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4화
124화 건주의 도발 (3)
건주의 병사들을 몰이 사냥하듯 한곳에 몰아넣은 후 순차적으로 조총을 발사하자 두 배나 되는 병력임에도 이렇다 할 반격도 못 하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당당하게 맞서 단병접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몸을 숨긴 채 총구만 내놓고 있는데 화살을 날린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거기에다 조총 소리에 놀란 군마들이 날뛰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여진 전사들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 와중에도 화살을 날리는 전사들이 있었고, 눈먼 화살에 아군도 다수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워낙 압도적인 전력이라 화살을 날리던 자들도 조총에 맞고 쓰러졌다.
“방포를 멈춰라.”
뒤에서 들이치던 해인이 방포를 중단시켰다.
이미 전의마저 상실한 터라 더 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조총에 맞아 쓰러진 자보다 낙마한 병사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낙마한 병사들은 방포 소리에 놀란 군마의 발굽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칼을 꺼내어 전사들을 독려하는 자가 눈에 띄었다.
날뛰던 군마들이 다소 진정되자 건주의 전사들은 언제 우왕좌왕했던가 싶게 진용을 갖추고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말을 타지 않은 여진 전사는 그저 힘만 센 장정일 뿐.
해인과 아탕게가 전광석화처럼 건주 병사들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어지러운 칼춤이 시작되자 잠깐 사이에 십여 명의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건주의 우두머리인 장수도 해인의 검에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해인과 아탕게는 가축 떼 속으로 뛰어든 한 마리의 범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사이에 또 수십 명의 건주 병사들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었다.
아탕게의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으나 그보다 더한 해인의 칼부림에 다들 얼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살고 싶으면 무기를 버려라.”
해인의 일갈에 건주의 병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병장기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더 버텨 봐야 죽는 일밖에 없었으므로.
“병장기를 거두고 군마를 수습하라.”
연이어 아탕게가 명을 내리자 해동의 병사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말들을 수습했다.
포로만 해도 이백 명이 넘고 군마는 무려 일천오백여 기에 달했다.
멀쩡한 여진 전사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병장기를 버릴 정도로 해인의 무예와 해동의 조총이 무서웠나 보다.
대승도 이런 대승은 없었다.
물론 해동의 병사들도 눈먼 화살에 맞아 다쳤지만 죽은 자는 없었다.
원거리 공격이 아닌 단병접전을 벌였다면 무수한 목숨들이 스러졌겠지만.
* * *
전장을 수습한 후 아탕게에게 포로와 군마를 이끌고 해동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아탕게는 함께 원정을 가고 싶어 안달을 했으나 해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지라 아탕게로서도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해인이 요동 깊숙이 원정을 가는 것이라면 아탕게도 데려가겠지만, 산맥 너머의 몇 개 부락만 일벌백계로 도륙 내고 돌아올 것이기에 그리 많은 병력도 필요 없었다.
또 선발대로 도착하여 전투를 치른 병사들과 각 봉수대 병력들을 곧바로 원정에 참여시키는 것도 무리였다.
전투를 치른 병사들에게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사가 갈리는 참혹한 전장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고.
이미 경지에 오른 해인이나 아탕게라면 모를까 일반 병사들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아무리 강단 있는 병사라도 전투를 치르고 나면 몇 날을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원정을 떠나는 병사들은 삼백 명이었는데, 다들 예비 군마를 한 마리씩 달고 산을 넘고 있었다.
해인은 뒤를 바짝 따르는 만석에게 말을 걸었다.
“백인장.”
“예. 장군.”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찮으냐?”
“장군과 함께할 수 있어서 소인으로서는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원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네 자식은 아비 없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괜찮으냐냐고 묻는 것이다.”
“장군을 도와 건주여진을 도모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광영이옵니다. 해동을 위해 한목숨 바친 걸 동료들도 잊지 않을 것이고요.”
“그렇지. 그런 마음이면 된다. 죽기를 각오하면 오히려 살 것이다. 혹여 백인장이 잘못되어도 해동에 남아 있는 처자식은 나와 동료들이 챙길 것이니 염려 마라.”
원정을 떠나는데 어찌 긴장이 없을 것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만석을 비롯한 병사들은 남아 있는 식솔들에 대한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되어도 식솔들은 건재할 것이므로.
죽거나 다친 병사들에 대한 예우가 해동만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예우는 지금까지의 예로 봐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조선과는 달리 해동에는 반상의 구분이 없고, 땀 흘려 일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던가.
나라의 근간이 그러하니 해동을 위해 한목숨 바쳤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인과 만석이 주고받는 말은 휘하의 장병들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일부는 허공을 보며 의지를 다졌다.
이제껏 장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전장을 전전했지만, 다친 동료들은 있었어도 아직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절대로 있을 수도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아랫사람들을 아끼고 챙겼던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면 장군이 앞장서서 적을 도륙했기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승산이 없거나 병사들이 다칠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는 장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병사들의 목숨보다 중한 게 없다는 장군의 말은 이제 금과옥조가 되었다.
장군이 그러하니 십인장이든 백인장이든 그런 규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물론 조총이 있었기에 단병접전을 하지 않아도 되어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날래기 이를 데 없다는 건주여진의 전사들을 맞이하여 수차례 접전을 벌였지만 막상 전투를 치러 본 결과 별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판국인데 원정이라고 두려워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죽을 일이 없는 원정이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 *
산맥을 넘자 눈앞에는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평원 곳곳에 불쑥 솟은 산이 있긴 했지만 산맥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서 그냥 커다란 무덤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라이 보이는 지평선에는 봄의 아지랑이가 시야를 흐리게 할 뿐이었다.
