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킹스메이커가 희연을 데리고 간 곳은 에빌론의 대표 맛집이라 불리는 카페 아타락시아였다.
아타락시아는 분수대 근처에 위치한 가게로, 테이블이 가게 내부가 아닌 광장에 있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끝나지 않는 싸움을 볼 수 있는 명당이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바로 옆에서 바로 옆에서 포장된 도로를 부수는 유저들이 즐비함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 가게 주인이 있었다.
아타락시아에는 에빌론의 특산품이라는 머루 열매로 만들어진 다양한 디저트가 있었는데, 그 많은 것 중에 무엇을 시킬까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킹스메이커의 주문은 마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둥근 테이블 위로 머루 나무 열매 디저트가 묘기처럼 층층이 쌓였다. 희연은 그 모습에 접시를 세팅해 준 카페 주인도 평범한 마을 NPC 1 같은 게 아님을 짐작했다.
보라색 주스를 쭉 빨아 먹는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이것저것 물었다.
“오리 님은 전직 뭐로 할 거예요? 전투? 생산?”
“아직 정하지는 않았어요. 전직을… 굳이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힐링 게임인 줄 알았으니까.
역시 백희준을 너무 쉽게 용서해 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 뜯어낼걸.”
그녀는 집에 있을 가정용 블랙 피카츄를 떠올렸다. 전기 파리채를 든 희연이 과한 요구를 했어도 백희준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져지기 싫다면 말이다.
“일단 가장 근접한 미래는 돈 많은 백수예요.”
백희준에게서 돈을 뜯을 거니까!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희연이 현질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직업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얻는 게 좋아요. 없으면 이 도시에서 못 나가거든요.”
“네? 진짜요?”
“네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리 님은 직업으로 초보자 같은 건 안 할 거잖아요. 그쵸?”
희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킹스메이커의 말마따나 나뭇가지를 들고 춤추는 은둔 고수 같은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둥글폭신 뽀쨕 나비보벳따우가 안 된다면 걸어 다니는 네온사인 같은 멋진 거라도 하고 싶었다.
“아까 레이가 말한 동문 쪽 퀘스트도 직업 없이 가면 관문소에서 막혀요. 아직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서 병사들이 보내주지 않거든요.”
“아… 그러면 일단 전직부터 해야겠네요.”
희연은 말하면서도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느긋하게 전직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따로 조사하지 않았다. 당장에 희연이 아는 직업이라곤 검사, 마법사 같은 것밖에 없었다.
난해한 직업의 세계로 인해 희연의 낯이 흐려지자 반대로 킹스메이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전직에 대해 잘 모르시면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데.”
“어….”
희연은 잠시 백희준을 부르는 것과 킹스메이커에게 신세 지는 것을 저울질해 보다 금세 결론을 내렸다. 역시 엄마의 아들을 게임 세상에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물론이죠! 메르헨은 전직 시스템이 다른 게임이랑 조금 달라서 잘 모르고 하면 손해 봐요! 제가 잘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어떤 직업이 좋은지 추천을 받기 위해 입을 떼던 희연은 급작스럽게 검은 낫을 휘두르는 킹스메이커의 모습에 기겁해서 입을 다물었다.
혹여나 본인을 베는 건가 싶어 의자를 끌며 뒤로 물러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릉-.
묵직해 보이는 검은 낫은 그 생김새와 달리 가벼운 철 소리를 냈다. 그녀의 낫이 가리키는 방향은 테이블 바로 옆.
낫에 잘린 듯 단면이 선명한 천 조각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물건에 의아함을 느낄 틈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했다.
“케이크 하나만 가져가려고 한 건데….”
“꺼져.”
“넹.”
도둑질하다 들킨 상대는 눈이 마주치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분수대 쪽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방금 뭐예요…?”
“아. 도적이요. 은신 스킬 쓴 거예요.”
소매 넣기범에 이어 소매치기범의 등장이었다. 희연이 물끄러미 테이블 위 디저트를 쳐다보자 킹스메이커가 얼른 인벤토리에 넣으라며 재촉했다.
얼떨결에 인벤토리가 풍족해진 희연에게 그녀는 이 도시의 치안도가 ‘나쁨(?)’ 상태인 이유를 알려주었다.
“에빌론의 치안도가 좋아질 수 없는 이유는 유저들 때문이에요.”
“아….”
희연은 레이와 함께하는 관광 시간 동안 보았던 다양한 광경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빠르게 납득했다.
“뒤에 물음표가 붙은 건 여기 NPC는 대체로 다 예의 있고 정의로운 쪽이라 그런 거죠. 그래서 원래라면 좋음이 떠야 하는데….”
차마 유저들 탓에 ‘좋음’ 상태는 띄울 수 없으니 상태창에 오류가 났고 그 결과물이 ‘(?)’인 거였다.
“그래도 오리 님은 운이 좋았어요. 도시로 들어오자마자 행정지구 NPC랑 돌아다닌 덕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가끔 심심하다고 저렙 유저들을 PK시키는 경우도 있거든요.”
“혹시 이 게임 장르가 생존물인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상한 애들이 많이 있기는 해요. 길드 소속이라고 텃세 부리는 것 정도는 애교죠.”
빨리 전직해서 이 도시를 떠나야겠다. 다행히도 그런 희연의 생각에 발맞추듯 킹스메이커에게는 경험과 연륜으로 다져진 속성 강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강의를 들을 환경만 준비되면 됐다.
쾅-!
“아야….”
“…….”
“죄송합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진 유저는 빠르게 사과를 하고는 스킬 이펙트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아타락시아의 주인이 나타나 더러워진 테이블을 열심히 닦았다.
사라진 유저는 킹스메이커 왈, 검사라 하더라.
