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2화
122화 건주의 도발 (1)
길버트 선장과 그레고리우스는 선박 장인 둘만 데려오고 화포는 가져오지 않았다.
그동안 개량된 화포가 없었기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무기를 기대했던 해인으로서는 실망이 컸지만 현재 해동이 생산하고 있는 화포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일단 마음을 접었다.
지금은 당장 범선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범선을 만들 수 있다면 화포든 무엇이든 양이의 나라를 직접 방문하여 사들이면 되는 일이다.
박이규도 범선을 만들 길이 열리자 목수들을 모집하는 등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아우님. 기왕 우리 손으로 범선을 만든다면 한꺼번에 여러 척을 시도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뛰어가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어차피 선박 장인들의 지도와 감독을 받고 하는 일인데 굳이 한 척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말일세. 한 척을 만드나 세 척을 만드나 손이 가는 건 마찬가지라고 보네. 선박 장인들을 계속 해동에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으이.”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배를 만들 나무는 사방에 널려 있고, 나무를 손질할 때 같은 형태를 여러 개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하나를 만드나 두 개를 만드나 그게 그거 아닌가.
선박의 형태가 각각 다르다면 모를까 똑같은 모양이라면 말이다.
어차피 포도아 장인의 조언을 받아 만들 것이니까.
“길버트 선장에게 말해 보지요. 선박 장인을 언제까지 이곳에 둘 것인지도 확인해 보고요.”
“범선을 건조할 동안은 머물지 않겠나?”
“마음 같아서는 해동에 계속 붙잡아 두고 싶기는 한데···.”
“해동 처자를 붙여 주고 정분이 나게 하면 어떤가?”
이곳에서 혼인을 하여 정착하게 만들자는 얘기였다.
“나이가 지긋한 걸 보니 본국에 처자가 있을 것이오.”
“처자가 있는 자가 이 먼 곳까지 올 리는 만무하네. 우형이 보기에는 자진해서 온 것 같지는 않네.”
“노예란 말이오?”
“조선을 생각해 보게. 대부분의 장인들은 관아의 종처럼 취급하잖는가. 저들도 마찬가지라고 보네.”
앞선 문물을 가졌다고는 하나 양이들은 귀족과 평민 노예로 구분된다고 했다.
그레고리우스의 부친이 저들을 보냈다고 했으니까 선박 장인들도 부친에게 예속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레고리우스의 부친은 포도아에서 남작 위를 가진 귀족임과 동시에 재물을 많이 가진 대상이었다.
“장인들을 우리에게 주려고 데려왔다면 다행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만. 범선을 제작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귀한 장인들을 함부로 내돌리겠는가?”
“길버트 선장과 그레고리우스를 만나 보면 알겠지요.”
해인과 박이규는 곧바로 포도아 선원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찾아갔다.
여독이 풀렸는지 길버트 선장과 그레고리우스는 얼굴이 멀쩡했다.
“선장. 여독이 풀렸소?”
“어서 오십시오. 장군. 뱃사람들은 육지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모든 피로가 사라집니다.”
다들 기골이 장대하고 뼈마디가 굵은 사람들이라 여독이란 것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몇 달이나 바다에서 버티어 낼 수 있겠지만.
“역시 대단들 하시오.”
“하룻밤을 잘 쉬었으니 당장 모피 거래부터 하는 게 어떻습니까?”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모피는 모두 그대들과 거래할 것이니 쉬엄쉬엄하시오.”
“하하하···. 정말 기대가 큽니다.”
“선박 장인들을 보내 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리오. 그들이 이곳에 잘 적응할지가 걱정이지만.”
“이제는 이곳에 살게 되었으니 차차 적응해 가겠지요.”
“······?”
해인과 박이규가 눈을 크게 뜨자 그레고리우스가 나섰다.
“선박 장인들은 우리 가문의 노예입니다. 이제는 장군의 노예가 된 셈이지요. 부친께서 장군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조선에서도 노비를 사고팔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대단한 선박 장인을 선물로 준다니까 조금은 황당했다.
“우리에게 저들을 넘긴다니까 감사한 일이기는 하나 포도아에 처자식이 있을 것인데 어찌?”
“포도아에서는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혼인을 못 합니다. 당연히 처자식이 있을 수 없지요.”
불혹은 넘긴 것 같은데 아직도 혼인을 하지 못했다면 이제껏 짐승처럼 부려먹었다는 말이 아닌가.
