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3)
110화 해후 (3)
도문강 북쪽에 안전한 곳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뒤를 따랐다.
실제로 금강산 자락에 있던 백성들이 남부여대하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걸 목격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기겁을 한 수령방백들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는 등 법석을 떨었다.
조정에서는 함경도 사람들이 북쪽으로 피난간다는 장계를 받고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왜군이 다시 쳐들어올지 몰라 피난을 떠난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으니 말이다.
도문강 너머에 안전한 곳이 있으려니 하고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먹고 살 만한 곳이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것이다.
설사 해인이 백성들을 이끄는 걸 알고 있다 해도 조정에서는 외조부 집안을 건드릴 수도 없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한성을 수복하고 이반된 민심을 추스르고 있는 때여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집안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아직 왜군들이 남해에 똬리를 틀고 있는데, 불명확한 이유로 현직 무관이자 의병장의 가족들을 핍박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주상과 조정 신료들을 따르겠는가.
해인은 잃을 게 거의 없지만 주상이나 조정 신료들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의병들의 신망마저 잃게 된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들은 주상을 위해 나선 게 아니라 불쌍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나선 것이니까.
주상이 그 정도로 아둔한 사람이 아니기에 함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거였다.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그걸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도 덩달아 불안에 떨었다.
왜란 초기에는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이제는 왜군들의 행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당장 먹을 게 궁하기도 하거니와 왜군에게 또 시달릴 생각을 하면 잠도 오지 않았다.
고향을 영 등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안전한 곳에 피난 가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짐을 싸고 집을 나섰다.
저 사람들이 왜 고달픈 피난길에 오르겠는가.
남쪽으로 내려간 왜군들이 또 밀고 올라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 *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아 보이던 보현 스님은 녹둔도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 내었다.
그러나 녹둔도에 도착한 날 결국 숨이 멎었다.
마지막 순간 눈을 뜨고 잠시 해인을 바라본 후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던 것이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나 막상 닥치고 나자 일순 온몸이 경직되었다.
보현 스님의 죽음은 해인에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해인과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주던 어버이 같은 존재였고,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게 채찍질해 주던 스승이 아니던가.
왜란이 터지고 가장 먼저 떠올린 이가 보현 스님일 정도로 해인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런 보현 스님이 열반에 든 것이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해인 곁으로 사형들이 몰려들었다.
“스승님! 으흐흑···.”
며칠 전부터 스스로 걷을 만큼 기력을 찾은 일심 사형과 벽개 사형이 달려와 스님을 붙잡고 울었다.
피난민을 점고하던 법륜 사형도 뒤늦게 연락을 듣고 달려와 대성통곡을 했다.
불제자라면 죽음에 초월해야겠지만 사형들과 해인은 스스로 출가한 게 아닌, 보현 스님이 불쌍히 여겨 거둔 경우라 보통의 중들과는 달랐다.
보개 마을 사람들도 보현 스님의 열반에 충격을 받고 삼삼오오 모여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해인이 서둘러 다비식을 준비했다.
여기서 더 머뭇거렸다가는 함경도 각 관아의 수령들이 보낸 사람들에게 뒤를 밟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를 거쳐 오면서 모인 피난민들이 물경 사천여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녹둔도에 바글거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령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서둘러 다비식을 치르고 이곳을 벗어나려는 거였다.
녹둔도만 벗어나면 여진족 영역이라 감히 뒤를 쫓을 엄두를 못 낼 것이기 때문이다.
해인의 바쁜 마음을 알고 있는 사형들도 군소리 없이 따랐다.
다비식을 준비할 동안 호위대원들을 가란구륜 부족에 보내어 식량을 요청하는 한편, 해동으로도 파발을 보냈다.
비록 여름이긴 하나 미리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숙한 가운데 다비식을 마치고 스님의 유골을 수습한 해인은 지체 없이 녹둔도를 떠났다.
* * *
일심 사형과 벽개 사형은 보현 스님이 열반하고부터는 매일 아침마다 드리는 예불도 거르고 있어서 약간은 걱정되었다.
거기에 더해 병석에 누워 있을 동안 자란 머리도 밀지 않고 있었기에.
정말 파계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이동 중에 잠시 쉬는 틈을 타 해인이 물었다.
