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
이 상황에서 거래를 요청할 만한 인물은 하나였다. 희연은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요?”
“거래를 받아주세요, 네? 받아주세요, 뉴비님.”
일견 애절하게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희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일단은 거래 요청을 받았다. 눈앞에 칸별로 구분된 창이 뜨는 것과 동시에 온갖 아이템이 그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묘하게 반짝반짝한 이펙트까지 달린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귀한 것들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희연이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남자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뉴비 지원 정착금이에요! 우리들의 전통이죠!”
뭔데 그거. 왜 게임사에서도 만들지 않은 정착금 지원 제도를 멋대로 만드는 건데.
그런 전통이 세상에 어디 있어.
희연은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일단은 거래를 취소시켰다. 이름을 말할 수 없다는 그분께선 그런 희연의 선택에 경악했다.
“왜요! 왜 거절하세요!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부족한가요? 뉴비님! 가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이 숲에 가면 위험해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거부합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거부합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거부합니다.]
[스킬 <소매 넣기>에 당했습니다.]
[스킬 <소매 넣기>에 당했습니다.]
[스킬 <소매 넣기>에 당했습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스킬에 당해버린 희연을 약 올리듯 그녀의 앞에 시스템 창이 줄줄이 이어졌다.
[<황금의 머루 나무 열매>×150을 얻었습니다.]
[<아비센나 회복 포션(제작자 - 마법세계는 망했어요)>×200을 얻었습니다.]
[<악의의 응집(제작자 - 마법세계는 망했어요)>×50을 얻었습니다.]
[<놀랍도록 훌륭하고 날카로운 초보자를 위한 기본 단검(제작자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을 얻었습니다.]
[<놀랍도록 훌륭하고 단단하며 질긴 초보자를 위한 기본 가죽 갑옷(제작자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을 얻었습니다.]
[<놀랍도록 훌륭하고 신속한 초보자를 위한 기본 가죽 신발(제작자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을 얻었습니다.]
[<소매 넣기…? 당해버렸다 크윽!>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볼 경우 왠지 모르게 측은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뉴비님! 아디오스!”
소매 넣기범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졌다.
“…미쳤나 봐.”
뭐 이딴 스킬이 다 있어! 업적 이름은 또 뭐야! 이런 게 어디 있어!
자유도가 높다던 게임은 정작 희연의 의사는 깔끔하게 씹었다. 그녀는 멍하니 서서 급작스럽게 생겨버린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놀랍도록 훌륭하고 날카로운 초보자를 위한 기본 단검(제작자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
: 이것은 전설이다. 흔한 재료를 극상으로 제련해 만들어낸 단검으로, 도구를 탓하지 않는 고수라 할지라도 탐낼 만한 물건이다. 다만 이런 걸 만들 실력이 있다면 더 좋은 재료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 것을 조심스레 권유하는 바이다.]
“…….”
대충 시스템도 이 황당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녀의 개인적 유감과는 별개로 아주 좋은 물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반사적으로 욕을 하고 기나긴 고민을 하기는 했으나 희연은 받은 것들을 버리지 않기로 결론 내렸다.
찝찝하다는 이유로 버리기엔 장비가 너무 좋았다.
***
놀랍도록 훌륭한 기본 장비 세트를 입고 위와 같음 단도를 든 희연은 이동 속도와 방어력, 공격력을 15분간 올려주는 황금의 머루 나무 열매를 먹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악의의 응집 아이템을 손에 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곰이 튀어나와서 그녀를 후려쳐도 안 죽을 자신이 있는 스펙이었다. 특히 손안에 들고 있는 아이템이 그랬다.
[<악의의 응집(제작자 – 마법세계는 망했어요)> : 투척형 포션 아이템. 악의를 응집시킨 액체를 담은 병으로 혼란, 절망, 의욕 상실 및 복합적 저주를 내리는 효과가 있다.]
아직 게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녀가 보아도 초보자 지역에서 나오면 안 되는 아이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받기는 했으니 일단 쓰기야 한다만….
희연은 허허로운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어쨌든 그 유저의 말에 따르면 동물을 길들이는 시간 또한 퀘스트에 영향을 준다고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았다.
“귀여운 동물이 나오면 좋겠는데….”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그런 동물들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면 정말 행복할 듯싶었다.
회색빛 도는 숲을 둘러보며 희연은 기대심을 품고 조심히 발걸음을 떼었다.
현재 그녀가 들어온 곳은 카나리아 숲이 아닌 에흐테흐의 숲이었다.
카나리아 숲은 이름이 주는 느낌 그대로 오로지 초보자를 위해 만들어진 숲으로, 반면에 에흐테흐의 숲은 초보자 구역에 있기에는 애매한 그런 숲이었다.
오랜만에 초보자 생성 구역에 왔던 어느 유저가 카나리아 숲 구석에서 실수로 물약 하나를 떨어트렸고, 그로 인해 숲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그 구역 일부에 살고 있던 동물 및 몬스터는 변화한 생태계에 맞추어 진화했고 지금의 에흐테흐의 숲이 완성된 것이다. 게임의 자유도가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기본 바탕은 초보자용 몬스터와 동물. 그러나 물약을 떨어트린 유저는 그쪽 방면으로 상당히 이름을 날린 고렙.
그러다 보니 에흐테흐의 숲은 초보자 구역은 절대 아니지만 고렙을 위한 장소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그런 곳이 돼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희연이 보았을 때 에흐테흐의 숲이란 묘하게 을씨년스럽고 울창한 잎사귀로 인해 햇빛이 골고루 퍼지지 못하는 장소였다.
