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126화 (126/130)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6화

126화 새로운 이주민들 (2)

해변에서는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파도가 오면 쫓기듯 달리고 밀려가면 그만큼 앞으로 나서며 내지르는 소리였다.

다들 파도에 익숙해서인지 어지간한 파도는 겁도 내지 않았다.

만약 조선에 살고 있었다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풀뿌리를 찾아 헤맬 아이들이 해동에서는 그런 걱정 없이 자연을 벗 삼아 놀고 있는 거였다.

조선에서 언제 이런 걸 만끽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배를 곯는 게 일상인 조선에서는 배가 꺼질까 봐 함부로 뛰어다니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주을과 함께 산책을 나온 해인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인. 저 아이들이 자라면 해동도 건주여진만큼 강해질 것이오.”

“연후에게 든든한 동료들이 생기겠네요.”

“이놈이 과연 저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오.”

“우두머리가 못 되면 어때요. 더 잘난 사람이 해동을 이끌어가고 연후가 곁에서 도우면 되지요.”

단단한 옥돌 같은 왕이 되라는 이름이 연후이다.

해인의 사후에 해동을 이끌어 갈 아이인데 만날 어미 품만 찾는 게 영 마땅치 않았다.

물론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젖먹이지만 사내라면 조금 의젓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장군. 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시지요?”

“내가 무슨….”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어요. 그저 젖먹이일 뿐입니다.”

“내가 언제 뭐라고 했소?”

“호호호… 그런 눈빛을 하면 아이가 금방 알아요. 괜히 눈치나 보는 아이로 만들 생각이세요? 아직 젖먹이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연후가 주을을 독차지하자 해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적당히 젖을 먹었으면 잠이라도 자련만 한사코 어미 품을 파고드는 바람에 해인은 늘 뒷전이었다.

그게 불만인지라 아직 젖먹이에 불과함에도 사내 운운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부님과 외숙모가 연후를 자주 찾던데….”

“낮에는 거의 조부님 품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밤이면 제 품을 찾을 수밖에요.”

“너무 오냐오냐하면 나중에 버릇없다는 말을 들을까 걱정이오.”

“어린아이 때는 어른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게 좋아요. 글을 읽을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바로잡아질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만….”

요즘 한가해서인지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는 것도 관심을 두고 보는 편이었다.

그래서 연후의 행동도 눈에 띄었던 것이고.

그동안 건주여진으로 인해 해동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못했다.

외조부와 외삼촌이 해동을 이끌고 있어서였다.

해동 주민들도 두 분을 잘 따르고 있었다.

양반임에도 양반 같지 않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해동의 수장인 해인의 외조부이기도 하거니와 학식이나 인품은 물론, 한때는 삼정승 바로 아래인 좌찬성 대감이었지만 권위조차 세우지 않았으니 주민들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반상의 구분이 없다고는 하나 해인의 외조부나 외삼촌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건주여진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조선은 누란의 위기에 있으니 이곳 해동에 뼈를 묻을 곳이란 생각으로 다들 참으로 억척스럽게 일하고 있었다.

민초들이야 걸음마를 떼고부터 일에 치였던 사람들이라 배부르고 등 따뜻한 이곳에 불만이 있을 수도 없었다.

“앞으로 매년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이주민이 와서 어수선하지는 않소?”

“어려운 사람들을 건사할 수 있다는 게 어디예요. 해동이니까 가능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오. 조선은 더 이상 희망이 없소. 이제 우리 해동이 이곳에서 성세를 구가할 것이오.”

이 말은 해인이 스스로를 독려하는 말이었다.

반드시 해동을 그렇게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자 주을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얼굴 가득 어려 있었다.

* * *

“형님. 산맥 쪽 봉수대에 병사를 더 늘렸으면 하오.”

“건주여진이 당분간은 여력이 없어 오지 않을 것인데 왜 그러느냐?”

“당분간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또 밀고 들어올 것이 아니오. 그래서 아예 조선의 육진처럼 만들자는 말씀이지요.”

“대규모 주둔지라….”

아탕게의 제안에 해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함경도에 설치한 육진은 여진족을 몰아내기 위함인데, 초기에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었다.

