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뭐야?
희연은 뛰어내리려던 것을 관두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간절하게 에흐테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밑에 눌린 하와가 눈을 찌푸렸다.
에흐테는 달리던 것을 천천히 멈추었다. 우아하게 한 바퀴 돌아 여태껏 달려왔던 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덕분에 희연은 무리 없이 볼 수 있었다. 알프스 풍의 옷을 입은 곱게 땋은 갈색 양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거대한 검은 낫을 들고 문제의 몬스터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몬스터는 소녀가 들고 있는 낫에 베인 것인지 길쭉했던 몸의 반절이 잘려 나간 채였다. 파스슥 떨어지는 썩은 나뭇잎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소녀는 힐끔 희연을 보고는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손에 든 거대한 낫을 빙빙 돌리며 예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자 그럼 다시. 네 목을 따러 간다 요로레이디오레이디로레이디루리~”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산 것 같았다.
낫을 든 알프스 풍의 소녀는 강했다. 제 몸만 한 검은 낫을 휘두를 때마다 나뭇잎 몬스터는 몸을 수그리기 시작했다.
낫에 베일수록 퍼석한 나뭇잎은 뭉텅이로 잘려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러나 그 빈 곳을 메우듯 그것은 다시 까맣게 뭉쳐졌다 퍼지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녀는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몬스터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초보자 구역에서 내가 이 스킬까지 쓰게 만들다니.”
나뭇가지 위에 타서 하늘을 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으나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 이런 건 한 번에 잡아야 멋있는 건데!
그녀는 혀를 차고는 가엽게도 떨고 있는 뉴비, 희연에게 말했다.
“뒤로 더 물러나서 귀 막으세요!”
희연은 알프스 소녀의 말에 곧바로 에흐테를 뒤로 물렸다. 다행히도 하와 또한 상황을 대충 눈치챈 것인지 소녀의 말에 따라 자신의 손으로 귀를 꾹 누르고 있었다.
희연도 서둘러 자신의 귀를 막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앞에 알림이 뜨며 몸이 저절로 웅크려졌다.
귀를 틀어막았음에도 스킬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스킬 <우는 새의 지저귐>에 당했습니다. 일시적으로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그녀가 낫을 휘두르자 검은 새의 형상을 한 것이 튀어나와 예의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는 새의 지저귐. 상대에게 디버프를 먹임과 동시에 맞을 때까지 쫓아가는 추적형 공격 스킬이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안 통하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도 이번 공격은 먹혔다. 썩은 나뭇잎 몬스터는 제게로 달려드는 검은 새의 날개깃에 스치자마자 까맣게 타오르며 사라졌다.
알프스 소녀는 초보자 구역에 있는 것이 의아스러운 양민 학살 혼파망 몬스터의 최후를 보다 밑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유니콘. 그리고 제법 익숙한 빨간 머리 꼬마였다.
“하와잖아?”
비옌의 사과 퀘스트 조건. 그렇다는 건 역시 저 유니콘을 데리고 있는 유저가 우리 길마님이 발견했다는 뉴비님이라는 건데.
그녀는 눈을 빛내며 희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뉴비 도와주기 우선권을 가진 이름 없는 그분과 싸우고 있는 느그 집에는 뉴비 없지와 한패.
그녀가 바로 뉴비 없지가 짭볼디를 상대할 동안 뉴비님께 슬쩍 다가가기로 한 양동 작전을 세운 ‘21세기 킹스메이커’였던 것이다.
희연은 친절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소녀를 바라보며 안도했다. 저 차림새. 무조건 유저다.
적어도 말 안 통하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막막함은 없을 듯싶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연의 말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곱게 땋은 양 갈래나 알프스풍 옷차림새가 도저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낫을 휘두르던 그 사람 같지 않게 차분해 보였다.
겸양을 떤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기울이며 희연에게 물었다.
“비옌 퀘스트 하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저런 거한테 어그로가 끌린 거예요?”
“그 비옌 퀘스트 하다가 그렇게 된 건데….”
“…비옌의 사과 퀘스트?”
상대의 되물음에 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이 퀘스트 중 저런 괴물이 나오는 게 정상 루트는 아니었던 듯싶었다.
희연의 생각대로 21세기 킹스메이커는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언제부터 비옌 퀘가 이렇게 난도가 높았단 말인가. 게임사에서 깜짝 이벤트를 해준 것이 아닌 이상에야….