“큰 사형. 어째 아침 예불을 드리지 않습니까?”
“교리를 어긴 몸이 어찌 부처님 전에 나서겠느냐. 당분간 이대로 지내련다.”
“다른 피난민들은 몰라도 보개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들도 우리가 피 칠갑을 하고 돌아온 모습을 보았으니 이해하겠지. 중이 손에 피를 묻혔는데 더 이상 중노릇을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느냐.”
해인에게는 반가운 말이나 그렇다고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집중도 못 하고 실수가 따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열흘은 더 이동해야 해동에 닿는데 건주여진 전사들이라도 나타나면 당장 막을 사람은 해인과 사형들밖에는 없다.
“큰 사형. 불제자의 길을 포기하시려는 겁니까?”
“왜군들과 칼을 맞대는 순간 이미 불제자이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스승님마저 열반한 마당에 더 이상 미련이 없구나.”
지금껏 불제자의 길만 걷던 큰 사형으로서는 큰 결심을 한 것이리라.
시종 담백한 말투이나 목소리는 무척 공허해 보였다.
목표를 잃은 사람 같다고나 할까.
“벽개 사형도 큰 사형과 같은 마음입니까?”
“그럴 게다.”
“해동에서 절을 창건할 생각이 없다면 어찌 소제를 따라나선 겁니까?”
“눈을 떠 보니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어쩌겠느냐. 그냥 따르는 수밖에.”
정신이 들고 보니 들것에 실려 있었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으니 그냥 따른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정신적인 지주인 보현 스님마저 열반하였으니 무슨 의욕이 있을까.
“그럼 소제가 하자는 대로 할 것입니까?”
“선택할 곳이 없지 않으냐. 설마 사제가 사형들 밥을 굶기지는 않겠지.”
심현사로 돌아가 본들 보현 스님이 없는 절간을 찾아올 신도들도 없을뿐더러, 이미 손에 피를 묻힌 터라 불제자의 길을 걷는 것도 우스울 터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 사형. 파계를 결심하셨다면 소제와 함께 해동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곳에서 사형이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야 있겠느냐. 당분간은 이대로 있고 싶구나.”
완곡한 거절이지만 해인에게는 긍정으로 들렸다.
사형의 성품으로 보아 해인을 그냥 따라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해인만 아니라면 진즉에 발길 닿는 대로 세상을 주유할 사람이다.
“사형. 저들은 왜란을 피하려고 모여든 중생들이긴 하지만 실상은 조선의 벼슬아치와 양반들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물설고 낯선 곳으로 가려고 하겠습니까.”
“······.”
“소제와 사형들이 돕지 않는다면 또 부초처럼 떠돌게 될 겁니다. 기왕 불제자의 길을 포기하셨다면 이들을 돕는 것도 현생의 업을 지우는 게 아니겠는지요.”
“······.”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큰 사형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이제껏 중생을 제도하고자 불가에 몸을 담고 있었지 않았던가.
남부여대하고 뒤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레한 입성과 마른버짐까지 핀 깡마른 얼굴을 대한다면 측은지심이 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
승려의 길은 포기한다지만 사람으로서의 도리마저 포기한 것 아니었으니.
내적 갈등 중이란 걸 눈치챈 해인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열반하신 스승님도 큰 사형이 이렇게 번뇌하는 줄 알면 섭섭해하실 겁니다. 건봉사를 떠나기 전 잠시 정신이 돌아오셨을 때 두 사형들은 아직 갈 날이 멀었으니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제를 따라가지 않느냐.”
“사형. 갈 곳이 없어 따라오는 것과 마음으로 우러나와 따라오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지는 않다. 억지로 막내 사제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해동의 병사들이 마중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소제를 도와 저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휴! 당분간은 그리하마. 그러나 언제까지 해동에 있을 것인지는 솔직히 장담 못 하겠다.”
몸이 바쁘면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지금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사형들에게는 잡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해인을 돕다 보면 사형들도 자연스럽게 해동에 발을 담그는 될 것이리라.
“예. 사형. 당분간만 도와주십시오. 피난민들이 해동에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금방 적응해 갈 것입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일단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농토가 그리 많으냐?”