작금에 와서는 왕권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중에 요동을 도모할 것인데 그곳에 대규모 주둔지를 만든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요동을 도모하려면 아직 요원한 일이 아니오. 몇 년간만 방비를 하자는 말씀이지요. 그래야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으오.”

“그럼 병사를 더 모집해야겠구나.”

“백성이 늘어났으니 당연히 병사를 늘려야지요.”

“정규병을 경계에만 투입하기는 좀 그렇다만.”

정규병을 산맥 쪽으로 배치하고 신규 병력은 남쪽에 배치하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알토란같은 병사들을 경계만 서는 붙박이로 놔둔다는 게 영 마음이 걸렸다.

자고로 병사들이란 몸이 바빠야 강군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냥 붙박이로 앉혀 두자는 건 아니고요. 수시로 산맥을 넘어 요동을 경계해야지요.”

“요동 쪽을 계속 건드리자는 말이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싶어 영 내키지 않았지만, 해동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긴 했다.

“산맥 가까이 있는 부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고요.”

“누루하치가 곱게 두고 보겠느냐?”

“언젠가는 부딪칠 존재가 건주여진이오.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려야 오판하지 않지요.”

무릇 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안정만 추구할 수는 없다.

때로는 무력시위를 하여 주변국에 존재를 과시함으로써 오판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나라를 지키는 한 방법이다.

조선의 예로 보아서도 무력을 투사하는 게 때로는 필요하다.

허약해 보이면 이놈 저놈이 와서 찔러 보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네 말이 맞다. 일단 신규 병사를 뽑자. 사람이 늘어났으니 지킬 곳이 더 많아지긴 했구나.”

이번에 이주한 일만 명의 조선 사람들은 다섯 개의 마을로 분산시켜 자리를 잡도록 했다.

너른 땅이 있는데 한군데 모여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산맥 쪽 봉수대 세 곳에 정병 일백씩을 각각 배치하는 게 어떠하오?”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럼 우선 숙소를 짓고 성벽을 쌓는 일이 급하다.”

“그 일은 이번에 이주한 백성들을 동원하면 어떻소? 그들에게도 일거리를 주어야지요.”

“당장 거주할 집을 짓는 게 우선인데….”

곧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이내 추워진다.

이주민들이 살 집을 짓는 게 급한데, 성벽까지 쌓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집을 짓거나 성벽을 쌓는 일에 경중이 있을 수 없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또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올 것인데, 미리 집을 짓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집은 기존 주민들이 짓는 게 더 낫소. 이미 집을 지어 봤기에 손도 빠를 것이고요.”

“흠!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형님. 당장 세 곳 모두 성벽을 쌓기가 여의치 않다면 제1 봉수대의 규모를 좀 더 키울까요?”

“차라지 그게 낫겠구나. 산맥 바로 아래에 있는 일선만 주력하자꾸나.”

당장은 여력이 없기에 제1 봉수대에 치중하는 게 더 효울적이긴 했다.

아탕게가 의욕적으로 나서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고.

* * *

새로 이주한 일만의 백성을 대상으로 병사 모집에 나섰다.

이번에는 오백 명만 뽑았다.

더 뽑고 싶었으나 젊은이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왜란으로 인해 청장년들이 씨가 말랐던 것이다.

그래서 벽개 사형이 데려오는 이주민 중 추가로 오백 명을 징집할 생각이었다.

기존의 병력과 새로 뽑을 일천 명이면 해동에는 약 이천의 병사들이 지키므로 건주여진도 두렵지 않다.

겨우 이천으로 뭘 하겠냐고?

병사 개개인에게 조총은 물론 전마까지 보급하고, 거기에 다수를 살상할 수 있는 화포까지 동원한다면 건주 병사들이 일만 명 이상 몰려온다고 해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음이다.

해인은 병사를 모집하고 아탕게에게 훈련을 주관하라고 명했다.

그랬더니 아탕게는 쿠예섬을 거론했다.

“형님. 쿠예섬의 젊은이들을 더 데려와야 하지 않겠소?”

“그곳도 젊은이들이 별로 없는데 추가로 징집한다면 각 부족들의 반발만 살 것이다. 벽개 사형이 데려올 이주민 중에서 병사들을 징집하자꾸나.”