버근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웃었다.
희연과 하와의 놀란 심장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준 후 킹스메이커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타이밍이 맞아서 다행이었어요. 아, 저는 ‘21세기 킹스메이커’라고 해요.”
“눈오리의 돌격이에요.”
“와! 이름 너무 귀엽다. 눈오리 님? 오리 님? 그렇게 불러도 돼요?”
희연은 그녀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 닉네임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품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하와는 희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나 이름이 ‘눈오리의 돌격’이에요?”
“…….”
잠깐 으쓱해진 자존감도 잠시. 입을 꾹 다물어 버린 희연을 보며 웃던 21세기 킹스메이커는 하와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오리나 눈오리 누나라고 하면 될 것 같아.”
“그럼 누나는요?”
“나는 킹이라고 부르렴. 눈오리 님도 편하게 부르세요. 킹스메이커나 킹으로.”
그것 참 순식간에 위치가 주객전도되는 자기소개다.
어쨌든 덕분에 NPC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반드시 닉네임 그대로 말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킹스메이커는 조금 기뻐 보이는 희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하와를 한 번 힐끔거리고 말을 이었다.
“오리 님, 이대로 돌아가서 퀘스트 완료하실 거죠?”
“아, 네. 일단 돌아가서 하와가 무사하다는 걸 알려야죠.”
“그럼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에흐테흐 숲의 몬스터는 초보자가 상대하기 어렵거든요. 가다가 또 그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고.”
희연은 그녀의 친절을 눈을 빛내며 감사히 받아들였다. 원래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솔직히 지금 당장 거부하기에는 아까 본 몬스터가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눈앞에 알프스 소녀는 그 무서운 몬스터를 낫 몇 번 휘둘러 잡았고.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같이 가 달라 빌고 싶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고맙습니다.”
“겨우 이런 거로 뭘요.”
킹스메이커는 친절하고도 노련한 유저였다. 에흐테흐의 숲을 나와 카나리아 숲을 걸으면서 그녀와 희연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그 괴물 보고 누가 에흐테흐 숲에 숨겨진 퀘스트를 진행하는 건가 싶었어요.”
“광산 안에서부터 나온 몬스터예요. 저도 그게 왜 나왔는지는 잘…. 묶여 있던 카나리아를 풀어줘서 그런 건가.”
“묶여 있는 카나리아?”
“네. 하와가 누워 있던 곳 바로 옆에 수십 마리의 카나리아가 묶인 채 있었거든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말에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카나리아가 있을 리가 없는데.”
“…네?”
“원래 비옌 퀘스트엔 카나리아가 나오지 않아요.”
“…….”
말없이 시선으로 되묻는 희연에 킹스메이커는 하와를 힐끔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와가 사라지는 이유가 카나리아를 찾기 위해서인 건 맞아요. 마을 사람들은 광산에 카나리아만 있었더라면 하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고, 어린 하와가 광산에 카나리아가 있다고 착각하는 게 이 퀘스트의 내용이에요.”
“…….”
“하와는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광산에 카나리아를 찾으러 가는 거고.”
킹스메이커의 말이 끝났을 때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희연은 에흐테의 목을 끌어안은 체 도롱도롱 잠든 하와를 보았다. 하와는 분명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누군가 묶어놓은 카나리아를 데리고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고. 뭔가 엄청난 걸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고민하는 희연을 살피며 킹스메이커는 입을 열었다.
“일단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뉴비이신 것 같은데 용케 그 몬스터한테 도망치셨네요! 대단해요!”
“아, 에흐테가 빨라서요.”
“에이. 펫이 좋다고 무조건 그 효능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오리님 스텟 영향도 받는걸요. 민첩 쪽으로 발달하셨나 봐요?”
“음… 잘 모르는데….”
“아직 스텟 창 안 보셨나요?”
맞다. 그런 것도 있었지.
희연은 뒤늦게 속으로 스텟 창을 찾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인벤토리처럼 제법 익숙한 창이 희연의 앞에 나타났다.
희연이 스텟 창을 살피는 동안 킹스메이커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하여간 짭볼디. 뉴비를 키운 적이 없으니 가르쳐 줘야 할 게 뭐인지도 모르지.
역시 이런 건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니까 뉴비님은 우리 꺼!
킹스메이커는 생글생글 웃으며 희연을 기다려 주었다.
