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13화
113화 조선 바다의 코레호 (1)
코레호의 적정 승선 인원은 100명 정도이긴하나 최대 200명도 탑승이 가능하다.
적정 승선 인원이란 장거리 항해를 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인원을 말한다.
범선을 교대로 움직일 선원이 50명에 무장한 병사 50명을 태우면 적정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최대 200명을 태울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인원을 욱여넣었을 때이다.
물론 항해거리가 짧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만큼 코레호가 크다는 말이었다.
이번 항해에는 승선 인원을 50명으로 최소화했다.
외가댁 식구들이 얼마나 해동으로 이주할지 몰라 일단 여유 공간을 충분히 확보한 거였다.
남해를 통과하기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선원들을 일당백의 호위대원으로 채웠고 화물을 싣지 않았기에 배가 가벼워서 속도가 빠르기에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동을 출발한 코레호는 나흘 만에 동해를 지나 남해에 접어들었다.
대마도 옆을 지나칠 때 조선에서 철군하는 한 떼의 왜군 선단과 조우했으나 별일 없이 지나쳤다.
왜선들은 양이의 범선으로 알았는지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아직 코레호는 화포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 조총이 유일한 방어 수단이라 다소 긴장했으나 별일이 없었다.
만약 공격해 온다고 해도 왜선보다 훨씬 빠르기에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남해에서 조선 수군과 조우할 경우였다.
조선 수군은 왜선이든 범선이든 무조건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해안으로는 접근하지 않고 항해했다.
대양을 오가는 양이의 범선들도 동서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이유는 방향을 쉽게 잡기 위함이었다.
망망대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육분의나 별자리를 보고 항로를 잡기는 하나 가급적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게 기본이라고 했다.
해안선은 따라가다 보면 좁은 해역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해적선이 숨어 있다가 공격을 하곤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양이의 범선들은 화포 등의 무력을 갖추고 다녔던 것이다.
양이 선원들 또한 병사들에 버금갈 수준이기에 해적들을 만나도 그리 겁먹지 않는다는 거였다.
조선 해역이야 해적이 없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눈에 띄면 낭패였다.
코레호는 무사히 서해로 올라와 강화도 근처에 닻을 내렸다.
한강의 하류인 제물포에는 양안에 민가가 많이 있어서 들킬 염려가 있어서 강화도 근처 석모도에 정박했다.
해인은 찬영과 호위대원 넷과 함께 김포까지 거슬러 올라와 강어귀에 단정을 숨겼다.
“형님. 이걸 타고 한강으로 거슬러 가도 되잖소.”
“돛이 없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무리지만 우리 단정이 조선 배들과 외양부터 달라 수상하게 볼 수도 있다.”
한강에는 양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과 어선들은 강이 좁다 하고 오르내린다.
조운선으로 사용되는 대맹선의 경우 병사를 80명이나 싣고 양곡 700석 이상을 실어 나를 정도로 크다.
한강을 오가는 대부분의 배들은 황포 돛을 사용하기에 노를 젓는 포도아의 단정은 눈에 띌 수밖에 없음이다.
“김포에서 한성까지 걸어가려면 꼬박 하루거리요.”
“무예를 익힌 사람이 그 정도로 무슨 엄살이냐.”
“해동에서 말을 타 버릇했더니 이젠 걷는다는 게 영 어색하오.”
“이젠 해동 사람이 다 되었구나.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걸 더 좋아하는 걸 보니.”
넓디넓은 해동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말이 필수였다.
특히 병사들의 경우 마을 밖을 나설 때는 말을 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찬영도 이젠 말에 익숙하여 걷는 게 귀찮은 모양이었다.
“조선처럼 산이 많다면 모를까 말만 있으면 발길 닿는 곳이 모두 길인데 당연히 말이 편할 수밖에요. 소제는 이제 조선에서는 못 살 것 같소.”
“하하하···.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 * *
숭례문을 통과할 때 나졸들과 장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 섰기에 잔뜩 긴장했었다.
성문을 들고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던 것이다.