“형님. 이번에 모집한 병사들도 삼십 대가 주축이오. 그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 낼지 걱정이오이다.”

“이번에 모집한 병사들은 해동을 방어하는 역할로 활용하면 된다. 해동을 비워 놓고 나갈 수는 없으니 그들이라도 활용해야지.”

“자경단이 있는데 굳이….”

“자경단이 할 일이 따로 있고 병사들이 할 일이 따로 있다. 외곽을 단단히 지키는 일이야말로 병사들이 할 일이다. 자경단이 나설 정도면 이미 해동이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상황이 아니냐.”

외곽을 방비하려면 화포도 다를 줄 알아야 하기에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안심하고 밖으로 나설 정도로 만들어라. 당분간은 내치에만 힘을 쓰자.”

“형님. 그러니까 쿠예섬 젊은이들도 더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전투력은 볼수록 탐이 나서 드리는 말씀이오.”

연초에 해동으로 들어온 쿠예섬 출신 병사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아서 든든하기는 했다.

그들을 친위대로 활용하기 위해 지금껏 실전 같은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섬사람들에게 목을 매느냐?”

뭔가 있다 싶어 물었다.

“소제가 쿠예섬 젊은이들을 해동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게 있어서 그렇소. 명색이 장군이 뱉은 말인데 이를 어기면 영이 서지 않잖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였구나.”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올지 몰랐으니 그리 약속한 것이지요.”

“부족장들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

“예. 형님. 소제에게 맡겨 두시오. 범강장달 같은 젊은이 이백은 더 데려올 수 있소.”

해인이 부족장을 설득하는 걸 전제로 승낙하자 아탕게는 당장이라도 데려올 것처럼 설쳤다.

“섬의 젊은이들이 줄어들면 사냥과 농사가 걱정이다.”

“섬사람들은 늙고 젊고 간에 다들 기력이 좋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평화로이 살던 사람들이 괜히 우리 때문에….”

“형님. 섬사람들도 언젠가는 누루하치의 발아래 놓일 팔자들이었소. 어찌 보면 형님께서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셈이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마오.”

아전인수 격이긴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쿠예섬은 언젠가 누루하치의 발아래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게 그들에게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허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영토를 확장할 야욕에 사로잡힌 누루하치가 섬 부족들을 곱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쿠예섬 사람들이 과연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까 모르겠다.”

“이곳에 온 쿠예섬 병사들은 이미 그런 사정을 꿰뚫고 있소이다. 그냥 넋 놓고 있다 보면 섬이 엉망진창이 된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더 열심인 것이지요.”

“쿠예 병사들이라도 사정을 안다니까 다행스럽구나.”

“소제는 얼른 범선으로 쿠예섬에 다녀오겠소.”

마침 범선이 명나라에서 돌아온 터라 쿠예섬 병력을 옮기기도 수월했다.

아탕게는 그걸 노리고 쿠예섬을 거론 한 것이리라.

저돌적이고 거칠기는 하지만 제법 염두를 굴리는 아탕게가 기꺼워 해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형님. 어찌 표정이 묘하오?”

“해동을 위하는 아우가 미더워 그러는 것이다.”

“소제의 마음을 이제 아셨소?”

“내 진즉에 알고 있었지. 하하하….”

“일단 쿠예섬의 젊은이들을 긁어모아 오겠소.”

“강제로 하지 말거라. 그들도 우리의 백성이다.”

“선물을 좀 들고 가야지요. 부족장들에게 그릇이며 농기구를 갖다 주면 되오.”

“부족 청년들의 목숨값이나 마찬가지인데 겨우 그런 것만 쥐여 준다는 게 좀 그렇구나.”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쿠예섬 병사들은 자신들이 부족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고 있소.”

해동의 병사들에게는 녹봉으로 제법 많은 곡식을 주고 있었다.

조선처럼 맹탕으로 부려먹지는 않는다.

식구 중 거의 두 사람 몫의 일을 할 청년들이 병사로 차출되었는데,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병사들의 사기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식솔들이 굶지 않고 먹고살 수 있도록 해 줘야만 힘이 나는 법이다.

그래야만 해동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이며, 그게 바로 해동의 힘인 것이다.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6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