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1화
121화 일취월장 (3)
박이규와 아탕게가 쿠예섬에서 돌아왔다.
코레호가 쿠예섬으로 가서 장정 이백 명을 싣고 왔다.
쿠예섬의 장정 중 몸이 날래고 눈썰미가 좋은 이들만 골랐다는데, 섬을 이 잡듯 뒤진 끝에 찾아낸 장정들은 아탕게에게 두 달 정도 교련을 받아서인지 제법 눈빛이 살아 있었다.
“군문에 들겠다는 젊은이들을 모두 데려왔느냐?”
“아직 많이 남아 있소. 고르고 고른 장정이 바로 저들이요. 알고 보니 섬에 거주하는 사람이 오천여 명이나 되더이다.”
“그래? 누를란 부족장도 정확히 얼마인지 모르고 있었구나.”
“그런가 봅디다. 문자가 없으니 대충대충 셈을 한 것 같으오.”
이로써 해동의 인구는 일만 오천 명이나 되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숫자지만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백성을 모은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병사로 들어오려는 장정들이 많더냐?”
“아이고 형님. 서로 병사가 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소. 다음에 한 차례 더 뽑겠다고 다독인 후 돌려보냈소.”
“네가 고생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뽑고 싶었소.”
조선 사람보다 허우대 좋고 힘도 남다르니 욕심이 날 만도 할 거였다.
“자질은 어떻더냐?”
“기대할 만하오. 잘만 다듬어 놓으면 형님의 친위대로는 아주 그만이오.”
“친위대?”
“호위대보다는 친위대가 더 어울리잖소.”
“······.”
친위대란 말은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너무 거창한 명칭이 아닌가.
“조선의 속국으로 들어갈 생각이라면 모를까 해동도 엄연히 나라가 아니오. 친위대라고 이름 짓는다고 누가 뭐랄 것이오.”
땅만 넓을 뿐, 사람 수로 따져도 함경도보다 적었다.
그런 형편인데 어찌 나라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주민들 각자가 해동이 조선과는 무관한 곳이라는 인식을 할 때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란으로 인해 잠시 피신해 있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터.
비록 헐벗고 굶주리는 한이 있더라도 왜란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남들이 비웃겠다. 겨우 일만 오천의 백성으로 무슨 나라라 칭하겠느냐.”
“형님. 소제가 쿠예섬에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소. 조선과는 다른 길로 가기로 작정했다면 이미 조선과는 척을 질 수밖에 없잖소. 이제는 북쪽에 해동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만방에 알립시다.”
“건주여진을 물리친 다음에 생각하자.”
“아무튼 소제는 쿠예섬 출신 장정들을 형님의 친위대로 육성할 것이니 너무 타박하지 마시오. 건주가 쳐들어오면 형님께서 해동에 가만히 계실 것도 아닌데 어쩌겠소. 친위대라도 만들어 놓아야 이 아우가 마음이 놓일 것 같소.”
“아예 나더러 일선에 서라는 말이구나.”
“형님 고집을 소제가 어찌 꺾을 수 있겠소.”
“하하하···.”
* * *
경흥 너머 녹둔도에 나가 있는 척후대에서 조선과 왜국이 휴전 협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명이 앞장서서 휴전을 제안했고 힘이 빠진 왜국도 이에 응하여 줄다리기를 한다는 거였다.
경상도 해안가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은 휴전 결과에 따라 퇴각할 것이어서 조선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은 몇 년째의 가뭄과 왜란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왔다.
지난겨울에도 아사자가 속출하였고, 지금은 춘궁기라 더 참혹할 거였다.
휴전이 된다고 해도 민초들이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큰 사형. 조선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군요. 불쌍한 백성들을 우리라도 거두어야겠습니다.”
“이렇게 먼 북쪽으로 오려고 하겠느냐?”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큰 사형께서 나서 주십시오. 큰 사형이 사람들에게 권유하면 믿고 따라올 것입니다.”
일심 사형은 절에서만 삼십 년 넘게 생활한 터라 비록 파계를 하고 머리를 길렀어도 여전히 불도를 닦는 사람처럼 보였다.
늘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범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사형이 나선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믿고 따를 것 같아 부탁하는 거였다.
도처에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사람이 널려 있고, 주린 배를 안고 산으로 들로 헤매어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따라올 것이다.
“불쌍한 중생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는 일인데 당연히 나서야지.”
“고맙습니다. 사형.”