호패를 살피고 어딜 가는지 꼬치꼬치 묻고 짐까지 꼼꼼히 수색했다.
다행히 품속에 단도만 있었고 환도나 조총은 지참하지 않았기에 꼬투리 잡힐 일은 없었다.
거기에 해인은 정육품 교위였고 찬영이 양반이었으니 까탈을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주상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을 두고 문제를 삼을 수도 있기에 다소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외가댁도 아직은 무탈하다는 뜻이다.
유난히 기찰이 심한 이유는 왜군의 간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지만,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외가댁에 당도했을 시간은 땅거미가 짙어질 때였다.
몇 달 만에 만난 외조부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한 듯했다.
모든 기반이 있는 조선을 떠나 해동으로 간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가솔들을 이끌고 조선을 떠난다는 건 역모나 다름없는 일이기에 일가친척들에게 속 시원히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상들의 산소를 누가 돌볼 것인지도 챙겨야 하는 등 정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을 터.
죄스러운 마음에 먼저 사죄부터 올렸다.
“할아버님. 송구합니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동안 얼추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해동으로 떠날 가솔들은 몇인지요?”
“본가만 떠나기로 했다. 여기저기 소문낼 일도 아닌 것 같고… 야반도주하듯 떠날 수밖에 없겠구나.”
“······.”
“집까지 처분하면 더 이상하게 볼 것이기에 한성의 집은 놔두기로 했다. 몸이 안 좋아 강원도로 정양을 간다고 소문을 냈다만 과연 주상이 믿을지 모르겠다.”
“집은 누가 건사하기로 했습니까?”
“대대로 우리 집에서 종살이를 한 자다. 면천을 해줬으니 집을 잘 건사할 게다.”
“소손이나 휘하의 사람들이 한성에 오면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외손자가 내 집에 묵는데 누가 시비를 하겠느냐만. 이목을 피해 움직여야 할 것이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궐에서도 예의 주시하지 않겠느냐.”
한성에 머물 집이 있으면 해인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조선 조정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도 한성에 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예. 할아버님. 소손이 요령껏 처신하겠습니다.”
“배는 어디에 뒀더냐?”
“강화도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포로 올라왔더냐?”
강화도에서 김포로 오는 게 거리는 멀어도 훨씬 안전했다.
외조부와 외숙모는 가마를 타야 하기에 아무래도 남의 눈에 띄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김포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 아무래도 조운선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터라 조금 돌기는 해도 오히려 김포가 더 안전합니다.”
“잘했다. 굳이 남의 이목을 받을 이유가 없지.”
“할아버님. 언제 출발할 수 있는지요.”
“몇 가지 정리할 게 남았구나. 사흘 후에 출발하도록 하자.”
“예. 그리 알고 떠날 채비를 하겠습니다.”
* * *
한성에 머무는 사흘 동안 해인은 은밀히 허인회의 집을 방문했다.
해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허인회는 무척 반겼다.
허인회는 해인이 떠나 있는 동안 아직 직책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공과를 따져도 육조의 판서 자리를 꿰찰 것으로 알았는데 파당에 들지 않았으니 누구 하나 그를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주상 또한 귀에 거슬리는 충언을 일삼는 그를 외면하고 있었고.
“최 교위. 한양에는 어인 일인가?”
“할아버님의 병환이 깊다고 하여 뵈러 왔습니다.”
“어허! 안 그래도 자네 외조부께서 병중이라는 소문이 성내에 돌고 있었네.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셨으니···. 쉽게 일어나시겠는가?”
외가에서 일부러 그리 소문을 냈었다.
외조부의 학식과 인품을 흠모하는 선비들이 많기에 금방 입소문을 탔던 것이다.
“조금 차도가 있으십니다. 그래서 강원도의 호젓한 사찰에 모셔갈까 합니다. 외조부께서도 한성을 떠나셨으면 하시고요.”
“몸이 불편한데 그 먼 곳에 모셔 간다고?”