천리경을 꺼내어 사방을 살펴보던 중 무덤처럼 불쑥 솟은 산 옆에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 보였다.
말을 타고 벌판을 질주하는 자들도 눈에 띄었다.
건주여진에 복속된 부족일 터.
만약 적대적인 부족이라면 저렇게 멀쩡할 리 만무하다.
척후를 먼저 보내고 느긋하게 마을로 접근했다.
마을에 남아 있는 전사들은 몇 명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대부분 해동을 치기 위해 산맥을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두 식경쯤 떨어진 개울까지 다가간 후 말들에게 물을 먹이며 척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척후들은 마을에 전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경계를 서는 전사 십여 명 외에는 전부 노약자나 부녀자들만 있다는 거였다.
역시 예측한 대로 이곳의 전사들도 해동 원정에 따라갔을 터였다.
해인은 일단 마을을 접수하기로 했다.
대부분이 노약자와 부녀자뿐인 마을을 도모한다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았으나, 근처에 있는 여진 부족의 상황을 알아보려면 마을을 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총을 장전하고 속보로 전진한다.”
“장군. 노약자들이 대부분인데 어찌….”
“노약자라도 여진 사람이다. 우리를 보면 다짜고짜 활을 쏠 것인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
“…….”
만석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가란구륜 부족만 봐도 애어른 할 것 없이 집 밖을 나설 때는 언제나 활을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진족에게 있어 활이란 생활 도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눈앞에 있는 부족도 그러할 터.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적이라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화살을 날릴 것인데, 만만하게 보고 접근했다가는 낭패를 볼 거였다.
이제껏 해동의 전술은 늘 숨어서 공격을 하거나 한곳에 몰아넣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방식이었는데, 오늘은 마을을 공략하는 터라 근접전을 피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마을 근처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전사들은 해동 병사들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자 마을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활을 들고 목책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목책 위로 올라온 자들은 전사들은 아니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공성전은 수성 인원의 두 배나 세 배의 병력을 투입해야 공략이 가능한데, 비록 정규 병력은 아니지만 애 어른 할 것 없이 활을 다루는 여진 부족을 상대해야 하는 공성전이라면 아군의 피해도 각오해야 한다.
공격을 받기 전에 목책을 깨야 하겠기에 해인의 마음은 급할 수밖에 없었다.
목책에서 팔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하마한 병사들은 선뜻 방포를 못하고 있었다.
“목책 위로 올라온 자들을 조준하라. 부녀자라도 사정 볼 것 없다.”
해인의 호령에 다소 주춤하던 해동의 병사들은 얼굴을 굳히며 사격을 가했다.
머뭇거렸다가는 아군만 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벌판에 울려 퍼지는 조총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자 목책 위에 올라섰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사격을 멈춰라.”
목책 위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해인은 훌쩍 목책을 뛰어넘었다.
거의 두 장 높이였지만 해인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목책 안에는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자들로 아비규환이었다.
목책을 넘어 표표히 내려서자 십이삼 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서넛이 재빨리 활을 겨누었다.
“활을 내려놓아라. 시위를 놓는 순간 이 표창이 네 목을 꿰뚫을 것이다.”
해인의 손에는 어느새 꺼냈는지 표창이 들려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해인의 서슬에 활을 얼른 내려놓았다.
“마을 족장이 누구냐? 나는 해동에서 온 장수이다.”
* * *
해인이 목책을 넘어 등장하고 난 후 더 이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워낙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여진 부락 사람들이 응전을 포기했던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조총 소리에 혼이 나간 족장이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버티어 봐야 부족 전체가 죽는 일밖에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풀썩풀썩 쓰러지는 부족민들을 봤으니 기가 차기도 할 거였다.
활을 들고 대항하는 게 아무 소용도 없을뿐더러 높은 목책을 훌쩍 뛰어넘어 온 장수의 형형한 눈빛에 절로 기가 죽었던 것이다.
해인도 전사들이 아닌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상대로 전투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던 터라 속으로 안도했다.
해인이 목책 문을 활짝 열자 해동의 기마병들이 들이닥쳤다.
족장 테무르는 온몸을 떨며 해인 앞에 부복하며 애걸하고 있었다.
“장수께서는 부족민을 불쌍히 여겨 더 이상 피를 보지 않게 해 주시오.”
“대항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도 건주의 강요에 못 이겨 전사들을 내어 줬을 것이니 어찌 보면 피해자나 마찬가지일 터.”
“그러하오. 건주에 복속되어 어쩔 수 없이 나선 것뿐이오.”
“허나. 그대들의 전사들로 인해 우리 병사들을 다치게 한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해인의 일갈에 테무르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대가를 치르라는 말이기에.
“장군. 이미 이곳까지 오셨다면 원정을 간 우리 전사들은 이미 고혼이 되었을 게 아니오. 부족의 뿌리는 유지하게 해 주시오.”
“…….”
“우리 부족이 장군께 드릴 건 별로 없소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전마라도 내어드릴 터이니 화를 푸시지요.”
“우리는 약탈을 하러 오지 않았다.”
“그럼…?”
“다시는 산맥을 넘지 못하도록 근본을 제거하러 온 것이다.”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