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희연은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희연을 밉지 않게 흘겨본 파브넷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어쨌든 우리한테 언제 또 이렇게 즐거운 날이 오겠나. 그래서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 좀 하고 싶은데 말이지….”
희연은 파브넷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인벤토리 안에서 준비한 것을 끄집어냈다. 오는 길에 킹스메이커가 잡아가는 것이 편하다며 함께 사냥해 준 싸움꾼 토끼였다.
희연은 자랑스럽게 그것을 촌장에게 내밀었다.
“마침 제가 딱 이렇게 토끼를 준비해 왔지 뭐예요.”
파브넷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런 센스 있는 이방인 같으니라고!”
“더불어 이렇게 또 딱! 멧돼지까지 준비해 봤습니다!”
“이런 멋있는 친구! 이보게! 불 준비해!”
파브넷의 말에 마을 중앙에 멧돼지 통구이를 만들기 위한 장소가 빠르게 준비되었다. 희연은 보상으로 부드러운 흰 빵을 얻었다.
노을 지던 하늘이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희연은 노릇하게 구워져 가장 맛있는 멧돼지 부위를 할당받았다. 깨끗한 나뭇잎에 쌓인 고기가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불가에 앉으니 노릇한 고기 위로 기름기가 반질반질하게 빛나 그 맛을 상당히 기대하게 했다.
침을 꼴깍 삼키는 희연에게 파브넷이 어느 종이를 들고 가까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방인이니 이제 곧 이 마을을 떠나겠군.”
“네. 전직을 하려면 바로 내일 출발해야겠죠.”
“그래그래. 그래서 내가 준비를 해봤는데 말이지.”
아, 맞다. 멧돼지 고기는 촌장 거.
희연은 조금 아쉬운 기분으로 들고 있던 고기를 파브넷에게 내밀었다. 아부성 발언은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촌장님은 아직 못 드셨죠? 제가 또 유교 국가에서 자라지 않았나요. 맛있는 건 어른이! 이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인 촌장님이 드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네는 정말! 감동이야! 내 손녀 삼고 싶군! 아주 멋진 친구야!”
파브넷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참 속물이다. 그는 맛있게 멧돼지 구이를 먹었고 희연은 입맛을 다셨다.
마침내 즐거운 멧돼지 시식을 마친 파브넷은 들고 있던 종이를 주머니에 넣더니 품속에 다른 종이를 꺼내 희연에게 내밀었다.
“자네 같은 훌륭한 인재는 뭘 해도 다 잘될 거야!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게나!”
그리 말하는 파브넷의 입가는 고기의 기름기로 반질거리고 있었다.
[<파브넷의 특별 추천장> : 파브넷의 일반 추천장보다 더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특별 추천장이다. 도시 <에빌론>에 가서 직업을 찾아보자.]
파브넷의 태도는 솔직히 말하면 치사했지만, 이만하면 나름 즐거운 결말이었다. 비옌과 하와도 멧돼지 구이를 냠냠 먹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불길 너머 두 아이를 바라보던 희연은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킹스메이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희연을 부르고 있었다.
희연은 그런 그녀를 따라 마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도시로 바로 갈 거죠?”
“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출발하려고요.”
“음… 괜찮으면 오늘 도시까지만 이동할까요? 낮에 이동하는 것보다 지금 이동하는 게 여러모로 좋거든요.”
“…?”
숨겨진 퀘스트처럼 뭔가 있는 건가?
희연은 고인물의 지혜를 이번에도 믿기로 했다. 꼬마들에게 인사라도 할까 했지만 그런 그녀에게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 놀에서는 헤어지는 인사를 하지 않아요. 매번 인사를 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슬프잖아요. 여기는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니까요.”
“아….”
“구태여 인사하는 게 여기 사람들에게는 상처라네요.”
킹스메이커는 조용한 미소로 희연을 재촉했다. 희연은 마지막으로 뒤돌아 꼬마들을 보았지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마을의 그 누구도 모르게 마을을 떠났다.
떠나는 이를 배웅하듯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사각거리는 수풀의 소리가 마치 뱀과 같았다.
그래서 희연은 보지 못했다. 비옌의 사과가 멍한 얼굴로 카나리아 숲을 바라보는 것을.
그리고, 그녀 다음에 올 새로운 유저가 몇 번이고 비옌의 잃어버린 사과를 찾을 거라는 것을.