“한성에 계시는 걸 썩 내켜 하지 않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오죽하면 한성을 떠나려고 하실까. 이런 시국에도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고개를 돌리는 것도 당연하지. 혹여 내가 도울 일은 없는가?”
허인회가 돕겠다고는 하나 외조부가 오히려 허인회를 도와줘야 할 형편이었다.
외가댁의 가세는 누대에 걸쳐 이룩되었기에 사대부 중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한성과 지근거리인 과천에 천 석지기의 땅이 있는 양반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영감께서 어렵게 지내시고 계신데···. 그래서 약간의 재물을 가져왔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에게 상을 내려도 시원찮을 판인데. 저번에도 자네 외조부께서 과할 정도의 양식을 보내 주셨네.”
“거절하시면 외조부께서 섭섭히 생각하실 겁니다. 직첩을 받으실 때까지 체면을 유지하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당하게 주상에게 직언을 하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왕에게 직첩을 받지 못하면 품계만 있을 뿐 녹봉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 그 직위를 이용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허인회는 강직하기도 하거니와 부정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성품이라 벼슬살이를 이십 년 가까이했어도 옹색하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외조부가 재물을 조금 보태어 준 거였다.
해인과 허인회가 돈독한 관계인지라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고마우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염치 불고하고 받겠네. 대감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게.”
“예. 영감. 그리고 직첩을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시면 경흥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소관이 모시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소관이 먹고살 궁리를 조금 해놓았습니다. 영감을 모실 여유는 되오니 무슨 일이 있으면 지체 말고 녹둔도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녹둔도로 사람을 보내라고 하자 허인회는 놀란 눈빛을 했다.
그곳은 조정에서도 손을 놓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녹둔도라니? 자세히 말해 보게.”
“녹둔도를 관리하지 않고 있기에 몇몇 의병들 가족에게 농사를 부치라고 했습니다. 소관이 동가식서가숙하는 처지기에 우선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입니다.”
“어허! 조정에서도 아직 그곳을 어찌할지 논의된 적이 없는데···.”
왜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북변의 손바닥만 한 땅을 두고 논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괜히 여진족을 자극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진족들에게 내어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네만.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음이네.”
“겨우 몇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무슨 오해를 하겠습니까.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상하지요.”
“자네의 전공을 부담스러워하는 작자들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소관이 함경도에 있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멀리 있다고 눈엣가시가 사라지는가? 남해에서 활약하는 이순신을 두고도 말들이 많은 판인데.”
나라가 망조가 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쩡히 남해에서 왜군과 잘 싸우고 있는 수군절도사가 왜 입방아에 오르내리겠는가.
주상이 신료들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힘이 커지고 위상이 오른 수군절도사가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했을 터.
지금이야 아쉬우니 가만히 두겠지만 왜군이 물러가면 토사구팽이 될 신세다.
해인 자신을 돌이켜봐도 그렇지 않던가.
“소관은 함경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면 영감께서도 부담을 더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사람아.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은가.”
“영감. 심려치 마십시오. 벼슬에 미련이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소관은 언제라도 다시 절로 돌아갈 것입니다.”
직첩을 못 받고 변방을 떠돌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다시 중이 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해인이 나중에 무슨 일은 저지르든 허인회와는 무관한 일이 되어야 한다.
한때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었다고 하여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정말 아무 미련이 없는가?”
“예. 그러하오니 영감께서도 소관의 일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당분간은 변방에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겠습니다.”
해인의 대답에 허인회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해인에게 어떤 직첩을 내리지 않았고, 자신 또한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체 그저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잖은가.
한성을 탈환한 지 벌써 몇 달째이건만.
“올해까지만 기다려 보세. 아직 왜란이 끝난 것도 아니니 경황이 없어서 그럴 거네.”
이 말은 허인회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어두운 표정의 허인회와 작별을 하고 나오는 해인의 마음도 무거웠다.
해동의 존재를 속 시원히 밝히지 못했기에.
설사 밝힌다 한들 허인회의 성품에 선뜻 따라올 리 만무하지만.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1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