『닉네임 : 눈오리의 돌격 (소속 길드 없음)
직업 : 무직 / 무기 : 단도 (임시)
HP: 17(43) / MP : 0(0)
공복 76(100)
힘 - 3(+20) / 민첩 - 4(+32) / 마력 –0(2)
칭호 : 없음
스킬 : 없음』
“보면 스텟 창 밑에 숫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냥 쓰여 있는 게 레벨 업 해서 올리는 수치고 옆에 괄호 안에 있는 건 템빨로 올린 것들이에요.”
“아….”
확실히 민첩이 높기는 했다. 희연은 슬쩍 신고 있는 신발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 희연을 보던 킹스메이커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서두를 꺼냈다.
“혹시 게임 잘 모르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요즘 게임 업데이트가 안 이뤄져서 할 일도 없었거든요.”
“어… 근데 다른 분께서 도와주고 있어서요.”
“아, 그래요? 아쉽다. 그런데 그 사람 아직 놀 마을에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글, 쎄요?”
뒤늦게 그가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기다린다거나 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본인 말로야 전직을 할 때까지 함께하자고 말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어쩌면 이미 자기 할 일 하러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께서는 느그 집에 뉴비 없지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희연이 알 리 없는 노릇이었다.
이름 없는 그분이 어디 있는지 아는 킹스메이커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희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분이 없거나 그만 돌아가신다고 하면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킹스메이커는 기쁘게 웃었다. 계획대로였다. 짭볼디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쪽지를 보내면 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킹스메이커를 보며 희연도 그냥 웃기로 했다.
희연은 오늘 하루 동안 게임을 하며 깨달았다. 뉴비를 돕고 싶어 하는 고인물은… 생각보다 옳았다.
특히나 문제의 몬스터에게 쫓길 때 본 찬란한 고인물의 뒷모습이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야말로 빛.
그렇게 하하호호 즐겁게 이야기하고 꼬마는 투레질하는 유니콘 위에서 자는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정보는 이 게임의 장르였다.
“힐링 게임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그런 게 튀어나와서 놀랐어요.”
“힐링 게임이요?”
“네!”
“음… 누가 힐링 게임이라고….”
“…저희 집에 사는 제 어머니의 아들이요.”
“아….”
애매한 미소를 짓는 킹스메이커를 보며 희연은 깨달았다. 백희준 이 삐약이가?
“힐… 링 게임 맞죠 뭐! 꼭 동글폭신 뽀쨕 나비보벳따우 해야만 힐링인 건 아니니까요!”
“…….”
“즐거우면 다 힐링이죠!”
킹스메이커에게는 안타깝게도 희연의 기준상 힐링은 동글폭신 뽀쨕 나비보벳따우가 맞았다. 고로 그녀는 게임에서 나가자마자 백희준에게 헥토파스칼 킥을 날려줄 것이다.
“하와!”
카나리아 숲의 입구 앞에 붙박이처럼 서 있던 비옌은 멀리서부터 보이는 빨간 머리가 보이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희연에게로 달려왔다.
희연이 하와를 에흐테의 등에서 내려주자 퀘스트는 완료되었다.
[<비옌의 잃어버린 사과> 퀘스트 성공! 마을 <놀>의 사람들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카나리아가 울었네>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산소 부족 시 귓가에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비옌은 울었고 마을 사람들도 울었다. 비옌과 하와의 할아버지이자 마을 놀의 촌장인 파브넷은 소맷자락으로 눈을 콕콕 찍은 뒤 희연에게 말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불시착한 이방인들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지.”
불시착한 이방인. 메르헨 호라이즌의 NPC들이 유저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아직은 낯선 그 호칭에 희연은 애매한 웃음만 지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고 촌장은 그 모습을 즐거이 바라보았다. 조금 기다리자 그는 다시 희연에게 말을 걸었다.
[마을을 좀 도와주겠나? : 마을 놀은 순박한 곳이다. 즐거운 일이 일어나도 슬픈 일이 일어나도 언제나 조촐하게 보내야만 하는 곳이다. 마을의 촌장 파브넷은 그런 마을의 사정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살았으니 웃고 먹고 떠들어야지.’]
[퀘스트 조건 : 카나리아 숲의 토끼 세 마리 사냥해 오기
(실패 시 파브넷이 당신을 흘겨봅니다.)]
그는 조금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우리가 말이야-.”
“스킵.”
“…뭐라는 거야. 이 무례한 불시착한 이방인이.”
아. NPC한테는 스킵 안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