마을 놀의 촌장 파브넷의 손녀 비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불시착한 이방인들에게 제 사과를 찾아달라고 할 것을 말이다.
사과가 돌아오는 날은 즐거운 날이고, 돌아오지 않는 날은 슬픈 날일 것이다. 파브넷은 어느 날이든 간에 유저들에게 특별한 날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들은 살았으니 웃고, 먹고, 떠들어야 하니까.
***
『커뮤니티 정보 게시판 – 제목 : 아니』
미친 거 아님? 없지없지 인성이 없지, 짭볼디 왜 니네 초보자 마을에서 싸우냐? 어? 우리 소중하신 뉴비님들이 네들 보고 놀라면 어쩌려고
솔직히 얘들 뉴비 정착 지원 담당자 순번에서 영원히 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자게가
- ㄴㄴ 우리 짭볼디 오늘 울면서 다시 생성 구역으로 돌아왔으니까 너무 까지 말자
- 왜 움? 뉴비랑 같이 눈누나나 떠났는데?
- 뺏겼대 뉴비
└그걸 뺏기네
└누가 상도덕도 없이 뉴비를 가로채
- 하이고 불쌍해서 어떡게 해
└모국어 없는 0개 국어가 더 불쌍한 거야
└ㅡㅡ
- 하여간 뉴비에 미친 놈들 왜 이리 많음 그냥 각자 알아서 게임하면 될 거 아냐
- 오늘 뉴비면 여우 퀘 에흐테흐 유니콘 길들인 애?
└에흐테흐 유니콘을 뉴비가 데려왔다고? 닉 이제 재료 독점 끝났네
- 뉴비는 소중하니까 다들 예쁘게 키워서 로그아웃시켜 주자
└???
- 그걸 낚이네 딱 보면 모르냐 인성이 없지랑 닉이랑 같은 길드잖아
└어딘데?
└있어 뉴비에 미친 새끼들이 만든 길드. 프메 한 판 더 하나 보네
- ዽ ጿ ኈ ቼ⋆길드 순정 만화 러ver⋆길드원 절찬리 모집 중ዽ ጿ ኈ ቼ
└뉴비도 받아줘요?
└삐약! 삐약! 아니야 거긴 아니야! 삐약! 돌아가! 삐약!
***
신나는 게임 속 모험을 끝내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최대풍속 초속 23미터 킥을 맞은 백희준은 현실에서 로그아웃당할 뻔했으나 살아남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백희준은 희연이 그의 남은 피통을 마저 끝내기 전에 잽싸게 제안을 했다.
“너 렙 100 찍으면 장비 줄게! 골드도 줄게! 백희연 그거 내려놔! 그거 아니야! 엄마! 엄마! 엄마아아악!”
국을 데우던 남매의 어머니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백희준은 희연이 렙 100 달성 시 장비를 주고 그 외에도 골드와 강화용 재료와 기타 잡다한 것들을 주기로 약속한 끝에야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름 원만한 합의를 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희연은 들고 있던 전기 파리채를 내려놓았다. 덕분에 남매는 우애 좋은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는 거 보니까 재미는 있었나 보다?”
“나쁘지는 않았어.”
희연은 말하면서 입안에 밥을 욱여넣었다.
그녀는 킹스메이커의 권유대로 첫 번째 마을 놀에서 벗어나 전직을 할 수 있는 도시 에빌론으로 이동했다.
킹스메이커는 내일도 도와주겠다며 친구 신청까지 한 다음에 로그아웃을 했고,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희연 또한 얼마 안 있어 로그아웃을 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백희준에게 날아차기를 한 것이다.
“뭐뭐 했는데?”
“사막 여우 퀘스트 하고 놀로 간 다음에 비옌의 사과 퀘스트를 하고 토끼랑 멧돼지 잡아서 파브넷한테 준 다음 특별 추천서 받아서 도시 도착했어.”
“…….”
“그래서 내일은 도시로 들어가서 전직부터 하려고.”
백희준은 동생의 말을 들으면서 감탄했다.
여우 퀘스트는 재수 없으면 사흘 내리 하는 경우도 있는 비효율의 극치인 퀘스트였다. 그런데 그걸 하루 만에 깬 것도 모자라 숨겨진 퀘스트까지 간파하다니.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엄마. 엄마 딸이 게이머의 재능이 있나 봐요.”