“내가 해동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몇 명까지 받을 생각이냐?”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농토도 많고 씨앗도 충분합니다.”
“창고에 쌓아 놓은 곡식으로는 이삼천 명만 와도 버거울 건데?”
“모자라면 곡식을 사 오면 됩니다. 그동안 모아 놓은 은이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왜군에게서 노획하고 쿠예섬에서 생산된 은뿐만 아니라 외조부가 가져온 재물 또한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그동안 갈무리해 둔 모피도 있어서 곡식으로 바꾸어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곡식을 어디서 들여올 생각이냐?”
“범선이 있으니 명나라에서 들여오면 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상황을 봐서 전라도에도 가 볼 생각입니다.”
“바다에는 왜군들이 들끓고 있는데 어찌 가려고?”
“조선 바다는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휘어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범선이 왜선보다 빠르고 화포까지 장착해서 왜군 정도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때 녹둔도의 만호로 있던 이순신이 전라 수영으로 간 후 남해안 일대의 바다를 장악하고 왜군들을 도륙내고 있었다.
왜국이 휴전 협상에 나선 이유도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이 나타나면 도망가기 바쁘다고 하니까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해인 또한 함경도로 진출한 가토 병력을 흔들어 놓았으니 왜란을 막는데 일조를 한 셈이었다.
“날이 많이 풀렸으니 바로 녹둔도로 출발하마.”
“사형. 정규 병력 일백을 데려가십시오.”
“아니다. 안전한 곳인데 정규 병력은 필요 없다. 예비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
“건주여진이 산맥 쪽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고 남쪽의 장인 부족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장인 부족도 건주의 도발에 대비하여 겨울 동안 많은 준비를 했기에 그리 걱정할 건 없었다.
문제는 장인 부족과 해동 사이의 빈틈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예비 병력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큰 사형. 만일이 염려되어 그렇습니다.”
“해동을 지켜야 할 정규 병력을 밖으로 내보는 건 아닌 것 같구나. 혹시 내가 못 미더워 그러느냐?”
“만일에 대비하자는 것이지요. 소제는 이제 사형들밖에 없습니다.”
스님을 잃은 것만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사형들마저 잘못되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 거였다.
허나 일심의 고집 또한 쇠심줄이라 요지부동이었다.
“예비 병력도 겨우내 훈련을 받아 이젠 제 몫을 한다. 네 눈에 이 사형이 시원찮아 보이겠지만 예전의 내가 아니다. 둘째도 데려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사형들도 겨우내 병사들과 함께 무예를 갈고 닦았다.
어려서부터 해 온 태식호흡과 역근경에 더해 조선 검술까지 익힌 터라 여진 전사 두셋 정도는 거뜬하게 상대할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 * *
이월이 끝날 무렵 큰 사형과 둘째 사형이 일백의 예비 병사들과 함께 녹둔도로 떠났다.
이주민을 모으려면 한 달 이상 걸릴 것이기에 여분의 말에도 곡식을 잔뜩 실어 보냈다.
병사들도 먹어야 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식량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에겐 당장 배불리 먹는 게 우선이었고, 식량이 넉넉하다는 걸 보여줘야 안심하고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형이 녹둔도로 떠난 후 새로운 농토를 만드는 일에 전 주민이 뛰어들었다.
각 주둔지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해동 사람들이 밭을 개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작년에 거두어 둔 마령서와 옥미를 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개간한 농토로는 한참 모자랐다.
그리고 사람이 늘어났으니만큼 경작 면적을 더 넓힐 필요가 있었다.
곡식을 많이 생산하고 비축할수록 해동이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딜 가나 곡식을 으뜸으로 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귀한 대접을 받는 형편이었다.
연중 내리는 비의 양도 줄었지만 추위도 빨리 찾아와서 농사를 짓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해동은 서쪽 산맥과 해안에 위치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적당한 양의 비가 내려 주었고, 일찍 파종하여 추수를 앞당기는 등의 노력으로 대풍에 버금가는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해인까지 나서서 농토를 일구는 데 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해안가 망루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 정체불명의 범선 두 척이 회색 돛에 바람을 잔뜩 안고 접근하는 게 보였다.
해안의 망루는 바다로 접근하는 적에 대비하여 설치해 둔 거였다.
양이들은 미지의 땅인 북쪽 해안을 탐험하려고 전에 자주 출몰했다는데, 큰 처남 부락에 머물던 포도아의 그레고리우스 등도 그런 경우였다.