희연은 회색으로 물든 나무 넝쿨을 밀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감이 숲에 눌어붙어 있었다.
“…괜히 일로 왔나.”
좋은 장비가 생겼으니 당연히 더 어려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카나리아 숲이 아닌 이곳을 택했다. 그러나 갈수록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에 괜한 호승심이 아니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희연은 번뜩이는 빛을 내며 시리게 빛나는 단도를 보다 쭈그려 앉아 회색빛으로 물든 꽃의 줄기를 잘라 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회색빛 들꽃> : 에흐테흐의 숲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들꽃이다. 미약한 독성이 있다.]
“…독성?”
에흐테흐의 숲이 초보자에게는 정말로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아주 잘 알려주는 문구였다.
들고 있던 꽃을 대충 인벤토리 안에 넣은 희연은 딱 10분만 더 둘러보고 카나리아 숲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희연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걸 게임도 알아준 걸까. 열심히 발을 움직인 끝에 희연은 에흐테흐의 숲에서 드디어 살아 있는 존재를 마주하게 되었다.
다만 그 대상이 길들이는 종류의 동물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회색빛으로 물든 나무에 손을 얹은 남자였다.
희연은 눈앞에 존재가 유저인지 NPC인지부터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초보자 생성 구역에서 보았던 고인물만큼이나 개성적임에도 은근히 배경에 어울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갈수록 연보랏빛 도는 짙은 회색으로 물드는 긴 머리카락은 평범한 사람의 머리카락과 달리 자그마한 잎사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 존재부터가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감상을 자아냈다.
옷은 하늘하늘한 느낌의 하얀 천 옷으로 짙은 보랏빛 천이 허리에 묶여 있었다. 그와 같은 색의 두 줄로 이루어진 목걸이에 달린 자그마한 보석이 짤랑거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마치 이 에흐테흐 숲의 정령 같은 외양이었다.
역시 NPC인가?
희연은 머뭇거리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상대는 그런 그녀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놀란 기색도 없이 금빛이 어린 은색의 눈동자를 굴려 희연을 바라보았다.
“저기….”
“…….”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진짜 NPC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메르헨 호라이즌의 인기는 단순 자유도와 훌륭한 그래픽 때문만이 아니었다. NPC들의 사실적인 모습 또한 사랑받는 이유였다.
다만 자유의지 강한 NPC들은 유저들을 상대로 사기도 치고 거짓말도 하고 헛소문도 퍼트렸다. 가끔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NPC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중에는 NPC에게 ‘너 NPC지?’라고 물으면 해당 NPC가 그 유저의 목을 베어버린다는 괴담 또한 있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희연은 괜한 시비를 걸고 싶지도 않았고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는 누가 봐도 소매 넣기 당한 뉴비 모습의 희연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가면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이 있나요?”
남자는 희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에 있던 회색 나무의 가지를 뜯어 희연에게 쥐어주었다.
“저기에 있을 동물에게 먹여요. 에흐테흐의 동물들은 어린 가지의 잎사귀를 좋아해요.”
희연은 남자의 말에 뒤늦게 손에 쥔 아이템을 확인했다.
[<에흐테흐의 숲의 어린 나뭇가지> : 에흐테흐의 숲에서 보기 드문 어린나무의 가지이다. 에흐테흐의 동물들이 가장 사랑하는 먹거리이기도 하다. 독성이 있다.]
제법 귀한 물건인 듯싶었다. 희연은 뒤늦게 고맙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친절한 NPC는 감사의 말도 듣지 않고 가버렸다.
어째 유저나 NPC나 매번 순식간에 사라진다. 희연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남자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그녀는 에흐테흐의 숲에서 처음으로 동물을 발견했다. 그것도 그냥 동물도 아닌 전설의 동물 유니콘을.
“…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하얀 유니콘의 곧게 뻗은 목이 우아했다. 풍성한 옅은 회색의 갈기는 매끄럽고 폭신한 솜사탕 같았다.
이마에 툭 튀어나온 나선형의 금색 뿔 주변은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채 쉬고 있는 우아한 생명체를 보면 그 누구도 사실 유니콘은 뿔 달린 말일 뿐이라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보지 못할 전설의 동물이었다. 희연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유니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투레질하던 유니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뿔과 같은 반짝이는 금색 눈이었다. 그 눈의 시선은 그녀가 들고 있는 에흐테흐 숲의 어린 나뭇가지로 향해 있었다.
희연이 슬그머니 유니콘의 앞에 다다르자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퀘스트 <사막여우의 슬픔> 진행 중]
[길들일 대상 : 에흐테흐의 숲의 유니콘 (호감도 : -3%)]
시스템을 확인한 희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기이한 수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뭐야. 왜 마이너스부터 시작인데.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유니콘은 그녀에게 –3%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 당황할 틈도 없이 시스템 창은 띠롱띠롱 울리며 퀘스트를 진행했다.
[길들이는 도중 유니콘이 불쾌함을 느낄 시 유니콘의 분노로 인해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시작부터 아주 불길하기 그지없는 문구였다.
유니콘의 금빛 눈이 부드럽게 움직여 떨떠름해하는 희연에게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예쁘다.
그 이상 이유가 필요한가. 예쁜 것은 예쁜 것으로 존재 가치를 다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게 유니콘이었다.
유니콘이면 호감도 –3% 정도는 못 본 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