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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129화 (129/130)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9화

129화 해동성국 (1)

해동과 쿠예섬이 지척인 곳에서 북쪽으로 하루를 달리면 물빛이 검은색에 가까운 큰 강이 나온다.

이주 초기에 북쪽으로 정찰을 나섰던 만석이 흑수라고 명명했지만 쿠예섬 사람들에 의하면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명칭이 ‘아무르’라고 했다.

‘아무르’는 커다란 강이라는 뜻이다.

아탕게와 함께 아무르강에 도착한 해인은 바다처럼 넓은 강 하구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건너편의 강안이 아스라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동과 쿠예섬의 최단거리보다 훨씬 멀었던 것이다.

천리경으로 건너편 강안을 살피던 아탕게가 입을 열었다.

“형님. 바다라고 해도 믿겠구려.”

“만석 백인장이 이곳까지 와서 발길을 돌렸다고?”

“예. 형님. 강이 넓어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오. 이곳에 진을 설치하고 해동의 경계로 삼으면 될 것 같소.”

“강 너머에 넓은 벌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두고 보자는 말이냐?”

해인은 강 너머의 땅도 은근히 욕심이 났던 것이다.

이곳까지 온 이유는 표석을 세워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표석은 나중에라도 주변과 영역 분쟁이 나면 이미 해동에서 선점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표석도 없이 해동의 영역이라고 우길 수는 없잖은가.

아무르강이 있는 곳까지가 발해의 영역에 해당했기에 발해의 뒤를 이은 해동이 이곳을 영역이라 주장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형님. 이곳까지만 해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데 강 너머도 욕심내시는 것이오?”

“미리 선점해 놓아야 나중에 후손들에게 욕을 먹지 않을 게 아니냐.”

“누가 감히 형님의 행사를 두고 찧고 까불겠소.”

“조금만 수고하면 우리 땅이 되는데 여기서 발길을 돌린다면 나중에 후손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기왕 나선 길인데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면 될 일이었다.

외조부도 지금의 해동에 만족할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기에 강 너머의 땅에도 표석을 세우려는 것이다.

“만약 후손들 중 그러는 자가 있다면 소제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혼꾸멍내 줄 것이오.”

추수가 한창일 때에 조선의 유민 이만여 명이 해동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해동은 오만의 백성을 갖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이주민이 해동으로 올 수 있었던 건 조선의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유민들이 들어올 것이기에 영역을 더 넓히고 싶은 욕심에 병사 일백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저곳은 예전부터 방치된 땅이라는데 표석을 세운들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소?”

“세월이 흐르면 저곳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것이다. 우리가 미리 선점해 놓으면 누구도 군소리를 하지 않을 게다.”

“그렇기는 하지만… 과연 저곳에 사람이 살아갈 때가 오려는지….”

지금까지 표석을 세운 영역만으로도 수백만의 사람이 풍요롭게 살 만큼 넓었다.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자라고 있는 숲과 초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짐승이 들끓어 사냥만으로도 먹고 살 정도였고, 농지를 개간하면 수백만의 사람이 배를 두드리며 살 것이다.

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몰려와도 감당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해인의 표정을 살피던 아탕게가 객쩍은 말을 내놓았다.

“형님. 이번 참에 조선이 더 망조가 들어 유민이 많아졌으면 좋겠소.”

“무슨 그리 험한 소리를 하느냐. 미우나 고우나 조선은 우리의 뿌리인데. 조선이 망하면 해동도 그만큼 힘들어진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느냐.”

“소제는 그리 생각하지 않소. 형님이 계시고 범강장달 같은 병사들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지나친 자만심이긴 하지만 실제로 해동의 병사들은 어딜 내놓아도 될 만큼 잘 훈련되어 있고 사기 또한 높았다.

거기에 더해 수천의 대군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화포를 늘 갖고 다니는 터라 겁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죽은 병사 하나 없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건 병사들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전술을 고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 * *

해인과 병사들은 뗏목을 만들어 아무르강을 건넜다.

일백여 명의 병사들과 전마가 강을 건너는 건 그리 녹록지 않았지만, 쿠예섬으로 넘나들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별일 없이 건널 수 있었다.

강 너머는 남쪽과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었다.

남쪽과는 달리 높은 산이 거의 없는 구릉지가 펼쳐 있고 크고 작은 호수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끝이 없을 정도였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동물들은 모습을 감추기는커녕 신기한 듯 해인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별꼴을 다 보는구려.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사람을 보고 겁을 내지 않는구려.”

“그러게 말이다. 이곳에도 범과 곰 시랑(늑대)들이 있을 것인데 어찌 저리도 겁이 없을꼬.”

“저놈들이 사람을 처음 봤나 보오. 아니면 우리가 만만히 보이거나.”

한낱 미물들에 불과함에도 아탕게는 무시당하는 것 같다며 괜히 흥분하고 있었다.

“하하하… 별것도 아닌 일로 흥분하는구나.”

“저놈들을 당장….”

“아서라. 괜히 놀랄라. 앞으로 이곳을 해동의 사냥터로 삼고 모피를 구하면 되겠구나.”

강 이남의 해동 영역에도 짐승들이 천지이긴 하지만 사람을 두려워하여 노련한 사냥꾼이 아니면 쉬이 잡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곳 짐승들은 사람을 보고도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서 활을 다룰 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어느 정도 시일이 흐르면 사람을 피해 다니겠지만 말이다.