양이의 범선 중 탐험보다는 노략질을 일삼는 무리도 있다고 들었기에 해안에 망루를 세웠었다.
이들이 언제 해적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력이 강하면 교역을 하고 약하면 노략질도 서슴지 않는 게 양이의 교역선이었다.
해인은 천리경을 꺼내어 자세히 살폈다.
주 기둥 꼭대기에 펄럭이는 깃발은 포도아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범선의 옆면에 쓰인 꼬부랑 문자도 눈에 익은 글씨였다.
그렇게 기다리던 포도아의 마리아호였던 것이다.
만석은 범선이 나타나자 병사들을 소집하고 화포를 배치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백인장. 마리아호다. 그레고리우스와 길버트가 약속을 지켰구나.”
“다행이오이다. 장군. 양이들이 그래도 신의가 있나 보옵니다.”
“저들에게 이익이 되니까 찾아오는 거겠지. 그냥 오겠느냐.”
포도아에서 이 먼 곳까지 올 때는 신의보다는 이익이 우선일 것이다.
장거리 항해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주 입장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식과 선원들을 살려 주었기에 보은을 하겠다는 마음도 없잖아 있겠지만, 이익이 없는 곳에 무턱대고 배를 보내지는 않았을 터.
해동이 어떤 곳이며 교역할 수 있는 품목이 모피 외에도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보냈을 거였다.
두 척의 범선이 만안으로 들어오고 만석과 병사들이 여러 척의 뗏목을 타고 다가가자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그레고리우스와 길버트 선장이 선원들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어서 오시오. 길버트 선장.”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장군.”
“그레고리우스도 반갑소. 가족들을 만난 소감이 어떠셨소? 부친께서는 건강을 회복하셨는지요.”
남작의 아들이라 했으니 조선으로 치면 양반이었다.
그런 신분이 이렇게 험한 바다 생활을 하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데 다시 만난 아들인데 또 바다로 내보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친께서도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다시 보낸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진 발음이 정확하진 않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몇 년간 큰 처남의 부락에 있으면서 익힌 여진어였다.
“그대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소.”
“장군. 우리니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중도에 풍랑까지 만나 죽을 고생을 하며 왔습니다. 장거리 항해를 하려면···.”
길버트 선장은 침을 튀겨가며 항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듣고 보니 포도아까지 오가는데 일 년 반이나 걸리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던 것이다.
식수나 식량이 떨어지면 중간 기착지에 들려 보급도 받아야 하고, 풍랑으로 선체가 파손되면 고쳐야 한다.
또 선원들 중 누군가가 풍토병에 걸리면 대부분이 같은 증세를 보여 장기간 한곳에 머물러야 하는 등, 장거리 항해는 한마디로 죽음을 각오하고 다녀야 한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오. 다친 이는 없었소?”
“다행히 선체만 조금 파손되었습니다. 마침 섬이 많은 비율빈 근처를 항해하던 중이라 큰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장거리 항해 시에는 선체의 파손에 대비하여 여분의 자재와 선박 장인이 함께한다.
설사 선박 장인이 없다고 해도 선원들이 어지간한 고장이나 파손은 수리할 수준이 되었다.
이들이 범선 한 척만으로는 절대 장거리 항해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두 척 이상의 배가 함께 다녀야 하는 이유는 위급 시에 한쪽 배로 옮겨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범선 한 척으로는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없소?”
“죽을 각오를 한다면 모를까 그렇게 무모한 항해는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해동은 이제 막 태동한 나라이오. 좀 더 발전하려면 타국과의 교역밖에는 길이 없소. 이곳에서 누군가 찾아오기만 기다리지는 않고 우리가 직접 타국을 방문하겠다는 말이지요.”
“대해를 항해하지 않는다면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닙니다.”
“근해만 돌아다녀서야 어찌 성이 차겠소. 우리도 그대들처럼 세상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고 싶소. 어려운 부탁인 걸 알지만 우리에게 범선을 한 척 마련해 주시오. 그 대가로 재물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곳간에 쌓아둔 은이 있어 범선 한 척 가격은 지불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범선을 타국에 쉬이 양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누군가가 범선을 갖고 있으면 자신들이 취할 이득이 반감되기 때문이었다.
“부친께 그 문제를 상의하였더니 은혜를 갚는 의미로 선박 장인을 내주었습니다. 이번에 장인들과 함께 왔으니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시지요.”
“그게 정말이오?”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