이렇게 묻는 걸 보니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다.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게 있는 것보다는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해동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선보다 더 큰 땅이 북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농토도 널려 있지만 명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씨앗이 있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도 먹는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물이기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이냐?”
“마령서와 옥미라는 곡물입니다. 생장 기간도 짧고 열매도 많이 열리는 곡물인데 잘 말려 두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춘궁기를 넘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식으로도 손색이 없지요.”
조선은 구황작물이 거의 없어 도토리로 묵을 해 먹으며 춘궁기를 견뎌낸다.
도토리나무가 지천이라고 하지만 산에 올라야만 채취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산에는 범이나 늑대가 들끓어 부녀자들이 쉬이 오를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목숨을 걸고 도토리를 채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곡식으로 춘궁기를 넘길 수 있다면 조선에 있는 백성들도 배를 곯지 않겠구나.”
해인이 심현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보현 스님과 사형들도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보개 마을 김 진사가 득남을 한 것을 계기로 심현사의 살림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동자승 때부터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그로서는 마령서와 옥미에 관심이 갈 수밖에.
“명의 눈치나 보는 주상이나 신료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여온 곡물이 아니면 보급을 장려하겠습니까?”
“명나라 것이더냐?”
“명도 타국에서 들여온 것이긴 하지만 명의 상인들이 함부로 내돌리려 하지 않더군요.”
“명에는 언제 다녀왔느냐?”
“얼마 전에 다녀왔습니다.”
일심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세상을 다 내려놓은 것 같은 무심한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진 것이다.
“이 와중에 육로로 갔다 왔느냐?”
“아닙니다. 처남의 배로 다녀왔습니다.”
“명나라에 다닐 정도로 큰 배가 있다면 가란구륜 부족이 무척 강성한 모양이구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더이다. 그러니 타국과 교역을 할 생각을 하겠지요.”
“혹시 그들도 우리 조선을 넘보느냐?”
“조선과 척질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소제를 사위로 받아들인 게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여진족이라고 함부로 볼 게 아니구나. 어찌 보면 조선보다 낫구나.”
절에만 박혀 있어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를 것 같은 사형도 조선이 어찌 돌아가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취적인 부족입니다. 조선의 무관 출신인 저를 사위로 삼을 정도라면 유별나다고 봐야겠지요.”
“사제도 참 대단하구나. 그 짧은 시간에 온갖 것을 다 겪었으니···.”
사형들은 해인이 살아남기 위해 몸을 굴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지금껏 소제 혼자 이끌어 왔지만 이제 새로운 이주자들까지 해동에 정착하면 칠천 명이 넘어갑니다. 그래서 사형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후유! 막내 사제의 속도 모르고 열 살이나 더 먹은 내가 고작 중노릇 그만뒀다고 이런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막내야. 이 사형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아닙니다. 큰 사형. 불제자의 길을 포기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큰 사형이 먼 산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당장 왜국으로 건너가 왜놈들을 요절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때다 싶어 좀 더 단단히 조였다.
실제로도 큰 사형과 둘째 사형의 초점 없이 공허한 눈빛을 볼라치면 속에서 천불이 났던 것이다.
해인과는 열 살, 일곱 살 차이인 첫째와 둘째 사형은 보현 스님과 같은 존재였다.
보현 스님과 함께 해인을 길렀으니 말이다.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그게 네 혼자 치를 일이더냐.”
“왜놈들 때문에 스승님이 열반하시고 사형들까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소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반드시 그 죗값을 물을 것입니다.”
“막내야. 어찌 그리 가벼이 행동하려 하느냐. 네 손에 딸린 사람이 수천 명이다. 그들을 모두 죽일 작정이냐?”
“소제는 무관 출신입니다. 원수를 갚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말리지 마십시오.”
“해인아. 이놈아. 내 눈에서 또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원수를 갚는데 어찌 큰 사형이 피눈물을 흘립니까?”
“네가 잘못되면 나중에 저승에 가서 스승님을 어찌 뵙겠느냐? 너를 바로 인도하지 않았다고 나를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여라.”
“언젠가는 사형들도 떠날 것이니 그때는 소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안 간다. 네가 등을 떠밀어도 해동에서 떠나지 않을 거니까 그만하여라.”
“정말 해동에 계속 계실 것이오. 사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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