“우선 몇 마리를 잡아 병사들을 먹여야겠소.”

“그러자꾸나.”

잠시 후 화살에 꿰인 큰 사슴 몇 마리가 화톳불에 익어가고 있었다.

아껴 둔 술도 나왔다.

고기가 있는데 술이 빠질 수 없어 조금씩 맛을 보려는 것이다.

해동에서는 술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전혀 마시지 않는 건 아니었다.

추석이나 설 등 특별한 날에는 술을 허용했다.

사람이 먹을 곡식도 부족한 판에 술을 빚는다고 귀한 곡식을 낭비할 수 없었으므로.

“형님. 사냥터로는 그만이겠소. 숲 안쪽에는 짐승들 천지요.”

“병사들의 겨울 사냥터로 삼으면 되겠구나.”

짐승을 사냥하는 일은 전장에서 실전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이곳을 신규 병력들의 훈련 장소로 활용하면 될 것 같았다.

혹한기에 쌓은 훈련은 병사들을 더 강인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눈이 오면 고립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겪어 보는 것도 훈련이다.

건주여진이 겨울도 마다 않고 덤벼들 수 있기에 미리 경험해 놓으려는 것이다.

이런저런 경험들이 쌓여야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음이다.

“겨울 훈련은 소제가 책임지지요.”

“그렇게 하려무나.”

아탕게는 어디에 진득하게 눌러앉아 있는 걸 몹시도 싫어한다.

전사가 집에 붙어 있다는 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거였다.

분주한 성품의 아탕게로 인해 늘 시끄러웠지만, 아탕게가 있었기에 해동은 항상 깨어 있었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으나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아탕게가 고집하여 제1 봉수대의 성벽 공사를 할 수 있었고, 쿠예섬 젊은이들이 해동의 병사로 거듭났던 것이다.

제1 봉수대에 큰 성벽을 쌓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몇천의 건주 병사들이 몰려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든든한 보루가 있어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웬일이시오? 형님이 바로 허락하시니까 어째 께름칙하오.”

“허락을 해도 문제를 삼는구나. 이미 마음을 굳혔는데 반대한다고 네가 따르겠느냐?”

“남들이 들으면 형님의 말씀을 우습게 아는 막돼먹은 놈으로 보겠소.”

“하하하…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더 말을 않겠다.”

* * *

하루를 푹 쉰 후 해인과 병사들은 내륙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 하구 주변은 땅이 질척하여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기에 내륙 쪽을 택한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숲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아가기를 닷새째, 끝이 없을 것 같은 숲이 끝나고 너른 초지가 나타났다.

내륙으로 나아감에 따라 고도가 점점 높아갔는데, 눈 앞에 펼쳐진 초지는 제법 높은 위치에 형성되어 있었다.

멀리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산맥이 아스라이 보였다.

“저기 보이는 산맥까지 가 보자. 그곳까지 해동의 영역으로 삼아야겠다.”

“아이고 형님. 욕심도 과하시오. 이곳까지만 해도 우리 해동이 관리하기가 벅찬데 저기 산맥 초입까지 더 가자고요?”

뭐든 적극적이던 아탕게도 이젠 질렸는지 해인을 만류하고 나섰다.

얼추 눈대중으로도 하루 이상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부터 울창한 수림을 며칠째 헤쳐나와 이제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더 나아가자고 하니 숨이 막힐 수밖에.

사실 해인도 이곳을 최종 목적지로 하고 주변을 살펴본 후 표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저 멀리 아스라이 산맥이 보이자 그곳을 경계로 영역을 삼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으냐. 기왕 고생하는 김에 산맥 초입에 표석을 세우고 돌아가자꾸나.”

“저곳이 어찌 빤히 보이는 곳이오, 천리경으로 봐도 아스라이 보이는 곳인데요.”

아탕게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해인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하루 반나절을 더 나아가서야 동서와 남북으로 어지럽게 이어진 산맥에 닿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산세가 거칠기 짝이 없었고 지대가 높아서인지 중턱쯤에는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형님. 이곳까지 와 보길 잘한 것 같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오. 척박하긴 하나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산세를 보니 어느 누구도 이곳을 넘보지는 못할 것 같구나.”

비록 척박한 환경이긴 하나 산맥이 병풍처럼 사방을 막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산맥을 넘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다.

그것은 곧 외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탕게는 당장 그것부터 떠올랐는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돌아간다.”

“형님. 돌아갈 때는 내친김에 남쪽 내륙으로 방향을 잡겠소. 저 산맥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해 봐야지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기왕 내륙으로 왔는데 끝은 보고 가야지. 내 생각에는 저 산맥이 아무르강까지 이어질 것 같구나.”

그동안 해동은 안전을 고려하여 해안 쪽만 영역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이젠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내륙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살피다가 무주공산임이 확인되면 표석을 세우고, 요지라고 판단되면 주둔지를 만들 참이었다.

건주여진이 강해지면 그들도 영역을 넓히려 들 것이므로 미리 선점하려는 것이다.

표석을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내처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일행은 힘이 넘쳐났다.

만약 산맥의 끝이 아무르강이라면 해동으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거대한 영역을 손에 넣는 셈이 된다.

그것도 산맥과 강이라는 천혜의 방벽을 가진 땅을 말이다.

나는 조선 제일 검이다 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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