 보이면 꼬리를 말 것이므로.

해인이 누구던가.

가토의 오른팔인 왜장을 사로잡은, 함경도에서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 아닌가.

비록 지금은 정육품 무관이나 왜란이 끝나고 나면 자신보다 높은 품계에 오를 건 당연지사.

그런 해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령은 없다.

“그래. 이번이 사람을 모을 마지막 기회이긴 하다. 보개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형님. 걸리는 게 하나 있소. 여진족 땅에 들어간다는데 과연 쉬이 따라올까요?”

여진족은 왜군들과는 달리 노략질은 할지언정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다.

다음 해에 또 노략질을 하려면 사람은 살려 둬야 또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함경도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왜군이 다시 밀고 올라온다고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봉화가 있는데 그게 먹히겠소?”

“백성들이 봉화를 어찌 알겠느냐.”

“헛소문을 낸다고 수령들이 장계라도 올리면 어쩌고요?”

“어차피 되돌아올 곳도 아닌데 한성의 눈치를 살필 이유가 있느냐?”

“한성에 있는 조부님과 아버님이 걱정되어 그러는 게요.”

한성에 있는 조부와 외삼촌이 걱정되기는 하나 왜군이 완전히 조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 당장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갔다 온 주제에 의병장의 식솔들을 핍박했다가는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까.

“별걱정을 다한다. 지금 조선이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냐? 진상을 파악하는 데도 몇 달이 걸릴 것이다.”

사람을 모아 북쪽으로 피난을 떠난다고 문제를 삼을 거면 의병들을 모으는 것도 문제가 될 일이었다.

지금은 왜군을 격퇴하는 게 우선이기에 당분간은 조정에서도 관망할 수밖에 없다.

“형님. 우리는 뒷전으로 빠지고 보개 마을 사람들만 앞세웁시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용기를 내어 따라나서겠느냐. 의병장 출신이 앞장서야 그나마 믿고 따르지.”

“알았소. 한성의 어른들이 무탈하기만 바라는 수밖에.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봅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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