“검사는 체력, 민첩 둘 다 신경 써서 키워야 하는 직업이라 기본적으로 운동신경 좋은 사람들이 하면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네에….”
언제 어디서 누가 날아와 자신을 로그아웃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연의 어깨는 긴장으로 굳었다. 그런 희연의 모습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리 님.”
“?”
“이 위험하고 험난한 곳을 떠나 안전하고 아늑한 장소로 옮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킹스메이커는 서둘러 희연을 챙긴 뒤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음… 이런. 집으로 가는 스크롤이 때마침 다 떨어졌네요.”
“집도 있나요?”
“네네. 하우징 콘텐츠도 있어요. 땅을 사고 행정지구 가서 건물 신고하고 해야 얻을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집 사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길드 하우스를 집으로 삼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몇 번 더 허공에 헛손질하던 킹스메이커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미안한 얼굴로 희연을 보았다.
“어떻게 하죠, 오리 님. 역시 우리 집으로 가는 스크롤이 없네요.”
“괜찮아요. 그러면 아까 거기로 다시 갈까요.”
“아뇨, 아뇨. 거기는 시끄럽고 위험해서 대화하기 힘들어요!”
“…?”
그 시끄럽고 위험한 생태계의 최종 승리자일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희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에빌론이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 하는 편견은 덤이었다.
“음…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오리 님, 괜찮으시면 저희 길드 하우스로 가서 얘기를 나눌까요?”
“킹 님네 길드요?”
“네! 지금 시간대면 다들 없기도 하고… 인적 드문 숲속에 있어서 조용하고 안전하고 아름답고 아무튼 되게 좋은 곳이거든요!”
적극적인 추천이었다. 희연은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상관없는 처지였다. 도리어 남을 길드 하우스로 데리고 가는 킹스메이커가 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꼭 오리 님의 미래를 책임지고 싶습니다! 제 인생을 걸고 싶어요!”
“왜 제 미래에 인생을…?”
인생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하기도 전에 킹스메이커가 돌돌 말린 스크롤을 꺼냈다. 붉은 끈으로 묶인 그것은 기이한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저희 길드 하우스에 오시면 예쁜 요정도 있고 신기한 키메… 동물들도 볼 수 있어요! 오리 님이 좋아하는 동글 뽀쟉!”
그건… 좀 보고 싶긴 하다.
희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에게 해가 되는 것도 손해 보는 것도 없었다. 게임 속 세상에서 킹스메이커가 다단계를 권유할 리도 없었고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봤자 PK당하는 게 전부였다.
희연이 스크롤을 받는 것과 동시에 킹스메이커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바꿔치기 스크롤(제작자 : 21세기 킹스메이커)> : 지정해 둔 대상과 위치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스크롤이다. 마할라틴 숲 세 개의 나무 아래 빈 둥지와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일회성이다.]
“스크롤을 찢으면 곧바로 이동될 거예요.”
“같이 이동하는 건가요?”
“아뇨, 아뇨. 일회성 아이템은 일반적으로 일인용이라서요. 저는 길드 스킬로 움직일 거예요. 그쪽에 계시면 제가 데리러 갈게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발밑에서 새하얀 나뭇가지가 튀어나왔다.
울창한 하얀 가지들이 그녀를 가렸다가 스르륵 움직여 무릎 언저리까지 몸을 수그렸을 때, 킹스메이커는 흔적은 사라진 뒤였다.
희연 또한 곧바로 들고 있던 스크롤을 쭉 찢었다. 그녀가 그 스크롤의 가격을 알았다면 조금은 망설였을 것이다.
반으로 갈라진 스크롤은 제멋대로 갈기갈기 찢기더니 저절로 자리를 잡아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 자리에 종이 대신에 떠오른 것은 킹스메이커가 들고 다니는 낫의 색을 고스란히 닮은 검은 마법진이었다. 그 위로 검붉은 기류가 흘렀다.
[<마할라틴 숲 세 개의 나무 아래 빈 둥지>와 위치를 바꾸시겠습니까?]
“예!”
검은 마법진이 붉게 빛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서 있던 장소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마치 캐릭터 생성 구역에서 사막여우의 앞으로 이동될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에빌론의 광장에서 들려오던 북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숲속의 백색소음이 대신 차지했다.
희연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세 개의 나무. 세 개의 뿌리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얽히고설켜 하나로 자라난 것이 세 개의 나무였다.
그녀는 그 신기한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삐롱-!
“?”
그리고 뭔가를 밟았다. 딱딱하지만 조금은 무른… 나무뿌리라고 하기엔 매끈한 무언가였다. 방금 들은 울음소리와 관련된 것이 분명한 무언가.
희연은 그게 무엇일까 고민하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
삐로롱-?
거대 뱁새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킹스메이커가 말한 동글 뽀쨕이가 이 뱁새를 말한 걸까? 희연은 고민하며 슬금슬금 뱁새로부터 물러났다.
그녀가 실수로 밟은 제 발을 들어 올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얀 새는 일단 귀엽기는 했다. 그런데 멀리서 봐야 귀여울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심장에 해로운 비주얼이었다, 정말.
“나는… 네 먹이가 아니야….”
삐롱삐롱 울던 뱁새가 짧은 부리로 희연의 뺨을 괜히 콕콕 찔렀다. 주춤하며 피하다 실수로 한 대 맞은 희연은 피가 훅 깎이는 것을 본 후 양손을 들어 뱁새의 양 뺨을 밀어냈다.
복슬복슬한 털 뭉치는 그 크기만큼이나 근력이 좋았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여, 여기 봐라… 여기! 호잇!”
그런 뱁새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멀리 던져보기도 했지만, 뱁새는 놀라울 정도로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희연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 살려주세요, 뱁새님.”
삐롱!