양이의 노예들은 조선의 노비보다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해인이 신색을 바로 하고 물었다.
“우리에게 넘겨준다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겠구려.”
“예. 장군. 죽이든 살려 주든 이제 장군께서 정하는 대로 따를 겁니다.”
“어허! 전장에서 만났다면 모를까 이제 해동 사람이 되었으니 잘 대해 주어야지요. 그들을 노비가 아닌 양민으로 받아들이겠소.”
“장군께서 그리하여 주신다면 저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지요. 비록 고향을 떠났다고는 하나 평민으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할 일입니다. 항해 내내 겪어 봤는데 성격도 온순한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성격까지 온순하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나이가 조금 많은 게 흠이지만,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동안 여러 척의 범선을 만들며 쌓은 경험을 발휘해 준다면 해동으로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로써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평생을 짐승처럼 취급당한 사람들이니 잘 다독인다면 해동에 충성할 것은 자명하니까.
* * *
이틀을 쉰 길버트 선장과 그레고리우스는 바로 박이규와 모피 거래에 돌입했다.
서두르는 이유는 풍랑으로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고, 돌아가는 길에 명나라에도 들러야 한다는 것이다.
질이 다소 떨어지는 모피는 명나라에 넘기고 고급 모피는 본국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본국에서는 동양의 모피가 귀하게 취급받고 있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다.
멀리 해동까지 온 이유도 이윤이 많이 남는 모피 때문이었다.
“돌아갈 때 큰 처남의 부락에도 들러 주시오. 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모피를 팔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더이다.”
“직접 명나라로 가면 될 것인데 어찌 그리셨습니까?”
“코레호 한 척만으로 장거리 항해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소.”
경험이 풍부한 포도아 선원들도 두 척 이상으로 선단을 이루어 다니는데, 포도아 범선을 따라 곁다리로 명나라에 갔다 온 게 전부인 코레호만으로는 도저히 항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껏 다닌 게 강화도와 쿠예섬이었던 것이다.
“명나라를 오가는 정도는 단독 항해를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바다가 뒤집혀도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섬으로 피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대양만큼은 선단을 이루어 다녀야 합니다.”
“항해 경험이 일천한데 섬이 있다고 안심할 수는 없지요. 해동의 앞바다 상황을 보면 참으로 조마조마합디다.”
해인은 아침마다 앞바다의 상태를 살피는 게 버릇처럼 되었다.
큰 처남에게 코레호를 빌려 쓰고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해인의 기억에 의하면 해동의 앞바다는 잠잠한 적이 거의 없었다.
왜국을 지나 큰 대양이 있다 했으니 아마 그곳에서부터 몰아치는 파도일 거였다.
그런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항해를 나가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경험 부족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리라.
“맞습니다. 이익을 조금 더 얻자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요. 항해 경험을 충분히 쌓는 게 우선이긴 합니다. 당분간은 우리 포도아를 활용하십시오.”
“새로운 범선을 건조할 때까지 신세를 좀 지겠소. 당장 명의 곡식을 들여와야 하는데… 코레호를 명나라까지 인솔해 주시오.”
사실 신세랄 것도 없었다.
해동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자신들을 내세운다면 포도아로서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들을 잘 구슬려 해동의 발전을 꾀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한 천리경은 가져왔소?”
“당연히 여러 개 챙겨 왔습니다.”
길버트는 가죽 가방에서 천리경을 꺼내어 놓았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열 개나 되었다.
천리경이야말로 해동에서 가장 필요한 기구였다.
항해할 때뿐만 아니라 저번에 건주여진과의 전투에서도 무척 유용하게 사용했기에 학수고대하던 물건이었다.
백인대에 하나씩 돌아갈 숫자였기에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직접 만들 방도는 없소?”
“유리만 있으면 천리경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양쪽에 있는 투명한 돌이 바로 유리입니다.”
“유리라는 걸 어디서 구하오?”
“규사를 녹인 후 굳어지면 유리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
규사는 또 무엇인지, 갈수록 모르는 말만 나왔다.
“동양에도 유리를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유리를 만들어왔습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외다. 우리 장인들에게 물어보겠소. 그들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게요.”
무예나 익혔던 해인이 어찌 알겠는가.
아마 대장장이나 다른 장인들은 알고 있을지도.
“규사는 강가나 바닷가 모래에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난히 투명하고 반짝이는 알갱이가 규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알갱이라면 해인도 많이 봤다.