“게임으로 밥 벌어먹겠다고 하는 자식은 하나면 충분하다. 희연이 너도 쉬겠다고 휴학을 했다지만 놀지만 말고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백희준은 입을 닫았다. 희연의 머릿속에는 무슨 직업으로 전직을 할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자유 도시 에빌론』
[자유 도시 <에빌론>
: 평화와 화합의 도시 에빌론에서는 다양한 직업을 얻을 수 있다. 불시착한 이방인들의 요람이자 그들의 삶의 터전 중 하나로 주민들과 이방인들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이다. 에빌론은 언제나 이방인들에게 돌아올 곳이 되어줄 것이다.]
[자유 도시 <에빌론> / 치안도 : 나쁨(?) / 인구수 : 복잡 / 특산물 : 원석, 보석, 머루 나무 열매 / 도시 발전도 : 매우 높음]
자유 도시 에빌론에 대한 설명을 차분히 읽은 희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관문을 넘었다.
파브넷의 추천장을 본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어린 이방인이여 물들지 않기를 바라네.”
“…?”
뭔가 이상한 인사였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희연을 보며 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불 속으로 저 스스로 걸어가는 갸륵한 어린 양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희연은 찜찜한 기분으로 발을 뗐다. 병사의 반응에 조금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에빌론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관문을 넘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분수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 인구수에 걸맞게 발전한 에빌론은 마을 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곳이었다.
잠시 멍하니 서서 뭐부터 해야 하는지 헤매던 희연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잠시 경계했던 희연은 수수하고 평범한 차림새에 상대가 NPC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을 풀었다.
“안녕하세요, 이방인님. 혹시 에빌론은 처음이신가요?”
“네!”
“그렇군요! 저는 레이라고 합니다. 자유 도시 에빌론 행정지구에서 나왔습니다. 도시에 첫 방문을 하는 이방인님이 헤매지 않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랍니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끝남과 동시에 희연의 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에빌론 방문기 :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당신을 위한 선택!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에빌론 행정지구에서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 너도? 나도!’]
[퀘스트 조건 : <에빌론 방문기> 매뉴얼 따르기 / 서브 퀘스트 <에빌론 탐문기> 완료하기]
[보상 : 지식과 기록의 나라 <시드론>의 전체 지도, 자유 도시 <에빌론>의 상세 지도
(실패 시 자유 도시 <에빌론>의 상세 지도는 얻을 수 없습니다.)]
희연은 곧바로 퀘스트를 수락했다. 레이는 희연의 선택에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겁니다.”
레이가 주머니에 넣어놨던 깃발을 번쩍 치켜듦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마차가 나타났다.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관광 마차였다. 신기하게도 마차를 끄는 말은 따로 없었다.
희연이 마차를 타자 레이가 다시 손뼉을 쳤다. 그러자 뭉글뭉글하게 뭉친 구름들이 나타나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우와…!”
희연의 옆에 앉은 레이는 신기해하는 희연의 반응에 방긋 웃으며 깃발을 들었다.
“지금 보시는 분수대는 평화의 분수대입니다. 평화와 화합의 상징물로서 분수대 앞에서는 결코 싸우지 않을 거라는 아주 오래된 맹세가-.”
“죽어라-!”
콰쾅-!
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 포장되어있던 길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다른 의미로 감탄사를 내뱉는 희연을 보면서도 레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로 멱살잡이를 하며 분수대 주변을 박살 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치안대로 보이는 이들이 달려와 쌈박질하던 이들을 끌고 가버렸다.
“아주 작은 소란이 있었군요. 그러면 마저 설명하겠습니다. 자, 저기 보이는 신전은 에빌론의 평화를 상징하는 또 다른 상징물입니다. 동심과 모험의 신의 신전으로-.”
“행정지구 직원이! 힘을! 숨김!”
희연이 놀랄 틈도 없이 마차로 뛰어든 남자가 레이에게로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레이는 들고 있던 깃발로 검을 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대의 배를 발로 찼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레이!”
무거워 보이는 중갑옷을 입은 상대는 멋진 자세를 취하며 날아갔다. 희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레이를 보았다.
생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은 레이는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자. 그러면 에빌론의 명물인 장인 거리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에.”
희연은 지금이라도 마차에서 내려야 하는지 고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