해동 바닷가나 강가에도 지천이었던 것이다.
무심히 보던 작은 알갱이가 천리경의 재료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불타는 검은 흙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대들도 불이 붙는 검은 흙을 알고 있소?”
“검은 흙에 불이 붙는다면 석탄을 말씀하시는군요. 우리는 주로 땔감 대용으로 사용하는데 요즘은 쇠를 녹일 때도 넣고 화약에도 섞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화약이 안정되어 다루기가 훨씬 쉽고 폭발 사고도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이들이 아닌가.
양이들은 뭐든 허투루 보지 않고 유용하게 사용할 방도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흙이 아니 석탄이 화약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말이오?”
“예. 장군. 석탄 가루를 미량으로 섞으면 그리된다고 들었습니다.”
“화약을 안전하게 다룰 방법이 있다니까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오. 우리 장인들에게도 시도해 보라고 해야겠소.”
그 후로도 포도아의 문물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가장 해인을 놀라게 한 건 세상의 땅이 둥글게 생겼다는 것이었고, 이 땅이 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얘기였다.
천구에 붙어 있는 별자리를 보는 천문과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는 지리, 그리고 양이의 철학과 수학 등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조선이 속한 곳이 동양이면 양이의 땅은 서양이고, 서양은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과 공존을 거듭하며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과 이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개척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 * *
“형님. 우리나 조선이나 우물 안 개구리였소.”
“이 우형도 마찬가지 심정이네.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도 모르고···. 저들이 세상이 좁다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걸음마를 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지경일세.”
“형님. 이제라도 알았으니 심기일전하십시다. 우선 해동 주변의 땅만이라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겠소. 양이들이 빈 땅을 노리고 돌아다닌다 하니 건주여진만큼이나 경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형님 생각은 어떻소?”
“나도 그리 생각하네. 백성을 더 늘리고 더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 그곳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놓으세. 그리고 쿠예 섬 주변의 섬들도 살펴보세나. 지금이야 쓸모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후손에게는 금싸라기 같은 땅이 될 수도 있음이네.”
주변 섬이라는 말에 해인도 귀가 솔깃했다.
쿠예섬 아래에도 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섬에는 원주민들만 살고 있는데, 쿠예섬만큼이나 크다는 걸 들은 터라 욕심이 살짝 났다.
“쿠예섬 아래에 있는 큰 섬을 말씀하시는 게요?”
“그곳은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왜국과 너무 붙어 있어서 언젠가는 분쟁이 날 소지가 있네.”
“쿠예섬도 붙어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쿠예는 여진족의 후손이 차지하고 있어 함부로 넘보지 못할 걸세. 그 아래 섬의 원주민은 여진족의 후손이 아니라고 알고 있네.”
“그럼 근처에는 마땅한 섬이 없잖소.”
“북쪽에 있잖은가. 저번 항해 때 봤던 육지 같은 섬을 선점하자는 것일세. 그리고 해동 위쪽으로도 병사들을 보내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세. 겨울이 좀 더 긴 것뿐이지 나머지 계절은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네.”
예전에 만석이 척후대를 이끌고 쿠예섬 북단과 만나는 곳 너머까지 가 보기는 했지만, 더 위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해동보다 더 북쪽이면 겨울이 더 길 것이고 농사를 짓는 건 포기해야 할 곳이기에.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곳을 우리 영역으로 만들면 무슨 의미가 있겠소.”
“농사가 안 된다고 방치했다가 건주여진이라도 슬그머니 자리를 잡으면 영 신경 쓰이잖는가. 무엇보다도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자라는 곳이 아닌가. 추운 곳에서 자랐으니 단단할 것이고 범선 재료로는 그만이라고 보네만.”
“이곳의 나무도 단단하잖소.”
“범선을 한두 척만 만들고 말 건가? 나무가 자라는 속도보다 베는 게 많으면 언젠가는 고갈될 게 아닌가. 그때를 대비하자는 것일세.”
박이규도 이젠 코앞에 닥친 것만 보는 게 아닌, 앞날을 걱정할 정도로 시야가 넓어졌다.
그런 반면에 영역을 지키려는 데만 몰두해 있는 해인은 오히려 지킬 수 있는 곳만 고수하겠다며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박이규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오. 소제가 건주여진만 생각하다 보니 보는 눈이 좁아졌소. 사람을 풀어 더 북쪽을 개척해 보라고 하겠소.”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